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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퐁 Oct 14. 2022

버티느냐 밀려나느냐

죽도록 싸워야 하지, 살아남기 위해.


돈과 돈 속에 나를 죽이고
돈과 돈 속에 내 꿈을 죽이고
태어나 죽을 때까지 미친 듯이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는 게 내 운명인걸.

- 꽃다지, <Fighter>


 집 앞 해장국집이 사라졌다. 자주 가는 곳은 아니었지만 가게 규모도 어느 정도 되는 곳이었는데, 어느 날 보니 사라져 있었다. 횡단보도 앞에 서면 늘 보이던 가게가 하루아침에 사라졌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서늘한 공포였다. 버티지 못하면 사라지는구나. (죽었구나, 마침내.) 그때는 코로나 시국도 아니었고 나는 당시 20대 중후반쯤이었다.


 해장국집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 역시 그 동네에서 사라졌다. 이삿짐을 싸고 본가가 있는 시골로 내려갔다. 홀로 의식주를 해결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버티는 데 실패했다는 뜻이다. 아웃소싱 업체를 통해 적성에도 맞지 않는 공장일을 지속하는 게 진저리가 났다. 뿐만 아니라 방송 일을 하고 싶어서 방통대에 편입했는데, 막상 가보니 방송국도 아웃소싱 업체의 천국이었다. 언제든지 갖다 쓰이다 버려지는 환경에 지칠 만큼 지쳤다.


 머리가 크고 나니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이 생각보다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남의 상처가 곪는 것보다 내 손톱 밑 가시가 더 아프다고, 내가 비정규직으로 여기저기 소모되는 게 견딜 수 없었다.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이 된다고? 그럼 여기서 몇 년 일한 쟤는 뭔데? 번아웃에 시달리는 와중에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본가에 오자마자 부모의 요구로 운전면허를 땄다. 시골에 살면 이동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주의력이 좋지 않아 4수를 한 끝에 면허를 땄다. 부모는 내가 차를 끌고 아무 데나 일을 구해서 출근하길 바랬다. (번아웃으로 내려왔는데!) 면허를 딴 지 4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장롱면허다. 서울에 오고 나서는 아예 운전할 일이 없다. 메 - 롱. 차라리 그때 코딩이나 배워서 나올걸.


 솔직히 본가에서 정신병만 가득 키워서 나왔다. 부모의 가스라이팅과 낯선 지역 환경, 무엇보다 시골의 교통 문제가 내 발목을 잡았다. 고시촌에 가기 전, 본가로 돌아갈 생각을 며칠 했다가 깔끔히 접어버린 것도 교통 때문이었다. 수도권 대도시의 대중교통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절대 귀촌을 추천하지 않는다. 시골에서 시내버스를 타본 사람들에게는 경의 중앙선도 천사로 보일 것이다. 음… 아마도?


 시골에서도, 본가의 인근 시내에서도 나는 버티는 데 실패했다. 가족을 버티지 못해, 낯선 환경을 버티지 못하고 밀려나듯 서울에 왔다. 심지어 본가의 인근 시내에서 자취하는 동안에 집단 따돌림과 권고사직 같은 사건들이 나를 절벽으로 밀어댔다. 자살 시도까지 했으니, 그 동네에 대해서는 트라우마가 생길 지경이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이름도 바꾸고 전화번호도 바꾸고 직업도 바꾸고 깨끗하게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마치 온라인 게임처럼.


 부모는 내게 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냐고, 역마살 꼈냐고 물었다. 나는 속으로 답했다. 나도 한 곳에 정착하고 싶다고. 투룸 이상의 집과 오래 버틸 수 있는 일자리, 내가 무엇을 하든 간에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들의 커뮤니티를 갖고 싶다고. 사막에서 생존하기 위해 오아시스를 찾아 떠도는 것처럼 나 역시 그것을 찾아 떠돌 뿐이었다. (하다못해 집이 오래 머물 수 있는 조건이면 진작에 정착을 했을 것이다.)


 서울에 온 지 2년 차. 정말 근근이 버티고 서 있는 중이다. 청년수당 같은 사업이 내게 안전망이 되어주고 있다. 공공 부문의 사회안전망 시스템 구축이 사람들을 밀려나지 않게 버팀목 역할을 해준다는 것을 확실히 체감하고 있다. 일자리센터 같은 기관에서 취업 준비도 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더 이상 밀려나지 않게 사회안전망이란 버팀목을 꽉 붙잡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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