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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퐁 Oct 15. 2022

12월 32일

헤어짐의 순간.


 안녕이란 인사가 여행을 위한 거면 가장 예쁜 미소로 나는 웃어줄 텐데.

 - 보아, <Everlasting>



 서울에서 경험한 일자리는 산업단지나 시골에서의 일자리와 차원이 달랐다. 내가 일한 곳들이 유독 괜찮은 곳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곳에서는 욕설이나 폭언이 없었다. 남초 집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담배 쩐내와 호모소셜 내 서열 매기기 같은 것도 없었다. 비록 처음 구한 원룸의 방값이 심각하게 비쌌지만 그걸 빼면 그런대로 살 만했다.


 때문에 난 서울에서 가능한 오래 버티고 싶었다. 코로나로 인해 큰 타격이 있긴 했지만, 청년들을 위한 사업도 잘 구축되어 있고 자치구 별로 청년 센터도 있어 필요한 도움을 그때그때 요청할 수도 있었다. 미어캣만큼 심약한 내가 여러모로 버틸 수 있는 환경이었다. 왜 청년들이 서울로 몰리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상경하게 된 계기는 한 공공기관에서 기간제 인력을 구하면서였다. 당시 같이 활동하던 지인이 그 기관에 취업하면서 인력을 구했고, 때마침 일이 없어 괴로워하던 내가 덥석 신청을 했다. 처음에는 한 달만 하던 일을 연말까지 하게 되었다. 아싸, 돈 벌 수 있는 기간이 늘었다.


 공장과 택배, 물류 등의 험한 일만 하던 내게 공공기관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꿀알바였다. 모두가 내게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선생님이라니. 공공기관의 조직 문화 때문이긴 했지만, 선생님이라고 불리니 왠지 존중받는 느낌이었다. 별로 중요한 일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책임감이 생겼다.


 당시 살던 곳에서 서울까지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했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아니, 왜 도대체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지금 생각하면 나도 꽤 미친 사람 같았다. 자살 시도를 한 지 몇 달이 지났다고 바로 일을 구한 게 왕복 4시간에 가까운 장거리 통근이라니.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지금은 통근 거리가 매우 중요하다. 직주인접.)


 나는 일하는 사람이 존중받는 환경에서 일하고 싶었다. 관리자의 폭언을 들으며 단순노동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교양 있는 선생님(직원)들과 같이 일을 하고 밥을 먹고 기관의 대소사를 함께 하면서 행복한 직장 생활을 경험했다. 내 생에 이토록 행복한 순간이 얼마나 있었을까? 지금도 글을 쓰면서 미소를 짓고 있다.


 하지만 내가 만족스럽게 일을 하고 있어도 이 일자리에는 디데이가 존재했다. 12월 31일이 지나면 난 더 이상 그곳의 소속이 아니니까. 다시 백수가 되는 것이었다. 확실히 일터가 주는 긍정적인 소속감과 일상 루틴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해가 바뀌고 더 이상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되자, 그곳에서 밀려났음을 느꼈다. 기간제 일이란 게 그 해의 사업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정리되는 것이었다.


 내가 일하던 기관, 부서에서도 여러 명의 기간제 선생님들이 계약 종료가 된 채 새해를 보냈다. 그분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기관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더 좋은 곳으로 가셨을까? 당시의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채 밀려나기 바빴다. 파도가 칠 것을 알았어도 피할 기력이 없었다. 아무도 내게 파도 타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밀면 밀려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며 버티는 것밖에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밥그릇을 지킬 수 있을까? 오늘도 난 파도에 올라서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 그 사이 세 번째 12월 32일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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