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퐁 Oct 14. 2022

행복한 세상의 미어캣

세상:?????


 "이럴수록 생각은 해야 하는 거지. 자네들, 비록 불행할 때에도 누군가가 생각을 멈추지 않고 있다면 모두들 희망을 가져도 좋아. (중략) 믿어 주게, 자네들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가 있네."

- 이강백,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그는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연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본의 아니게 자신의 처지를 밝혀야 할 때도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당혹스러워하는 건 상대방이었다. 태도가 당당하니 아무도 그를 딱하게 여기거나 한심하게 여길 수 없었다. 남이 이상하게 보면 당황부터 하는 나와는 다른 사람 같았다.


 그는 백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꿈 하나 가지고 상경한 성우 지망생이다. 생계를 위해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하고 남은 시간에는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 불안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본인은 원래 이렇게 살고 싶었다고 답했다. 집에 가면 뒹굴거리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세상에, 이런 사람 처음 봐.


 엄밀히 말해 나 역시 프리터다. 생계를 위해 알바를 하고 남은 시간을 빈둥대며 보낸다. 원래는 음악이 하고 싶었다. 하지만 꿈보다 인정 욕구와 불안이 훨씬 컸다. 부족한 재능을 인정하기 싫었고 시간이 가는 게 두려웠다. 음악을 포기했다. 지금의 내게 남은 건 열등감과 수치심뿐. 열정이나 신념 같은 건 꺾인 지 오래였다. 지금 내 꿈이라곤 이 고시촌 원룸을 벗어나 수도권에서 그나마 집값이 싼 동네에 투룸을 얻는 것이다. (만약 대상을 받는다면 보증금에 보탤 것이다.)


 반면에 그는 꿈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 나온 대사를 인용하자면, 그는 꼿꼿했다. 꼿꼿하고 단단한 사람. 흔들림 없이 자기만의 길을 가는 사람. 이것이 그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했다.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당당함이 부러웠다. 마치 소년만화 주인공을 보는 것 같달까. 근데 나는 왜 당당하지 못한 걸까?


 꾸밈없이 당당하게, 온전히 나로 살아가고 싶었다. 때문에 가족들의 올가미를 뛰쳐나와 시골에서 서울 한복판에 짐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온전히 나로 살고 있는지 자문하면 자신이 없다. 나는 타인이란 거울 앞에서 쉽게 흔들리고 깨졌다. 항상 남들 눈치를 보고 스스로를 검열한다. 나를 백수라고 소개했을 때 예상되는 사람들의 반응이 신경 쓰여 단어를 필터링했던 적이 있다. 내가 온전히 나로 받아들여졌을 때는 니트생활자 프로그램에 참가했을 때 말고는 없지 않을까?


 남의 눈치를 쓸데없이 신경 써야 하는 사회에서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 솔직히 불행하다. 내가 단단하고 꼿꼿한 사람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나를 온전한 자신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에서는 그 누구라도 불행에 잠식될 것이다. 아마 그도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많지 않았을까?


 내가 누군지 끊임없이 재단하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일은 버티기의 연속이다. 내 가치를 드러낼 기회가 올 때까지 버티고 서 있어야 한다. 꼿꼿함은 이 세상의 못된 시선을 버틸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체력이자 근력인 셈이다. 꼿꼿하지 않고 심지가 약한 사람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타협한다. 나 역시 그랬다.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기 때문에 추구하던 꿈과 가치를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했다.


 나처럼 미어캣 같은 멘탈을 지닌 사람들의 일상은 주눅의 연속이다. 정규직이 아니어서, 스펙이 변변치 않아서, 돈이 없어서 주눅 든다. 여기에 여러 결의 소수자성을 교차하면 주눅 들다 못해 땅을 파고 내려갈 것이다. 만약에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면? 아니, 사실 나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한다면? 돈을 벌기 위해 타국에서 온 이주노동자라면? 삶의 난이도가 수직 상승하지 않을까?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난 지금도 충분히 힘든데.


 꼿꼿하지 않아도, 유리처럼 바스러지기 쉬운 멘탈의 소유자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보다 다양한 삶을 존중하는 세상 말이다. 그런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인식도 제도도 바뀌어야 하겠지. 내가 나로 살려면 무엇부터 바뀌어야 좋을까?


  

이전 15화 확실한 재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