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하는 말이지만, 나는 그저 회사에 다니고, 커피를 마시고, 주말을 기다리며, 그렇게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직장인일 뿐이다. 대단한 커피 전문가도 아니고, 매 순간마다 커피 생각에만 몰두하는 엄청난 마니아도 못 된다.
그런데 또 돌아보면 이상하게도 '아, 그러니까 그게 다 커피 때문이었잖아' 싶은 구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거참, 그깟 기호품 음료가 뭐라고.
사람은 각자가 좋아하는 것들을 따라가게 되어 있고, 그 선택들을 모아서 보면 여태까지 걸어온 길이 된다. 반대로 싫어하는 것들은 열심히 피하게 되어 있고, 그 선택들을 모아서 보면 걸어온 길의 외곽이 선명히 보인다.
나는 -
정리정돈된 환경에서 편안하게 오래 머무르고, 소리가 시끄러운 상황을 기피하며, 좋은 커피가 있는 공간에는 기꺼이 시간과 돈을 투자하며 찾아다니는 사람이다. 이런 행동 패턴의 공식이 나의 일상, 여행, 그리고 기억을 구축한다.
나는 위생과 정리에 대한 어느 정도의 강박을 가지고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위생 30%, 정리 70% 정도의 비율이 되려나. 재미있게도 나의 이 비율을 얼추 거꾸로 뒤집은, 그러니까 정리 20%, 위생 80% 정도의 강박을 가진 사람과 함께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물건을 구입하거나, 식당을 선택하고, 또는 그 이후의 재방문 여부를 결정할 때의 선택지가 좁고도 뚜렷하다. 당연하지. 양 측 모두의 기준을 통과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니까.
이 물건의 구매가 나의 재고 현황과 수납 상태를 흩트리지 않을 것인가. 이 식당은 가게 앞과 주방, 그리고 매장 바닥 청소를 얼마나 꼼꼼히 주기적으로 하는. 평상시의 정리정돈 또는 위생청소 상태를 흡족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도구를 들이고 앱을 사용할 것인가. 이렇게 필수 고려 요소가 많아서 선택의 진입장벽이 대체로 높은 편이다. (대신, 이런 조건들을 두루 충족하는 경우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편.)
성향과 우선순위는 서로 다르지만, 아무래도 좋다. 이런 조합의 2인 가정인 덕에 우리의 공간은 대체로 늘 깨끗하고 또 깔끔하니까. 수납 최적화와 정리정돈에 집착하는 1인과, 위생 청소와 화학적 안전에 몰두하는 1인의 조합은 그저 옳다. 결혼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형태의 동거에도 이런 인적 구성을 추천하고 싶을 정도.
정리정돈과 위생관리에 대한 성향이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했다면, 좋은 커피와 좋은 공간에 대한 애호는 우리의 교집합, 공통분모로 작용한다. 당연한 듯이 하는 '커피를 위한 선택'들이 생활 곳곳에서 일어난다.
쉬는 날에 커피와 함께 하는 휴식 시간을 소중히 여기지만 번화가, 사람 많은 곳, 소리가 울리는 곳은 싫으니까 조용한 골목에 위치한 동네 카페에, 그것도 가급적이 오픈 시간에 맞춰서 다녀오게 된다.
카페인 걱정 없는 오전에 커피를 마음 편하게 즐기고 싶으니까 다녀오고 싶은 곳이 있다면 일찌감치 오전에 다녀오는 편을 선택하고 운동이나 휴식 등 그 외의 일정들을 자연스레 오후나 저녁에 배치한다.
평일에 집에서 식사할 일이 적으니 집에 신선 식재료는 커녕, 쌀이나 기본양념조차 없는 날이 많지만 커피 원두와 캡슐은 결코 떨어지는 법이 없다. 되려, 원두는 신나서 충동구매하지 않도록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부엌 수납공간의 일정 공간은 커피존에 할애해야 하니까, 이에 맞춰서 다른 가전과 식기들을 줄이거나 조절한다. 이를테면, 집에 전기 압력 밥솥이 없는데 다른 가전들 갯수를 줄이기 전에는 아직 구매할 생각이 없다든지. 현재 식기류 중에서 사용 빈도가 가장 높은 것은 커피잔과 머그들이니까 총량 보존을 위해서 다른 한식기류는 어지간해서는 구매를 자제한다든지.
주말에 별 일정 계획 없이 집에 있을 때에 문득, 평소에 가보기 어려웠던 카페에 가자는 제안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상대방도 구미 당겨할 것을 알기 때문에 말을 꺼내는 데에도 별 고민이나 주저함이 끼어들 리 없다.
이런 시간들은 너무 자연스럽게도 우리가 함께 이뤄가는 하루하루, 하나의 계절, 그리고 일상이 된다. 서로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패턴이 된다.
커피는 여행의 루틴에도 숨어 있다.
식도락가들은 여행을 상상하고 기획하는 단계에서부터 모든 일정과 동선이 맛집의 위치나 영업시간에 좌우된다지. 그런 식으로 나의 발걸음은 여행지에서의 카페에 좌우된다.
숙소 주변에 아침부터 여는 멋진 카페가 있다면 조식은 당연히 제외해야지. 만약 숙소가 외딴곳에 위치한 리조트여서 인근에 걸어서 갈 카페가 마땅히 없는 경우라면 조식은 포함해 볼까. 음식이야 맛이 있든 없든 크게 개의치 않지만 여행지에서의 기분 좋은 아침에는 커피가 있어줘야 하니까.
우연히 가을에 별 계획 없이 동해 가을 여행을 떠났는데 마침 커피 박람회가 열리는 중이라면 동선을 양양에서 강릉으로 바꿔서라도 들러줘야지. 평소에 멀고 차도 막혀서 어지간하면 가지 않는 남양주이지만, 그곳에 괜찮은 커피 박물관이 있다면 한 번쯤 굳이 발걸음을 해볼 마음이 들기도 한다.
때로는 꼭 가보고 싶은 카페를 방문하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떤 지역에 여행을 가는 것도 괜찮겠다. 한번 가보고 너무 마음에 들면 여행 중에 다시 가야 하니까 1박으로는 부족하고 최소 2박 3일 이상이 좋겠다. 그리고 카페에서 여유 부릴 여백의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 외에는 별다른 일정이 없어야 하겠다.
부산에 간다면 바닷가도 좋지만 숙소는 역시 영도 아니면 서면 근처로 잡아야지. 그래야 꼭 가보고 싶은 카페의 본점과 새로 생긴 로스터리 지점에 다 가보기 편할 테니까.
태국 방콕을 경유하게 된다면 꼭 이틀 이상은 체류하면서 지난번에 아쉽게도 못 가본 스페셜티 전문 카페 근처로 숙소를 잡고 아침마다 들러줘야지. 나머지 도시 구경은 카페에서 시간 보낼 만큼 보내고 남는 시간에 해도 충분해.
만약에 남유럽 여행을 간다면 내 본디 여행지 취향은 이탈리아보다는 스페인이지만, 에스프레소를 생각한다면 이탈리아로 행선지를 바꾸지 못할 이유는 또 뭐 있겠는가. 가면 되지, 이탈리아. Ciao.
말 나온 김에 바쁜 시기가 한 차례 지나가고 나면 그 기념으로 부산에나 한번 다녀와볼까. 해변도, 맛집도, 남들이 다들 추천하는 볼거리 그 무엇에도 연연하지 말고 커피만 즐기고 오는 것도 멋지겠다. 기왕이면 비가 포슬포슬 내리는 그런 날이었으면 좋겠다. 커피의 향이 더 따스하고 진하게 느껴지게.
흠, 아무래도 내 인생 결정들을 이루는 것은 8할이 커피가 아닐까. 아니면 커피를 주제로 이 에세이 시리즈를 쓰기 시작함으로써 그 8할이 비로소 채워졌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