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에는 순탄하고 완만한 그래프가 이어지는 구간이 있다.
그러다가도 느닷없이 궤적이 사인(sin), 코사인(cos), 심지어 탄젠트(tan) 그래프를 그리며 널뛰는 지점도 등장하기 마련이다.
흠, 얼핏 들으면 연애 감정에 대한 이야기 같기도 하네. 물론 여기에서는 커피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그러니까 내가 커피라는 매개체와 사랑에 빠진 이야기. 늘 적당히 즐겨 마시던 기호품을 넘어서, 그야말로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고 감정이 ‘훅’하고 솟구쳤던 그 순간에 대하여.
머릿속으로 다양한 장소, 수많은 기억들을 떠올려봐도 나의 소위 ‘입덕’ 순간은 변함이 없다.
2018년 12월의 어느 날.
豆香洞コーヒー (토카도 커피)
토카도.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으면 두가향, 커피 원두의 향기가 감도는 곳.
일본 후쿠오카시, 지하철 쿠코(Kuko) 라인의 나카스 카와바타(中洲川端) 역 근처, 어느 상가의 지하에 있는 자그마한 커피 전문점이다.
사실,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무엇을 해도 기분이 너그러울 수밖에 없는 계절, 쉽사리 행복을 느끼게 되는 그런 날이었으니까.
직장과 병행한 석사과정의 7부 능선이자 가장 가파른 고개였던 3학기. 그 종강 직후에 모든 일상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떠나간 일본 여행이었다.
적당히 남들 하듯이 다녀도 정규 5학기 졸업에는 아무런 차질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 그걸 기필코 1학기 단축해서 조기졸업을 하겠다며 이 악물고 앞만 보고 내달렸던 나는 도무지 여유라는 사치를 부릴 수가 없었다.
매 학기마다 최대 학점 수강하고, 단 한 번의 실패 없이 연속 3학기 동안 우수학점을 받아야 겨우 ‘조기졸업 신청 자격’ 정도가 주어졌다. 그리고서 다시금 마지막 학기인 4학기에도 우수학점을 받고 졸업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았다.
냉철하게 확률을 따져보면 나에게는 상당한 승산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실패할 이유를 찾는 것이 더 어려울 지경이었다. 나는 학습능력이 뛰어나고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런데도 늘 마음 한편에 쫓기는 기분을 안고 살았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그런 불안과 강박 속에서, 혹여라도 나중에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지각 한번, 결석 한번 없이 늘 헐레벌떡 수업에 들어가서 제일 앞줄에 앉았다.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한 번이라도 언급한 도서는 득달 같이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고 누락된 것이 있을세라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조별 발표나 공동 리포트 작성 때에는 나와는 달리 마음가짐이 느긋한 조원 때문에 내 학점 평가가 발목 잡힐까 전전긍긍했다. 이 모든 와중에 회사에서는 팀장으로 바쁘게 지낸 것은 물론이었다.
그렇게 몇 계절을 살아내고 나서 어느 순간, 자각했다. 내가 나를 몰아붙이고 있음을. 미래의 나에게서 생명력을 가불해서, 그것도 높은 이율을 치르면서 소진하고 있음을. 이것 참 숨 가쁘고 서러워라. 그런데 나 자신 말고는 탓할 사람도 달리 없네. 나적나. 역시 나의 가장 큰 적은 나다. 과거의 나 자신.
당장에 남아있는 과제들을 외면할 도리는 없었지만 뭔가 희망이 필요했다. 휴식의 약속. 떠남에 대한 기대. 그래서 종강하자마자 떠날 일본 여행을 결심했다. 길게 고민하지도 않고 곧바로 항공편과 숙소를 예약했다.
지금 아무리 허덕허덕 지쳐 있어도 어쨌든 연말의 나는 후쿠오카 나카스 강가에서 맥주 한 잔 하고 야경을 보면서 옆지기와 손 잡고 산책하고 있을 거니까. 그 장면만 그리면서 그 시기를 버텨냈다.
야심 차게 떠나간 여행 같지만 항공편과 숙소 예약 이후에는 그 무엇도 검색하거나 고민하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시간에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탔을 뿐,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한 후에도 도무지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바라는 것이 없었다. 아니, 떠남으로써 이미 바라는 바를 다 이루었기 때문이다.
빽빽하게 밀도 높은 나의 일상에서 잠시 떨어져서 쉼표를 찍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발길 닿는 대로 구경 다니다가, 피곤하다 싶으면 미련 없이 숙소로 돌아와서 목욕을 하고, 때로는 낮잠을 자기도 하는 그런 여행이었다. '기껏 여기까지 여행을 와서 시간 아깝게'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여행의 마지막 날, 나카스 강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아점을 먹고 나서 커피 생각이 나니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카페를 검색해서 찾아간 곳이 토카도였을 뿐이다. 매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토카도라는 이름을 일본어로 어떻게 기재하는지, 정보라고는 당최 하나도 없는 상태로 두리번거리다가 – 그렇게 만났다.
조금은 한산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제법 오가는 상가의 지하 한편에, 어쩐지 주변과는 다른 공기가 흐르는 듯한, 진하고 고소한 커피콩 향기가 가득한 그곳을.
좌석 선택은 내가 좋아하는 바(bar) 테이블. 관광객들이 찾는 가게가 아닌지라 영어는 한 마디도 안 통할 기세였지만 다행히 영어로 된 메뉴판이 있어서 찬찬히 읽어보고 각자 마음에 드는 드립커피를 골랐다.
옆지기는 가게의 이름을 달고 있는 토카도 블렌드. 나는 때마침 시즈널 메뉴였 크리스마스 블렌드.
더듬더듬 짧은 일본어로 주문을 마치고 나니까 기분 좋은 적막감이 몰려들었다. 낯선 도시에서 이방인으로서의 감각. 여행자만이 가질 수 있는 비일상적인 이질감.
일본어를 거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변의 언어들은 백색소음으로 뭉그러져서 귓등을 스치고 지나간다. 인지되는 소리라고는 옆지기와의 도란도란 다정한 대화, 그리고 비언어적 커피의 소리들 뿐이었다.
그르르륵. 커피 원두가 분쇄되는 소리. 톡톡톡 탁. 드리퍼를 두드려서 커피를 고르게 분산시키는 소리. 사그락. 단 1g이라도 오차를 허용할 수 없다는 듯이 바리스타가 조그마한 스푼으로 원두를 덜어내는 소리. 브르르르. 조용히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 스으으으. 물을 머금고 커피빵이 부풀어 오르는 소리.
그리고, 똑. 또르륵 퐁. 적당한 입자의 커피 원두 속을 통과하면서 뜨거운 물이 커피가 되어 서버 속으로 청량하게 떨어지는 소리.
바리스타는 아무런 말 없이 신중한 태도로 추출한 커피의 중량을 확인하고, 절도 있는 손짓으로 소서와 잔을 꺼내서 커피를 따르고, 세상 가장 중요한 발표라도 하듯이 커피에 대한 설명을 우아하게 읊조리며 서빙을 했다. 우리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서 고개만 열심히 끄덕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겨울이라 해도 그 해 12월 후쿠오카의 기온은 적당히 서늘한 것이 늦가을의 부산 정도였다. 낯선 도시에서 크리스마스 기분은 양껏 느끼면서도 추워서 떨거나 발을 동동거리거나 콧물을 훌쩍거리지 않아도 되는 날씨. 패딩이나 코트가 아니라 앙고라 카디건과 털모자만 입어도 문제없었다. 커피의 향과 온기가 들어찬 실내 카페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따스했다.
세상과 단절되어 포근한 보금자리에 웅크린 채 있으니 시간이 멈추었거나 적어도 조금은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숨을 가득 들이쉬면,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벽한 커피의 향이 가득했다.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득 차오른 이 기분이 새어 나갈 것만 같아서.
그렇게, 사랑에 빠졌다.
어쩌면 커피와.
어쩌면 커피를 풍경으로 한 그날의 그 장소, 그 시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