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여태까지 실컷 커피에 대한 애정을 늘어놓고서, 이제 와서 커피가 아니어도 된다니, 허무하게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러니까 이런 말이다. 커피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감각의 기억이고 순간의 풍경이며 누군가와 취향을 공유하는 매개체이다.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커피'라는 그 음료에 있는 것이 아니다. 본질은 아마도 커피가 담아내는 바로 그 감각, 순간, 취향 그 자체다.
“밥은 먹었어?”
“언제 한번 밥 먹자.”
한국인들이 가장 자주 한다는 이 인사말이 반드시 ‘쌀로 지은 밥’을 일컫는 것은 아니듯이 “커피 한 잔 할까요” 역시 꼭 커피 원두로 내린 음료를 마시자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나와 이 시간을 함께 하는 상대방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든, 핫초코를 마시든, 자몽에이드를 마시든, 그런 건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 많은 음료 중에서 커피에 손이 가는 것은 그저 나의 선호일 뿐.
어쩌면 우리는 마주 앉거나 나란히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에 심리적 안정감을 위해서 무언가 손에 쥐고 있을 것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화를 하면서 계속 상대방을 바라보기도 부담스럽고, 아예 다른 곳을 바라보기에도 어색할 때 잠시 시선을 둘 자연스러운 명분 같은 것.
게다가 커피를 비롯한 음료들은 고형의 음식처럼 썰거나 떠서 먹거나 또는 씹느라 대화의 타이밍을 놓칠 일도 없지 않은가. 잠시 우아하게 한 모금 홀짝이고 잔을 내려놓으면 언제든지 대화의 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니까 현대인이여, 그저 음료가 너무 뜨거울 때 급하게 삼키지 않게만 조심하면서 그 시간을 천천히 즐길지어다. 잔에 든 액체가 무엇이 됐든, 그것이 커피든 아니든 간에.
우리 사이에 놓은 그 음료가 꼭 커피일 필요는 없지만, 커피는 여전히 참 좋은 핑계이며 사람 사이의 대화거리, 연결고리, 사회적 매개체이긴 하다.
“너, 혹시 커피에 관심 있는 거면 다음 주말에 같이 바리스타 수업 상담받으러 가볼래? 기왕 하는 김에 자격증도 따면 좋고, 아니면 그냥 무해하고 즐거운 취미생활 하나 만든다고 생각하면 돼.”
작년 여름, 친구 Y에게 내가 툭 던진 말이었다.
이사와 출산, 육아 등으로 인해 기존에 하던 일은 내려놓고 잠시 풀타임 양육인으로 지내면서 자아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참 많던 그녀였다.
앞으로의 인생을 위해 무언가 자격증을 따서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볼까 하는 마음이 절반. 그러나 당장 한창 손이 많이 가는 아이 둘을 키우면서 시간도 체력도 여의치 않거니와 자신을 위해 선뜻 큰돈 쓰기 주저하는 마음 또한 절반.
마침 Y가 향의 감별에 예민하여 티 소믈리에 쪽을 알아볼까 했다는 말을 지나가듯이 했던 것이 생각났다. 와아, 그럼 혹시 커피 바리스타에도 관심 있으면 다음에 언제 같이 학원 다니면 좋겠다, 와아, 하고 넘어갔던 술자리의 가벼운 화두를 떠올렸다.
아, 이거 잘하면 되겠어.
나는 어떻게든 Y가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아니면 한 달에 한두 번이라도, 육아인의 자각을 잠시 내려놓고 자기만의 시간을 가졌으면 싶었다.
그 명분은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혼자서 여행을 가든, 동호회를 나가든, 전시를 보러 다니든, 아니면 나처럼 책 한 권과 이어폰을 챙겨 들고 조용한 단골 카페로 피신을 가든.
하지만 문제는 좀처럼 자발적으로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좀 가져봐’라고 주변에서 백날 말을 해는 건 아마도 소용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함께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생각해 봐야지.
마침 센서리와 브루잉 자격증을 따볼까 싶어서 관련 수업을 알아보던 차였다. 음, 그래, 기왕 들으려는 학원 수업을 홍대점이 아니라 Y도 올 수 있는 위치의 종각점에서 들으면 되겠어.
나는 가을부터 수강 시작할 예정이니까 그전에 Y는 주중에 기초반인 바리스타 스킬 베이직 클래스를 듣고 자격증을 취득해 두면 되겠네. 그러고서 가을부터는 센서리와 브루잉 수업을 같이 다니는 거야. (센서리, 브루잉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바리스타 수업을 수강하기 위해서는 가장 기초인 바리스타 스킬 베이직을 취득해야 한다.)
이렇게 일단 애를 주말에 집 밖으로 끌어낸 다음에, 이런 외출에 익숙해지고 나면 학원 마치고 나서 필라테스 원데이 클래스에 가보자고 꼬드겨서(?) 운동도 시키는 거야. 그래. 딱이다. 완벽하네.
여기에서 반전. 인생은 늘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는 법이니까. Y의 육아 사정, 수술 일정, 가족 여행, 그리고 나의 코로나19 확진 등 다양한 변수의 농간으로 인해 우리는 끝내 같이 수업을 듣지는 못했다. Y는 주중반, 우리는 주말반, 같은 장소 다른 시간에서 각자의 일정대로 따로 움직였을 뿐.
그럼에도 난 나의 계획이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한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명실공히 ‘커피친구’가 되었으니까. ‘커피친구 정기 회동을 하겠다’면서 Y를 꾸준히 바깥세상으로 끌어내는 것이 모두에게 자연스러운 일이 됐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월 1회 정도 만나서 새로운 커피를 체험해보기도 하고, 낯선 동네를 구경하기도 하고, 앞으로 배워보고 싶은 것들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다 떠나서 나는 주로 그녀가 잠시 가정, 남편, 아이, 집안 대소사를 떠나서 ‘나만의 것, 나만의 취미 영역’을 구축하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그래, 내가 원하던 거 바로 이거잖아.
그리고 이건 사실 매개체가 꼭 커피가 아니었어도 됐을 일이다. 커피는 그저 핑계일 뿐이니까. 하지만 또 마침 커피이기 때문에 기분 좋은 일이기도 하다. 커피는 우리의 유쾌한 교집합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다음 커피 탐방은 어디로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