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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홀로길에 Jun 23. 2023

구해줘! 전세

오늘이 낯선 지구 여행자입니다만 ep9

  “집주인이 이제 전화도 안 받아”

  아내는 씻고 나오는 나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 전부터 미분양된 아파트를 할인하기 시작한 원흥지구. 그곳으로 이사하기 위해 우린 집주인에게 알렸다. 집주인 또한 이사할 날짜를 미리 알려달라 했다. 우리의 이사는 불과 얼마 전까지 아무런 걱정도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집주인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 벌써 보름이 넘었다.


  4년 전 우린 층간소음에 시달리던 애증의 첫 집을 팔고 근처의 조금 더 넓은 빌라 1층으로 이사했다. 어렸던 아이들이 맘껏 뛰어도 되고, 일단 넓어서 좋았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제외하면 단점이 너무 많았다. 위층에 노모와 둘이 사는 아저씨는 늘 술에 취해 있었고 밤이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노모와 싸웠다. 주변 학생들이 우리 집 담벼락에 숨어 담배를 피우는 건 애교였다. 겨울엔 난방비, 여름엔 전기료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나왔다. 우린 이사를 결심했다.


  미분양된 아파트는 빠르게 소진되어 갔다. 마음이 초조했다. 이러다 이사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갑갑해졌다. 나에게 집주인과의 연락을 재촉하는 아내와 다툼이 잦아졌다. 나에게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원흥지구로 이사는 물 건너가고 하염없이 집주인의 연락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수개월이 지난 어느 날 집주인에게 전화가 왔다.


  집주인의 개인 대소사에 각종 핑계를 듣고 있으니 피곤했다. 화가 났지만, 연락됐을 때 이사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사를 하겠다면 원하는 날짜에 맞춰 전세보증금을 돌려주겠다고 집주인은 또다시 약속했다. 그날부터 우린 근처의 신축 빌라를 서둘러 알아보기 시작했다. 몇 군데 둘러보고 그 중 맘에 드는 곳에 계약금을 지불하고 왔다.


  “미친, 이 사람 또 전화 안 받아!”

  짜증 섞인 아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휴대전화 너머로 들렸다. 계약하고 온 이후로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연락이 되지 않는 집주인. 처음엔 건강에 무슨 문제가 있나 걱정도 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시간은 가고 계약한 분양사무실에선 계속 독촉 전화가 왔다. 이번엔 이사하지 못하는 것뿐 아니라 계약금도 날렸다.


  분양일을 하는 친구의 도움으로 한 법무사를 소개받았다. 그냥 손 놓고 있을 수 없어 결국 법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전세 계약서와 통화기록, 날린 계약금 관련 자료 등 원하는 모든 걸 준비해서 법무사에게 전달했다. 그는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될 거라고 나에게 미리 귀띔했다. 계약 명의자였던 아내는 때가 되면 법원에 출석해 변론해야 하는 귀찮은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소송을 진행하며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집주인이 몇 채의 빌라를 가지고 자신의 사채를 ‘돌려막기’하고 있던 것이다. 우리와 비슷한 피해를 본 사람이 또 있었다. 기가 막혔다.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 같다. 나는 가르쳐줘도 하지 못할 이런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참 많다. 서울에선 눈을 감으면 안 된다. 코를 베어 간다.


  전세보증금 반환소송에서 승소하고 판결 확정문을 받기까지 2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정말 긴 시간이었다. 피고가 단 한 번도 출석하지 않은 데다 주소불명이라 그에 따른 절차를 밟아야 해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정작 집주인과 연락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돌려받을지 몰랐다. 법무사는 집을 강제처분 하는 방법을 알려줬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집엔 우리도 몰랐던 근저당마저 설정되어 있었다.


  첩첩산중. 갈수록 태산. 이겨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이 안되어 보였는지 법무사의 도움으로 집주인의 아들과 연락이 닿았다. 그는 전세보증금으로 그 집을 사라고 말했다. 지금 돌려줄 돈이 없다는 것이다. 기가 찼다. 이미 정이 떨어진 이 집에 살고 싶지 않았다. 결국 우리가 직접 나서 이 집을 부동산마다 매물로 내놓았다. 다행히 넓고 싼(?) 이유로 얼마 지나지 않아 매매가 성사됐다. 6년 가까운 시간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모전자전. 그 엄마에 그 아들이었다. 전세보증금은 매매대금으로 대신 받았지만, 소송비용은 지금까지 주지 않고 있다. 그냥 그런 인간들이다. 그뿐이다. 고생스러웠던 전세살이를 마치고 절대 전세는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요즘 전세 사기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빨리 해결되면 좋겠다. 피해자들이 얼마나 힘들지 알 듯하다. 돈으로 행복을 사지는 못하지만, 사기로 인해 내 돈이 없어진다면 불행해질 것이다. 나는 돈을 돌려받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다고 했는데 맞는 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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