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낯선 지구 여행자입니다만 ep10
“캠핑 갈래?”
친구 ‘농장’이 물었다.
“좋지! 난 찬성”
“나도 좋아”
‘나’와 ‘박사’는 흔쾌히 대답했다.
“어디로? 또 일영?”
‘감독’은 못마땅 하다는 듯 따져 묻는다.
“양평 어때? 한 번도 안 가봤잖아.”
‘농장’의 말에 모두 그러자 했다.
스무 살의 어느 가을밤 나, 농장, 박사, 감독은 양평 가는 기차에 올랐다. 청량리역은 기차를 타기 위한 사람들로 붐볐다. 우린 오늘을 기념하기 위해 역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야간열차는 소문대로 시끌벅적했다. 통기타를 치며 함께 노래 부르는 대학생들. 이미 술에 취해 벌건 얼굴로 코를 골며 자는 아저씨. 어떤 사람은 창문을 열어둔 채 고개를 반쯤 밖으로 내놓고 입을 벌려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다. 짐칸엔 경동시장에서 산 듯한 각종 약재가 잔뜩 올려져 있다. 어디선가 한약방 냄새가 난다.
덜커덩거리는 기차 소리가 듣기 좋았다. 난 열차 사이 계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입에 물고 담뱃불을 붙여 보지만 바람 때문에 쉽지 않았다. 두 손을 모아 겨우겨우 불을 붙인 담배를 길게 한 모금 들이마셨다. 잠시 후 나의 온기가 스며든 담배 연기가 시원한 바람에 실려 밤하늘로 뿌려졌다. 불빛 하나 없는 터널을 지날 때면 철로에 긁히는 바퀴 소리가 더 요란하게 들렸다. 잠깐이었지만 몸에선 담배 향과 쇳내가 섞여 비릿하고 역겨운 냄새가 났다.
양평역 앞에서 무작정 택시를 탔다.
“어디로 가세요?”
택시 기사는 운전석 옆의 작은 거울로 우리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캠핑하기 좋은 곳 아시면 어디든 좋으니 그리로 가 주세요.”
이 여행을 주도한 농장이 말했다.
“캠핑요? 지금? 추울텐데...”
택시 기사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어디로 갈지 생각하는 듯했다. 양평역에서 출발한 택시는 십여 분쯤 달려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우리를 내려줬다.
“이 길을 따라 밑으로 내려가면 됩니다. 여름엔 여기서 많이 놀아요.”
택시 기사는 우리에게 내려가는 길의 위치를 알려주고 떠났다. 우리는 각자 짐을 챙겨 어두워 보이지도 않는 길을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불빛도 없고 아무도 없던 그곳이 어딘지 지금도 모른다.
여름이 지나 수량이 줄어든 탓인지 흐르는 물은 거의 없었다. 배가 고팠던 우리는 농장의 주도하에 준비한 삼겹살을 먹기 위한 틀을 만들었다. 돌을 쌓고 철망을 올려놓으니 그럴듯한 고깃집이 되었다. 농장은 자기가 준비한 철망을 올려 달구기 시작했다. 그런데 모양이 조금 이상했다. 자세히 보니 겉에 하얀색 코팅이 되어 있었다. 농장은 불에 달구어 코팅된 부분을 녹이면 안쪽에 깨끗한 부분이 나타날 거라 말하며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다 녹은 거 같은데? 고기 몇 점 올려보자”
농장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야 혹시 모르니까 조금만 올려”
아무래도 미심쩍은 박사는 옆에서 지켜보다 한마디 했다. 감독은 뭐가 어찌 됐든 빨리 고기나 먹자는 표정이다. 그렇게 문제의 철망에 고기는 올려졌다. 삼겹살 익는 냄새가 났다. 그런데 다른 냄새도 났다. 플라스틱 타는 냄새였다.
“고기 뒤집어 봐!”
박사는 다급히 소리쳤다. 농장은 올려놓은 삼겹살을 뒤집었다. 하얀 코팅이 녹아 고기에 진득하게 묻어 올라왔다. 망했다. 올려졌던 고기는 버리고 철망을 더 달궈보기로 했다. 소용없었다.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아. 어쩌지?”
농장은 머쓱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근처에 가게라도 있어야 어떻게라도 해볼 텐데. 배가 너무 고팠다.
“저 멀리 불빛이 보이는 데 가보자”
난 감독에게 말했다. 나와 감독은 도로에 올라와 무작정 불빛을 향해 걸었다. 간혹가다 빠르게 지나가는 차가 우리를 못 볼까 봐 손전등을 흔들며 걸어갔다. 십여 분을 걸어 도착한 곳은 국도변의 간이 휴게소였다. 다행히 라면을 살 수 있었다. 딱히 다른 것은 살만한 게 없었다.
“라면 사 왔어. 냄비에 물 끓이자.”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감독은 상당히 긍정적인 성격이다. 분노 버튼이 없는 듯 보인다. 나에게 있던 코펠엔 그리 큰 냄비가 없었다. 그중 가장 큰 거로 라면을 끓였다.
밤이 되니 제법 쌀쌀했다. 대충 라면 몇 개로 해결한 저녁은 스무 살 청년의 허기를 채워주진 못했다. 춥고 배고팠다. 보이는 게 없어서 할 일도 없었다. 라면 먹으려고 이렇게 멀리 왔다니. 웃음만 났다.
“추운데 텐트에 들어가자”
농장은 마른 체형이라 그런지 추위를 더 잘 느낀다. 네 명이 텐트에 들어가 누워보니 너무 비좁았다. 모두 오른쪽으로 돌아누워 서로의 등에 밀착해야 했다. 여기 대체 왜 온 거냐며 다들 농장에게 투덜거렸다. 이런 게 재미라며 능청 떠는 농장을 향해 박사가 방귀를 선물했다.
“야! 이 미친 XX”
박사는 해맑은 감독도 화를 내게 했다. 능력자다.
추워서 깼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가장 먼저 일어난 나는 텐트 밖으로 나왔다. 개울쯤 되는 물줄기가 보이고 그 너머 얕은 언덕 위엔 반짝이는 은색 캠핑트레일러가 보였다. 멋있어 보였다. 뒤에 있는 나의 텐트와 대조적이었다. 하나둘 일어나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텐트 밖으로 나왔다. 너무 추워서 덜덜 떨며 잤더니 온몸이 맞은 듯 아팠다.
짐을 챙겨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우린 이유 없이 즐거웠다. 이상한 철판 때문에 삼겹살도 먹지 못하고 라면마저도 양껏 먹지 못했다. 밤새 추위로 인해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박사의 잦은방귀로 공기마저 탁했다. 그런데 우린 어젯밤이 재미있었다며 이야기하고 있다. 뭐가 재미있었을까? 다시 생각해 봐도 어처구니없는 캠핑이었는데 말이다.
현재 화훼농장을 운영하는 ‘농장’과 공학박사인 ‘박사’, 영화감독인 ‘감독’, 그리고 ‘나’는 얼마 전 스무 살의 그때를 추억했다. 마치 스무 살로 돌아간 듯 재미있었다. 순수하고 맑았던 그 시절 우리의 시간은 다시 오지 않지만, 가슴 깊은 곳에 행복한 장면으로 남았다. 나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좋은 추억이 되어준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해본다.
다시 한번 스무 살의 우리를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