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엄마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 용화보살이 종이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엄마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지금 몸도 여기저기 다 아프네... 그게 다 스트레스야. 알아? 엄마의 입에서는 한 숨이 크게 새어나왔다. 용화보살의 손에는 검정색 사인펜이 들려져 있었고, 작은 앉은뱅이 책상위에는 흰 종이가 한 장 놓여 있었다. 19**월 **월 **일. 하얀 종이위에 휘갈기듯 쓰여 있는 날짜는 아버지의 생년월일 이었다. 죽.어.야. 끝난다... 엄마, 알겠어요? 그렇게 타고난 사람이야. 팔자가 그래. 원래 한 여자가 진득하게 붙어있는 사주가 아닌데, 엄마가 끈질기게 버티고 있으니깐 믿고 더 그러는 거야. 엄마가 가정을 지켜주니까... 알아 들어요? 원래 이런 사주가 몸이 약하고 명이 짧아. 그래서 끝임 없이 여자를 만나면서 그 명을 이어가는 거야. 아휴 보살님, 애들 아버지 언제쯤 정신 차릴까요? 아이고, 여자가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네. 음... 늙고 기력이 떨어져야 조금 덜할 텐데... 아직 팔팔하다. 아직 팔팔해. 그래도 한 이년정도 있으면 아퍼. 몸이 늙어 가는데 어쩔 거야? 어머나, 그래요? 쌍꺼풀 짙은 눈이 둥그렇게 커지자 엄마의 얼굴은 더욱 순박해 보였다. 나 참... 지금 남편 걱정하는 거야? 그래도 걱정이 된단 말이야? 아이고, 아저씨가 집에는 들어와요? 예, 집에는 오지요. 고개를 숙이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엄마가 대답했다. 그럼 놔둬. 팔자가 그래서 평생 밖으로 떠도는 거지. 불쌍해. 불쌍하잖아. 집에서나 패악부리고 그러지 나가면 이 아저씨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안 그래? 마음이 못됐거나 모진 사람이 아니거든. 마음은 아주 여리고 부드러워. 식구들한테 그러는 거... 다 타고난 성질이 그래서 그렇지. 엄마가 맛있는 거나 해주고 그래.
용화보살은 아버지의 생년월일 아래에 엄마의 생년월일을 휘갈겨 적었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몸을 부르르 몇 번 떨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소름이 돋아 용화보살에게서 눈을 떼고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령님을 모신 제단에는 사탕봉지와 음료수 상자가 쌓여있었고, 연꽃을 흉내 낸 조악한 가짜 꽃에는 먼지가 소복이 쌓여있었다. 아이고, 엄마... 용화보살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이 날에 태어난 사람은 원래 애환이 많습니다. 네?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고요. 평생 마음 졸이고 살아야해. 어쩔 수 없어요. 타고난 팔자가 그래. 안 그래도 어디서 누가 그런 말을 하기에 지난해부터 양력생일을 챙기고 있어요. 엄마는 쑥스러운 듯 여자를 보며 웃었다. 그러자 용화보살은 다시 얼굴을 들고 엄마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 거 다 소용없어. 하이고, 날짜 안 좋다고 양력생일 챙겨본 들 정해진 운명을 피할 수 있나. 엄마, 나 같은 사람도 태어난 날짜가 지랄 같아서 아예 생일도 안 챙겨먹고 이제껏 살았단 말이야. 그래도 똑같습디다. 그냥 아저씨가 집에도 들어오고 한 푼 이라도 생활비 보태라고 주면 가만히 놔둬요. 엄마랑 인연이 그래. 속 끓여도 안 바뀐다니깐...
그때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저희 엄마 이혼수는 없어요? 제가 옛날부터 그냥 이혼하시라고 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안 되나요? 여자의 말에 용화보살은 들고 있던 종이를 집어 던지듯이 놓으며 앉은뱅이 상을 ‘탁’소리 나게 내리 쳤다. 용화보살은 마치 연기를 하듯 내내 말의 강약을 조절해가며 엄마와 여자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지없이 또 여자를 노려 보았다. 이혼? 아이고 언니야, 지금 누가 누구를 붙들고 있는 줄 아나? 엄마가 붙들고 있는거야. 엄마가 이혼 안하는 거라고. 이혼은 안하고 아버지 붙들고 사람 한 번 바꿔보겠다고 평생을 저렇게 속이 썩어나고 있는 거야. 알겠어? 그래서 내가 그냥 잊어버리라는 거 아니야. 언니야, 엄마 팔자가 그런거야. 누구를 원망해?
이제 우리 큰 딸 한 번 봐줘요. 용화보살의 서슬에 엄마는 무안했는지 말을 끊고 언니의 생년월일을 꺼내 들었다. 까만 사인펜으로 큼직하게 생년월일을 받아 적으며 용화보살을 아이고, 아이고 애물단지 나오셨네... 애물단지... 이 애물단지를 어쩐다...하고 중얼거렸다. 아버지 하고 똑같아. 응? 내가 딸내미 흉내 한 번 내볼까? 밖에 나가면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단결이야. 엄마하고 동생한테나 그러지... 공손하게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흉내를 내는 용화보살의 모습에 여자는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엄마하고 동생한테는 어때? 내가 어디 또 한 번 해볼까? 점집에 오는 내내 언니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던 여자에게 엄마는 가족이니까 이해하라고, 언니가 불쌍하지 않느냐고 예의 그 말의 또 했었다. 덕분에 여자는 용화보살의 코미디 연극 같은 모습을 보자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그 연극 안에는 밖에서는 비단결 같다가 가족에게는 거친 삼베 보다 더 억세게 돌변하는 언니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버지하고 똑같아. 본성이 못되고 독한 사람은 아니야. 타고난 성질이 그래서 그렇지. 독불장군처럼 독단적이고, 엄마고 동생이고 함부로 대하니깐 우리 언니야가 상처 받지 뭐. 둘째 딸은 또 예민하잖아. 그렇지? 용화보살이 여자를 보며 고개를 까딱이자 여자는 갑자기 목이 메이는 것 같았다. 고생이 많았네... 엄마가 딸이라도 좀 모른 척 하고 혼자 씩씩하게 살도록 독립심을 키워줘야지. 언니 불쌍하다고 동생한테 맨날 도와주라고 하고, 엄마도 딸이라고 덮어놓고 감싸고돌면 안 된단 말이야. 자꾸 그러면 큰 딸이 의존심이 강해서 엄마죽고 나면 혼자 제대로 못살아. 안타까워도 딸을 위해서 내가 독하게 모른 척 하겠다고 결심을 해야 된단 말이지.
이제 우리 둘 째 딸네 한 번 보자. 저는... 아니 아니... 남편부터. 남편부터 보는 거야. 여자는 용화보살의 타박에 기가 죽어 얼른 남편의 사주를 불러 주었다. 좋다. 좋아. 우리 엄마 사위 잘 봤네. 그제야 엄마의 얼굴이 좀 펴지기 시작했다. 용화 보살은 지금까지 와 다르게 엄마를 보면서 빙긋 웃어 보였다. 자... 사람은 열이면 열 가지 복을 다 타고 난 사람은 없어요.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야. 우리 엄마 사위도 참 가정적이고 사람도 착하고 다 좋다. 그런데... 음.... 돈이 없네. 이건 능력이 없다거나 성실하지 않다는 말하고는 다른 거야. 언니야, 알겠지? 이런 남편 만나는 거 쉬운 거 아니야. 진짜. 그런데 남편이 아무 바탕이 없어. 아무것도 갖고 태어난 게 없다고. 그냥 평범한 사람이란 말이지. 주위에 둘러보면 특출난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한마디로 돈 벌 구실이 되는 게 아무것도 없네. 시집에서도 친정에서도 돈 한 푼 보태주는 사람이 없고, 공부를 월등히 잘 하거나 특별한 재주도 타고난 게 없어. 그런데 사람은 진짜 진국이야. 우리 언니야도 똑같다. 엄마, 이런 딸만 있으면 나도 우리 엄마가 진짜 부러울 정도라니까. 엄마한테 의지도 많이 되고, 엄마한테 잘 하잖아, 그렇지? 순하다 순해. 부부가 참 유순하단 말이야. 부부가 둘이 마음이 맞으니깐 밥은 안 굶어. 알았지? 그러니깐 둘이서 재미나게 살면 그걸로 끝이야. 가끔씩 맛있는 거나 사먹고 그렇게 살아. 언니 옆에는 절대로 가지마라. 애물단지 도와줘봐야 너한테 아무 보람도 없고 마음고생만 실컷 한다. 남편하고 우리가정 울타리만 튼튼하게 새우겠다 그렇게 생각 하란 말이야. 용화보살은 남편과 여자의 생년월일이 적혀 있는 종이에 선을 죽죽 그어 울타리를 만들고 있었다. 열심히 살아도 돈 벌 운은 없다는 말씀이세요? 아이고 언니야,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이야?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잖아. 몰라? 언니네는 씨앗이 없어. 밑바탕이 없단 말이야. 누구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깐 그냥 둘이서 힘 합쳐서 먹고 살아야해. 그런데 마음 맞는 사람하고 사는 것도 큰 복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돼. 용화보살이 여자에게 말하는 동안에도 종이위에 사인펜 울타리는 점점 더 진해지고 있었다.
내 참...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구만, 무슨 맛있는 거를 해주라고. 불쌍하기는 뭐가 불쌍해. 엄마는 점집을 나와 골목길을 걸으면서도 내내 생각에 빠져 있었다. 엄마, 아직도 생각하고 있어? 아직 팔팔 하다잖아. 아이고, 내가 죽기 전까지 너희 아버지 정신 차리는 모습은 못 보겠다싶어. 엄마는 진짜 아직도 포기가 안 되는구나...
여자가 기억하기에 용화보살의 말은 대부분 팔자가 그렇고, 타고난 성질이 그러니 그냥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엄마, 참 이상한 거 같아. 뭐가? 엄마가 잘하려고 했던 일들이 말이야. 가정을 지키고, 언니를 도와주려고 했던 일들이 사실은 모든 것들을 더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어. 아까 보살님이 그랬잖아. 아버지는 엄마 믿고 더 나가서 설치는 거라고... 언니도 엄마 믿고 더 철없고 못된 사람이 된 거라고. 엄마가 감싸면 감쌀수록 다들 점점 더 엄마한테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버린 것 같다고. 진짜 정해진 팔자는 벗어날 수 없는 걸까? 그나저나 저런데 첨 가봤는데 너무 무섭다. 보살님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할아버지가 그러시잖아!’ 하는데 소름이 쫙 끼치더라고. 우리 눈에 안 보이는 할아버지가 옆에 앉아 있었던 거야? 글쎄다... 엄마는 여자의 말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여전히 용화보살이 아버지에 대해 쏟아놓은 말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 근데 진짜 이상한 거 있어. 좋고 나쁘고 가 좀 반대 인 것 같지 않아? 평생 자기 승질대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산 아버지랑 언니는 불쌍하다고 하고, 나랑 *서방은 왜 좋다, 좋다 그러는 거야? 마음 약해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당하기만 하는 우리가 진짜 불쌍하지. 사실 아버지랑 언니만 행복하고 엄마랑 나는 화병나기 일보 직전 인데 말이야. 나도 이제 모두가 나를 피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어. 다른 사람한테만 좋은 사람이 될 필요 없잖아. 정작 나는... 어쨌든 보살님이 내 생년월일을 쓰면서 아이고, 이 애물단지 진짜 밉상이다., 밉상이네... 이런 말 하게 말이야. 히히. 아이고, 왜 그러냐. 나는 착하고 순한 우리 딸이 좋은데. 그러니까 엄마, 엄마는 맨날 나보고만 언니 이해해라, 언니 도와줘라 그러고 지원은 언니만 해줬잖아. 그게 다 내가 순해서 그런거잖아. 그렇다고 이제까지 언니가 동생이라고 나 생각해 준 적 있나, 엄마라고 잘하기를 하나... 결국 순한 성격의 결과는 ‘화병’뿐이야. 근데 뭐가 좋다고... 도대체 누구한테 좋다는 거야?
점집에서 왜 그렇게 성격 얘기만 했는줄 알겠다. 어디서 들으니깐 성격이 곧 팔자라는데, 그 말이 맞는 거 같아. 그런데 성격도 다 타고 나는 거면 진짜 내가 바꿀 수 있는 일이 없는 거야? 그동안 애쓰고 아등바등 하고 살았던 게 민망하다, 엄마. 너도 참... 그 말을 다 믿으면 안 돼. 참고만 하고 사는 거지. *서방 착하다잖아. 그런 건만 기억하면 되는 거야. 나한테 착하면 뭘 해. 나만 좋으면 뭐 하냐고? 정작 *서방 본인은 힘들 수도 있고, 화병 났을 수도 있잖아. 그냥 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살면 될 것같아. *서방 본인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누구한테 좋은 사람되려고 하지 말고...
엄마는 꽃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어? 아이고, 예쁘구나 그러지. 나는 봉우리를 봐도 벌써 시들어 떨어지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그래서그 예쁜 게 너무 안쓰럽고... 영원한 건 없는 것 같아서 서글픈 생각이 들거든. 그래서 세상 만사가 다 안쓰럽다고 할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쁜 그 순간만 보고 행복해 하겠지. 꺾어서 집에 갖다 놓고 보는 사람도 있을 테고... 꽃 하나를 봐도 저마다 생각이 다 다르잖아. 이게 팔자 같은 거 아닐까? 세상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내 인생이 결정되는 것 같아...
나는 돈을 바라지 않아. 그냥 내가 내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내 마음도 편하구나 하고 살고 싶어. 오늘 들은 얘기는 다 모르겠고, 나는 그냥 보살님이 언니 욕 실컷 해줘서 속이 다 시원하다. 진짜 할아버지가 옆에 있었나봐. 근데, 엄마, 이제 그런데 가지 말자. 타고난 건 안 바뀐다고 하잖아. 그냥 하도 답답해서 가봤지 뭐... 더 답답한 소리만 듣고 왔지만 말이야.
결국 여자 가족의 신년운세는 타고 난 것이 그러니 그냥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별할 것고 별다를 것도 없는 한 해가 될 거라고. 근심이 많은 날짜에 태어난 엄마는 스스로의 근심을 위해 아버지를 떠나지 않으면서 평생 한숨으로 살고 있었고, 명이 짧고 몸이 약한 운명을 타고난 아버지는 여자에 대한 욕망을 불쏘시개 삼아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를 닮아 의존심은 강하나 가까운 사람을 못살게 구는 언니는 엄마와 여자를 붙들고 집요하게 괴롭히고 있었고, 순하디 순하게 타고난 여자는 어벙벙한 천성으로 가족들에게 끊임없이 휘둘리며 모든 것이 제 몫인냥 끌어안고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네명의 조합을 여자는 조심스레 악연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엄마 우리 이제 그냥 각자 잘 살고, 서로 모르는 척 하는 건 어때? 너는... 아무리 그래도 부모는 부모 아니냐. 가족은 그러는 거 아니야. 서로 힘을 합쳐서 사는 게 가족이라고... 그리고 여자에게는 태산보다도 무거운 엄마라는 운명이 버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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