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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oha Feb 16. 2022

시어머니도 아프다


아니... 너는... 이게 뭐야... 요 비좁은 데다가 이렇게 쌓아놓으면 뭐가 뭔지 어떻게 알고 먹니? 종류별로 나누어 여자가 정성스럽게 쌓아올린 전을 큰 접시에 와락 부으며 시어머니가 소리쳤다. 아이고... 너도 참... 응? 엄마가 그 접시 준거잖아. 거기에 담으라고 그래놓고서는... 내내 부엌 주위를 떠나지 않던 남편은 시어머니의 언성이 높아지자마자 낼름 끼어들고 있었다. 여자는 그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얼른 소리 내어 웃었다. 그게 아니라...당신도 알잖아. 제가 이렇게 매사에 융통성이라고는 없어요. 집에서도 그래요, 어머니. 


아니... 그래도... 뭔가 더 말을 하려던 어머니는 또다시 호시탐탐 끼어들 때를 노리는 남편에게 눈길을 한 번 주고는 입을 닫아버렸다. 세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미묘했지만 여자는 이상하게도 시어머니의 호통이 아무렇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지금까지 시어머니는 여자의 일솜씨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국자를 낙아 채거나 그냥 놔두라는 말로 번번히 여자를 뒤로 물리곤 했었다. 그리고 시어머니가 눈에 띄게 입을 다무는 것으로 상황이 정리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순간 여자는 자신을 향한 시어머니의 태도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로 답답해서 호통을 친 건지, 아니면 이제 여자를 조금 편하게 받아드릴 수 있게 된건지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변화는 시어머니에게만 생긴 것이 아니었다. 여자는 제 스스로 시어머니를 직장 상사의 위치에 올려놓고 내내 긴장하며 잘 보이려고 애쓰던 자신도 조금 달라 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어머니의 변화가 어느쪽이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결혼 후 여자는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시부모님이라는 사실에 적잖게 당황 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것은 며느리 도리에 대한 강박과 시댁에서 환영받지 못했다는 열등의식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강해지는 억울함까지도 한데 뒤섞인 그 무엇이었다. 


하지만 이제 여자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가득 얽히고설킨 실 뭉치들을 꺼내 하나하나 풀어내고 난 이후의 변화였다. 자신이 왜 그렇게 겁을 먹고 있었는지,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 하는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한계에 섰을 때 그대로 낭떠러지로 고꾸라 지는 것이 아니라 뒤돌아서서 자신이 지나 온 시간을 돌아보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여자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시부모님을 몰아내고 거기에 자신의 삶을 채워 넣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두려움을 몰아내기 시작하자 조금씩 용기가 들어차는 것 같았다. 어차피 가족이 될 수 없다면, 사위처럼 손님이 되기로 하자. 알고보면 시부모님은 내 인생에 그렇게 막대한 영양을 끼치는 사람이 아닐 수 도 있어...  


여자는 시어머니가 주신 전을 썰어서 담으면서 접시가 조금 작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어머님이 주신 접시가 너무 작다는 말이 왠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보면 나쁘지 않은 것도 같았던 것이다. 여자에게 접시가 크거나 혹은 작거나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무슨 일에든 정답이란 것은 없으니깐. 여자의 생각에 서로 마음이 상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여자는 언제나 ‘마음’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여자는 조금이라도 시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말에 혹여나 시어머니가 무안해 하시는 건 아닐까. 그래서 여자가 말을 꺼냈을 때 시어머니가 '그 정도 크기면 충분하다' 고 말해 버리지는 않을까. 그것은 어쩌면 일상에서 만나는 익숙한 대화의 한 장면 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여자는 그냥 시어머니의 말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생각이 많은 여자의 성격을 잘 모르는 것이다. 며느리의 성격에 관심을 가지는 시부모님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그동안은 그저 시어머니의 눈에 들려고만 전전긍긍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여자는 자신을 그저 융통성 없는 답답한 며느리라고 생각한다 해도 억울하지 않았다.


여자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구나... 아들을 통해, 남편을 통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나 갑자기 가족이 되어버린 관계. 어느쪽이든 시어머니에게도 시간은 필요했을 것이다.



저번에 말씀하신 약은 잘 드시고 계세요? 아, 그거... 영 속이 부대껴서... 의사한테 얘기 했더니 너무 힘들면 먹지 말라더라. 허리는 좀 어떠세요? 아, 그거... 여자는 시어머니의 건강에 대해 물으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다리와 허리를 지나 두통에 관해 이야기 할 때쯤 이었다. 내가 작은 일이 있어도 잠을 잘 못자니깐... 원래 예민하잖아. 여자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여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남편을 보자 남편도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표정으로 눈만 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어머님, 요즘 무슨 걱정 있으세요? 아니... 아니 뭐, 내가 무슨 걱정이 있어? 자식들 걱정이지. 자식이 많으니까 그런가 걱정도 많지 뭐. 누나들도 다들 잘 사는데 무슨 걱정이야? 으이고, 이놈아 니 걱정한다. 시어머니의 기분은 아랑곳 하지 않고 남편은 그저 생각나는데로 한마디씩 툭툭 뱉어대는 통에 여자는 괜히 시어머니의 얼굴을 자꾸만 쳐다보게 되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오랜만에 옆에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반가운지 연신 웃고 있었고 대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여자는 그 모습을 보며 잠깐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깊은 밤 어두운 쇼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자신의 모습이. 시어머니도 여자처럼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많았던 걸까. 여자가 남편과 함께 힘을 합쳐 살겠다고 결심하고 시부모님을 뵈었을 때 여자는 사실 칭찬 받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자신의 부모에게서 받지 못했던 사랑과 인정을 남편의 가족에게 바랬던 걸까. 남편은 한없이 따뜻한 사람이었으니깐. 남편의 가족들도 어쩌면... 하지만 예민한 시어머니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당신이 당연하게 살아왔던 세상을 당연하게 부정해버리는 며느리를 보면서 말이다. 여자가 다른 사람 손가락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고 있을 때 시어머니도 다른 사람들의 손에 들린 예단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왜 며느리도 자식처럼 감싸주지 않으시냐고 했을 때, 왜 당신은 아들 키운 보람도 없느냐고 하소연 했는지도 모른다. 여자의 바람 역시 시부모님 못지않게 관습에 얽매인 억지였던 건 아닐까. 


여자는 시어머니의 아프다는 부위가 끝없이 이어져도 예전처럼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저 갈수록 쇠약해지는 부모님이 걱정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 뿐이었다. 식사랑 약 잘 챙겨 드시고,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여자의 말은 진심이었다. 한 걸음 물러선 입장이 되었을 때, 여자는 비로소 진심일 수 있었던 것이다.

식탁에서는 두런두런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고,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스며든 쇼파에서 시아버지는 깜빡 잠이드신 모양이었다. 저녁 할 때 다 안 됐니? 거실 한구석, 그늘이 깊어지자 시어머니는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셨다. 엄마, 이제 우리는 일어 날거야. 신경 쓰지 마. 저녁도 안 먹고 간다고? 그 때 시아버지가 눈을 번쩍 뜨며 일어나 앉으셨다. 벌써 간다고? 저녁에 나가봐야 돼요. 약속이 있어서... 마침 남편을 따라서 일어나던 여자에게 시아버지는 못내 아쉬운 듯 말을 이었다. 아야, 너는 저녁 해야지. 너는 더 있다가 저녁 해서 먹고 가거라. 예? 아, 저는... 여자는 뭐라고 해야 할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놔둬요... 가겠다고 하는데. 차려주는 밥도 안 먹고 가겠다는데... 시어머니의 냉냉한 말투에 늦은 오후 햇살이 거실 깊숙이 들어 따뜻한 서향의 집은 그 순간 차갑게 얼어 붓고 있었다. 미처 햇살이 닿지 못한 곳은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시부모님의 얼굴도 점점 깊은 그림자사이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자는 예전처럼 어찌할 바를 몰라 동동 거리지 않았다.


부모님 댁에 가면 당신은 왜 맨날 빨리 집에 오려고만 하는 거야? 아버님, 어머님 얼굴에 서운한 티가 역력하신데... 아들이 뭐 그래? 내가 다 민망하네. 언젠가 여자는 부모님 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여자가 가까운데 나들이라도 가자거나, 동네 산책이라도 가시자며 권해 봐도 부모님은 매번 싫다고 하셔서 남편에게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나 원래 집에 가면 방에서 자거나, TV 보는 게 다란 말이야. 부모님하고 얘기하거나 그런 건 안 해? 뭐 할 이야기가 있어야지. 핸드폰 좀 봐달라고 하시면 뭐 그런 얘기 정도? 그러니까 그냥 빨리 '우리 집'에 가서 자거나 TV보는 게 더 편해.    

 

아들이 그렇다는 데... 며느리가 굳이 나서서 무엇을 하겠는가. 여자는 얼른 가방을 들었다. 그럼, 쉬세요.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돌아서는 발걸음에 언뜻 보게 된, 섭섭해 하시는 부모님의 얼굴에도 여자는 더 이상 예전처럼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더 이상 여자의 책임이 아니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씌워놓은... 아니 그것은 어쩌면 스스로 씌웠는지도 몰랐다,  '며느리 도리'라는 굴레를 벗고, 여자는 조금씩 자신의 인생에 다가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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