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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빨강 Oct 30. 2022

# 이래서 미니멀 미니멀 하는구나

비워야 채울 수 있는 아이러니

  방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죄다 꺼내 종류별로 모아서 쌓았다. 옷은 옷끼리, 가방은 가방끼리. 화장품은 화장품대로, 책은 책대로. 당장 엄두가 안났지만 물건을 모두 꺼내서 한곳에 모아두고 하나하나 직접 만져보는게 곤도마리에의 물건 버리기 핵심인 듯 했다. 그래 한번 할거면 제대로 해보자. 한 곳에 다 쏟아붓기 시작했다. 끝이 날 만한데 부어도 부어도 끝이 없네. 아니, 이 정도로 물건이 많았다고? 이만큼이나 이고지고 살았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잔뜩 쏟아놓은 물건의 산들을 멍하니 지쳐서 바라보고 있었는데, 보는 것만으로 좀 질려버린 느낌이 들었다. 다 버려버리고 싶었다. 이래서 싹 다 모아보라고 한 것일까?


  우선, 숙제는 다 버렸다. 진심으로 내가 사고 싶었던 것, 갖고 싶은 것들은 남겼다. 


  오히려 돈 주고 사모았던 것들은 처분하기 쉬웠다. 버리거나 남을 주거나, 소모성 제품은 빨리 쓰고 해치워버리는 식으로 하면 됐었다. 의외의 복병은 기억과 추억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한 땐 베프였지만 이미 절교한 친구와 주고받았던 편지와 일기장, 탈퇴한 동아리에서 썼었던 이벤트 용품들, 스티커 사진, 편지, 예전 회사 것들... 나름의 애도 기간을 거친 후, 웬만한 것은 다 버렸다. 

      

  버리고 나니, 내가 가진 것들의 총량이 보였다. 물건도, 마음도 어쩔 수 없이 내가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의 한도가 있었다. 그 이상을 이고지고 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정확한 한도도 모르고 무작정 담고 담고, 넘치면 다시 우겨넣고. 그래서 그렇게 사도사도 답답하고 모자라고 갈증이 나고 그랬던 걸까.      

  싹 다 버리고 나니 남은 것들이 보이고, 그 총량이 잘 보이니까 내가 가진 마음의 그릇과 공간의 그릇 안에 잘 정리해서 담을 수 있었다. 그릇에 여유롭게 담기니 꺼내 쓰기도 좋았다. 다시 정리하기도 좋았다. 보기도 좋았다. 숨통이 트였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제서야 알았다.               

  사실 버리면서도 아까운 것들이 있었다. 와 이거 새 건데, 이거 진짜 비싸게 주고 산 건데 등등의 돈 아까운 것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래도 쓰지 않고 있던 것, 남 주기에도 애매한 것, 내가 설레지도 않는 것은 눈 딱 감고 다 버렸다. 오히려 아까워 미치겠다 으으-하면서 발동동 거렸던 그때의 경험들이 깊게 각인되어, 나중에 새로운 뽐뿌(?)로 무언가가 사고 싶어져 드릉드릉했던 수많은 충동들을 자제시켜줬다. 물건을 사면서도 비슷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더 신중하게 만들어주었다. 그 정도면 그 물건들도 나름의 비싼 값어치들은 해주고 간 것이라 생각한다.               

  정리하면서 되돌아보니, 흥청망청 돈을 써온 여러 해의 세월 속에서 나름의 내 행복을 지키려 애쓴 듯한 흔적이 보였다.     

  한 달에 이 정도는 쓰든 안 쓰든 화장품을 사야 행복하네, 죽었다 깨나도 코노 갈 얼마 정도의 돈은 꼭 현금으로 남겨놔야겠다, 아침 커피값 한잔을 아끼면 너무 불행해진다, 한 달에 두번 정도는 치킨을 시켜 먹어야 해 등등 나름의 소비패턴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 패턴을 어그러뜨리면서까지 숙제같은 쇼핑을 한 날엔 얼마나 괴로웠던지. 다음 달, 그리고 또 다음 달을 저당 잡힌 기분이 얼마나 갑갑했던지. 내 욕심이 과해 나를 지키지 못했던 많은 날들이 있었다.               

  물론, 사람은 바뀌지 않아서 여전히 나는 쇼핑을 좋아하고 물건들의 리뷰를 찾아보고 사서 직접 써보는 것들을 좋아한다. 오죽하면 이것저것 사온 것들을 보여주는 유튭 채널도 시작했겠나. (나 혼자 보긴 아까우니 누구라도 같이 봐)               

  하지만, 한번 내 손에 들어왔다고 그걸 모두 그대로 소유하고 있지는 않으려 한다.     

  비워야 다음엔 더 크게 많이 채울 수 있는 것을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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