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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령 Jun 09. 2024

살아있다는 말, 그래서 견딘다는 말

  당신이 죽고서 내가 산다면, 또는 내가 죽고서 당신이 살았다면* 온 생을 바쳐 견디고 싶은 하루가 나에게든 당신에게든 다시 와줄 것인가. 내가 죽고 당신이 살아온다. 우리는 같은 버스를 탄 적이 있다.      


  여태 안 내리고 있었던 거야? 

  내려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서 그랬어.     


  사실은 버스에서 내렸는데 아는 사람이 죽어 있을까봐 그랬다. 저기 등불 좀 봐, 저렇게 떠다니고 있을까봐 그랬다.      


  나는 죽고 당신이 살아서, 당신이 나 대신 벨을 눌러준다. 차창의 이름자를 지운다. 나는 그제서야 나의 이름을 기억한다. 나는 죽고 당신이 살아서 나는 내리고 당신이 손을 흔든다.      


  너무 많은 정류장을 지나쳤어. 나도, 당신도, 더 이상 아무것도 견디지 않아도 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종점처럼 당신이 침잠한다. 몸을 더듬으면 피와 살이 엉겨붙는다. 나는 아직 살아 있고 텅 빈 정류장에 서 있다. 비도 눈도 내리지 않았는데 낡은 벤치 끝에 물방울이 맺혀 있다. 아는 사람이 앞서 이곳에 내렸다고 믿는 것, 정류장의 노선표가 내가 알던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마는 것, 손잡이를 놓친 것처럼 몸이 덜컹거린다. 손잡이를 한 번 놓친 일로 평생을 더듬거린다. 당신은 이미 죽었고 나는 아직 살아서, 살아남아서 견디는 그 말들.


     

* 서정주, 「푸르른 날」의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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