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들의 워라밸
수년 전에, 내가 유학 나가기 직전에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유행했었다. 사실 책을 메모해 가면서 읽었는데도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미움을 받더라도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미움을 받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고 나는 그러한 용기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었다. 책을 읽었고 깨달음을 얻었지만, 미움받을 수 있는 용기가 쉽게 나지는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대학원을 다니면서 미국 생활을 하면서 용기가 필요한 또 하나의 행동을 찾았다.
쉬어가는 용기
나의 미국 대학원 생활이 점점 무르익어 갈 때 유행했던 삶의 키워드가 ’ 워라밸‘이었다. 그 뒤로 욜로, 파이어족, N잡 다른 삶의 태도들이 유행했고 현재도 진행 중이지만, 사람들이 그러한 말들을 설명할 때 ‘워라밸‘이라는 말은 여전히 종종 등장한다.
그렇다면 대학원생들의 워라밸은?
대학원생들의 워라밸이라.
어쩌면 정말 안 어울리는 단어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대학원 다닐 때 한국, 미국을 막론하고 친구들이 참 관심이 많았던 말이다. 대학원부터 시작해서 학계에 남은 많은 주변 분들의 공통적인 고민이기도하다. 학계에 남은 주변 분들은 ‘시간의 자유로움’을 가장 큰 장점이자 가장 큰 단점 중 하나로 꼽는다. “8시에 출근해서 5시까지 일 할 필요 없는 삶”은 정말 매력적으로 들리지만 동시에 출퇴근이 따로 없는 삶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아무때나 일해도 되지만, 그 말은 언제나 일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방학이 긴 것 같지만, 주변에서 본 교수님들은 학기 중에는 서비스 (행정일)과 학부생들 수업과 대학원생들 지도에 치여 방학 때나 본인의 연구를 하시곤 했다. 그래서 결국 방학 때도 온전한 쉼을 갖지 못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보면서 의도적으로 선을 긋지 않는다면 일과 삶이 경계가 없이 뒤섞이기가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들을 보면 그 분들의 삶은 곧 “일”이 아닌가 했다.
대학원 생활을 지내면서 나의 삶도 그렇게 경계가 없이 일 자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수학과에서는 풀지 못한 수학 문제가 머리 안에 떠돌아서 딱 스위치를 끄는 off가 없어서 괴로웠다면, 수학교육과는 읽어야 할 논문이 너-무 많았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내가 영어가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더욱 나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자정 전에 논문을 내려놓기가 어려웠고, 과제를 다 읽어야 할 때면 2-3시까지도 논문을 붙들고 있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내 삶이 없어지고 있었다. 적은 대학원생 월급으로 하루에 두 끼를 해서 먹고, 수업을 듣고, 수업을 하고, 수업들을 준비를 하고, 수업을 가르칠 준비를 하고. 가끔 밥 먹을 때 유튜브나 한국 방송을 보는 것 외에는 “쉬는 여유”를 부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를 너무 갉아먹게 되고, 스스로를 다그치게 되었다. 에너지를 충전시켜주지 않고 계속 쓰기만 하니 당연하게도 점점 힘이 들었다. 교수님이 ‘너를 위해 무언가를 해’라고 이야기해 줄 때가 이맘때였다. (2화 참고).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해주셨어도 나는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쩐 일로 잠깐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보았을 때, 주변의 친구들은 각자의 방법대로 자신의 삶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동기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중요해 수업에 논문을 읽지 않고 오기도 했다. 나보다 10살 정도 많은 나의 Academic Brother는 매해 와이프와 가을 자전거여행을 떠나기 위해 학기 중에 자체 방학을 가졌다. 그 외에도 여러 방법으로 워라밸을 찾는 모습을 봤다. (그중에서도 사회생활 경험이 있던 동료들이 더 그런 워라밸을 잘 맞추었던 걸 보면, 그 친구들은 이미 경험으로 그러한 교훈을 얻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떻게 워라밸을 지킬까?
아니, 그전에 어떤 워라밸을 원할까?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쉬어가고 삶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공’적인 것을 선택하고 ‘사’적인 것을 포기해야한다고 생각했었다. 공적인 것이 무조건 더 우선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교육받고 컸고, 거기에 더해진 내 성격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내니까 앞서 말한 것 처럼 대학원 생활에서 ‘나’를 챙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더 흐르고 일련의 일들로 (내가 어쩔 수 없었던 재해 같은 일들이었지만) 내가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포닥 자리를 휴직하고 비자도 포기하고 한국으로 들어와야 했을 때 교훈을 얻었다. 휴직을 결정하던 그때 나는 스스로가 거의 절벽의 가장자리에 있다고 느꼈다. 이대로 더 나를 밀어붙였다간 큰 일이 날 것 같아, 하던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친구들이 말해줬지만 이미 친구들은 통화를 하면서 내가 걱정스러운 상태라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나도 내가 안 괜찮다는 것을 깨닫고 내 커리어가 걱정이 돼 정말 많이 고민했지만 다 내려놓았다.
그 선택을 고맙게도 주변에서 응원을 해줬다. 지도교수님 부부는 내가 휴식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라 다행이라고 말해주셨고, 또 다른 교수도 쉽게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었을 텐데 내게 용기 있다고 해주었다. 용기는 무슨, 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답을 했다. 그럼에도 주변 사람들이 다행이라고, 용기 있다고, 자랑스럽다고 말해주는 것이 큰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이야기들을 곱씹으며 깨달았다.
대학원 생활 때 친구들이 쉬던 것도 그냥 된 게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용기 있는 행동이었을 수 있겠구나.
쉬는 것도 용기구나.
한국에 돌아와서 지내면서, 한국은 미국보다 더 여전히 끊임없이 달리기를 요구하는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쉬는 걸 스스로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면 휴식이라는 것을 갖기 쉽지 않은 사회같다. 비교와 경쟁을 할 사람들이 옆에 너무 가까이에 있어 내가 뒤쳐지는 느낌을 받기 쉽다. 주변 사람들이 끊임없이 달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중고등학교 때부터 성적을 상대평가로, 줄 세우기를 겪은 우리는 여전히 사회에 나와서고 줄을 세우고 서로를 비교한다. 미국에서 가끔 그러한 모습이 내 안에 내재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뼛속 깊이 자리잡은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쉬는 데 “용기”가 필요한 사회가 아닌가 싶다.
그런 환경이니 더더욱 나를 챙겨야 한다고 믿는다. 마라톤 보다 긴 길을 달려야 하는데, 지쳤을 때 힘들 때 중간중간 쉬어주지 않으면 결국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더 길게 쉬어야 할 수도, 멈춰야 할 수도 있다. 나는 스스로를 위해 그때그때 쉬어주고 챙겨주지 않은 대가를 결국 언젠가는 치르게 되어있다는 것을 이번에 느꼈다. 어쩌면 스스로를 미리 챙겼으면 했을 작은 포기와 양보 혹은 희생보다, 더 크고 중요한 순간에 하던 일을 어쩔 수 없이 내려놓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 앞으로 나는 중간중간 쉬어가는 용기가 필요할 때, 그 결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고 그렇게 나를 잘 지켜내면서 지내기위해 노력할거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사회도 점점 더 사람들이 쉬어가는 것을 이해해주는, 쉬어가는 데에 큰 용기가 필요하지 않은 그런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