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승진 누락을 주제로 글을 써보니
부캐의 열정
그 기대에 꼭 보답하겠다며 합격 메일을 알려온 휴대폰 화면에 대답을 했다.
회사에서 일을 게을리하고 월급을 받아가는 월급루팡이 되면 나를 승진에서 누락시킨 회사에 대한 큰 복수라고 생각했고 그러면 내 상실감이 채워질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월급루팡 삶을 자처한
지난 6개월여를 돌아보면 제대로 된 루팡 짓도 못하고 있거니와 내가 남을 속이고 또 나를 속이는 떳떳하지 못한 모습에서 짜릿한 복수의 통쾌함과 상실감을 채워주는 행복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갈피 잡지 못하는 일상에서 벗어날 생각에
주말마다 호캉스도 가고 명품 의류 과소비도 해봤지만 일박에 6만 원 하는 비즈니스호텔 호캉스와 한벌에 17만 원 하는 아르마니 익스체인지 봄점퍼와 같은 소박한 플렉스로는 달래지지 않았고 그마저도 늘어나는 카드값에 재미가 시들해졌다.
그러던 와중에 나의 마음 상처를 글로 옮겨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언젠가 들어봤던 브런치를 찾게 되었다.
브런치 앱을 깔고 보니 내 소개도 해야 하고 어떤 글을 쓸지 계획과 샘플 글감도 제출해야 한다길래 무료한 루팡의 삶에 대단한 미션이 주어진 것 같아 기뻤다.
자기소개는 '나 이런 사람이오'라는 글 안에 '그러니 알아봐 주시오'라는 뜻을 내포했고
잘난체하려고 백팔번뇌와 사춘기를 합성한 '백팔 춘기'라는 신조어 컨셉으로 글을 쓰겠다 하며
샘플 글감 역시 정반합(正反合)과 정반락(正反落)이라는 나만 이해하는 글을 제출했는데
이틀 만에 낙방 소식을 들었다.
상실감 극치인 내게 또 상실감을 안겨준 브런치에게 독이 올라 두 번째 준비에서는
브런치 재수생이라며 노골적으로 나를 드러내며
합격을 압박했고 상처 받고 낙담한 어른들을 위한 우화를 쓰겠다며 종이컵을 의인화한 샘플 글감을 제출하고 은근히 기대하던 나흘 만에 또 낙방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승진도 누락, 브런치도 누락 내 인생은 계속 누락인 것 같아 자존감 바닥을 확인하고 있을 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다른 작가분들의 합격후기와 비교해가며 문제점을 찾아보니
내 글은 진심이 없고 겉멋 번지르르한 말로 가득했었다.
진심이 아닌 글에는 어떤 울림도 없고 무엇보다 계속 써나갈 동력도 없으며 '나 이렇게 잘났소!' 하며 으시대는 글은 누구의 관심도 얻을 수 없었다.
진정 내가 아파하며 고민하고 있는 주제로 글을 써야만 진실된 글이 나온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 상처 입은 채 방치된 승진 누락 이야기와 소심한 복수인 월급루팡 삶을 써보자 하고 내 소개와 글의 목차 그리고 샘플 글감을 준비했다.
진정 아파하는 내용으로 목차를 준비해나가보니 전보다 훨씬 명료해졌고 샘플 글감도 내 일상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어 투박하지만 글로 풀어내기에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만 하루 만에 받아 든 합격 메일
주변 동료에게는 말할 수 없는 방백의 환희였고
세 번이나 누락된 승진보다 더 큰 기쁨이었다.
무엇보다 온갖 누락으로 위축된 삶에 자신감이라는 바람이 후욱하고 들어와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 허리도 곧게 펴지고 정면을 응시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원래의 나로 일깨워줬다.
이렇게 나를 알아봐 준 브런치에 정성 가득한 글로 보답 하겠다며 다짐을 하고 브런치 글감 업로드를 어떻게 할까 골똘히 생각하는 내 모습은
마치 출발선에서 굉음을 내며 뛰쳐나가려 하는 경주용 자동차와 같았다.
내 안의 또 다른 열정이 타오르고 있었다.
작가라는 부캐의 열정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