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은 눈이 참 헤펐다. 그렇게 밤마다 눈을 맞으며 퇴근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회사 업무강도와 월급 간 경중을 따져보고 가성비가 어떤지 하는 세속적인 셈법을 끊임없이 할테다.
나 역시 속세의 직장인이라 매번 가성비를 따져왔고 다행히 높은 가성비에 만족하고 있다.
가끔 속을 뒤집는 언사나 불합리한 지시에 ‘확 그냥 막 그냥’이라는 극단적인 상상을 하다가도
가성비를 생각하면 ‘그래 월급에 욕먹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참자’ 하고는 금세 수긍하곤 했다.
높은 가성비 회사생활에도 정기적으로 큰 진폭을 가진 업 앤 다운 위기가 찾아오는데 대표적인 게 업적평가와 승진이다.
업적평가 결과가 엉망이면 속도 쓰리고 평가를 한 상사 얼굴이 떠올라 분하다가도 나만 삭히면 지나갈 수 있는 일이지만
승진은 그 결과가 만천하에 공개되는 일이라 업적평가와는 결이 좀 다르다.
승진을 못하면 ‘난 괜찮아’ 하는 표정을 짓거나 아니면 ‘나 이렇게 화났소’ 하는 인상을
팍 쓰게 되는데 이 표정이나 저 표정이나 불편하긴 마찬가지라서 마음 무겁긴 똑같다.
그런 마음도 모르고 ‘이번에 잘 안됬다며? 다음에 잘 될 거야’ 하는 위로 멘트는 비수가 되어
가슴팍 한가운데 찍혀 피를 철철 흐르게 하는데 그 와중에 승진한 주변 동료를 마주쳐서 어쩔 수 없이 ‘정말 축하해’라는 멘트라도 하게 되면 철철 흐르는 피는 왈칵왈칵 펌프 물처럼 피를 내뿜기 시작한다.
내 경우에는 2019년부터 세 번의 승진기회가 있었는데 판판이 말아먹고 있다.
준비가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승진이라고 하는 게 업적평가 점수가 모여 승진점수가 되기
때문에 평가하는 상사 의지에 따라 좌우된다고 해도 무방하다.
올해가 세 번째 도전이라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었다.
늦게까지 남아 일하다가 밤부터 내리는 눈발에 갇혀 새벽 세시에 집에 들어가기도 하고
퇴근길에 받은 메일 답장 생각에 밤새 잠을 못이루다가 새벽 네시에 일어나 첫차 타고 출근하기도 하고
우연하게 발견한 암 종양 제거 수술 후 일주일 만에 출근하기도 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탈락이란 결과를 받아 들고 나니 몸 바쳐 일해봤자 뭐하나 하는 그런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승진 누락이면 하루 전에 임원이나 부서장이 불러서 ‘못 챙겨줘서 미안하다.’라는 멘트로 마음 준비라도 하게 하는데 그런 말도 없어서 ‘아예 관심도 없구나’ 하는 실망감과 더 나아가서는 그런 관심도 없는 하찮은 존재였구나 하는 자기 비하 정점을 찍게 된 게 올해 봄이었다.
이미 두 번의 탈락을 경험한 터라 이번에는 ‘괜찮습니다. 다음에 도전해보죠’ 하는 가식을 보이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속내를 다 표현하기 시작했다.
승진하지 못하는 파트장이니 자격 없는 파트장 완장을 내려놓겠다고 했지만 그 직책에 앉힐 사람이 없으니 일주일 정도 마음 추스르고 와서 다시 해줘야겠다는 상사의 답변에 동기부여 없이 책임만 강요하는 것 같아 정나미가 뚝 떨어지고 말았다.
애써도 안 되는 관심 없는 존재이니 조용히 하던 일이나 계속해줬으면 좋겠다는 인식을 확인하고
나니 여태껏 해온 가성비 셈법이 무슨 필요겠냐라는 생각이 들고 이 참에 루팡이 되자고 마음먹었다.
월급 루팡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