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기다리며
아내와 함께 다니던 산부인과 중 가장 오래 다닌 곳이 있습니다. 몇 년을 다녔습니다. 이곳 선생님은 예전에 다니던 병원의 선생님이 소개해주신 분입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솔직히 병원에 가면 좀 뚱했습니다. 난임이란 몇 년이 흘러도 남의 일 같고, 남의 일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달라졌습니다. 현실이 점점 닥쳐오기 시작한 것도 맞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내가 여기서 수술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전 선생님들은 뭔가를 해 준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여기선 하나뿐인 마누라 목숨을 쥔 것 같았습니다. 쫄보 성격 어디 가지 않아서, 그날 부로 선생님만 보면 껌뻑 죽었습니다. 나 같이 건방진 놈도 신을 믿게 되는구나, 사람이 신이 될 수도 있구나 하고 새삼스러웠습니다.
아내의 수술이 결정됨과 동시에 저의 신이 되신 선생님은, 동네 아저씨 같으면서도 똑똑한 티가 흐르는 분이었습니다. 저렇게 하루 종일 설명하려면 입이 아프겠다 싶었습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선생님 입을 멍하니 보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끄덕 하곤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다시 시술을 받으러 가서도 선생님은 열심히 설명하고, 저는 열심히 끄덕끄덕 했습니다. 선생님의 바쁜 입이 움직이기를 멈추면 ‘보호자분’은 나가서 기다려야 합니다. 시술을 받으러 들어가면서 아내는 매번, 저에게 나가서 맛있는 거 먹고 있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배신입니다. 끝나고 같이 미소 라멘, 돈코츠 라멘에 차슈 추가해서 먹으려면 다른 걸 많이 먹으면 안 됩니다. 알았다고 하고 항상 가는 카페로 갑니다.
병원 문을 나서면 갑자기 시간이 다르게 흐릅니다. 어느 계절이었는지도, 날짜도 시간도 잊어버립니다. 혹은 그냥 의미가 없어진 것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습니다. 언뜻 평온하고 여유로운 시간이지만 즐길 수 없는 평온함과 여유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표정이 빠짐없이 눈에 들어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대화가 빠짐없이 귀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분이나 대화의 의미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냥 수많은 정보가 나를 때리는 것 같습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또 자신 있는데, 이 시간만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걷다 보니 카페에 도착합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올리브가 들어 있는 빵을 주문하고, 2층 구석 자리로 갑니다.
평일 낮 시간이라 그런지 카페에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2층은 넓어 휑하다 보니 한 두 테이블 와도 티가 안 납니다. 그리고 왠지, 손님이 적을수록 사람들은 더 속삭이는 것 같습니다. 2층에서 혼자, 혹은 속삭이는 몇 명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나를 적당히 숨겨주는 것 같은 공간에서 조용히 올리브 빵을 먹습니다. 참 특이한 맛입니다. 누가 생각해냈는지 몰라도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맛을 즐기는 시간은 짧고 여운이 길지 않지만, 빵이 기분을 좀 다독여 준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멍 때리며 기다릴 준비가 된 느낌입니다. 핸드폰과 키보드를 꺼내 이런저런 글을 씁니다. 다행히 시간이 빨리 갑니다. 항상 씩씩한 아내의 문자가 띠링 울리면 주섬주섬 쟁반을 들고 일어섭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아내의 손을 잡고 라멘집으로 향합니다.
한 번이었다면, 두 번이었다면 추억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맛있는 올리브 빵은 본 적이 없으니, 혹시 아직 나오는지 찾아가 보기도 하고, 다른 곳에 비슷한 녀석이 있는지 찾아보기도 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 번도, 두 번도 아니어서 저 기억들은 추억이 되지 못했습니다. 올리브 빵은 매번 변함없이 맛있었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지겹게 맛있는 맛입니다. 어디서 또 올리브가 든 빵을 만나도 반갑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좀 더 흘러 멀리 이사를 하게 되면서, 신님도 올리브 빵도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신님은 괜히 나쁜 놈이 됐습니다. 고맙고 미안하면서도, 결국 얻은 것은 없고 탓할 사람도 없으니 괜히 그렇게 됐습니다. 새 병원 근처에서 발견한 카페에는 넓은 2층도, 올리브 빵도 없습니다. 아쉬울 줄 알았는데 잘 됐다는 생각만 듭니다. 과거가 추억이 되는 것은 현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으니 올리브 빵은 추억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냥 맛있었고 지겨웠다는 이상한 말로 기억에 남았습니다. 아니, 지겹고 맛있었습니다. 그게 그건지 다른지 잘 모르겠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