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도 아플 자격이 있나요?
아픔에 점수를 매기면 난임은 몇 점일까,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상대의 아픔을 아픔으로 인정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재판관님들입니다. 이 분들은 아픔 점수를 측정하고, 점수가 낮으면 너는 아프지 않다고 선고합니다. 상대가 순순히 인정하지 않으면 설득도 합니다. 점수가 살짝 낮으면 은근히, 많이 낮으면 대놓고 합니다. 위로처럼 들리는 건 설득을 은근히 해서 그렇습니다.
아픔 점수는 절대평가인가 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60점 미만이면 탈락’이 아니라 ‘ㅇㅇ보다 낮으면 탈락, ㅁㅁ보다 높으면 인정’ 이런 식입니다. 좀 이상합니다. 상대평가는 모든, 혹은 많은 아픔의 점수를 알고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점수의 범위가 어떻게 되는지, 아픔의 종류는 어떻게 나뉘는지 등등 어려운 것 투성이입니다. 저는 재판관 자격증이 없어서 그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평론가 신형철 님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정확히는 신형철 님의 다른 글을 이 책에서 재인용했습니다). 나는 가족의 장례식에 안 가도 그럴 만한 복잡한 이유가 있지만, 타인은 모르는 이의 졸업식에 안 가도 나쁜 놈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보면 ‘타인은 단순하게 안 아픈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아픈 사람’입니다. 재판관님들은 아이를 갖지 못한 것이 왜 고민인지 이해해 주기 싫은 것 같습니다. 나는 아이를 가졌지만 나름대로 다른 고민도 많고 힘든 사람이다. 내 아픔이 훨씬 크다. 난임이 무슨 대수라고. 그래서 너는 아파할 자격이 없다고 판결을 내립니다. 솔로몬의 재림입니다.
사실 아픔이 상대적인 것은 맞습니다. 보통은 내가 제일 아픕니다. 다들 그렇습니다. 그리고 나만 특별하고 싶다는 마음도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내 아픔에는 특별한 배경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픔을 비교합니다. 내 아픔은 키우고 남의 아픔은 줄입니다. 다만, 입 밖으로 내지 않습니다. 평가하지 않습니다. 선고하지 않습니다. 설득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만 비교합니다. 게다가 항상 남의 아픔을 줄이기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남의 아픔을 보고 나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별 것 아닌 일에 힘들어하는 이를 보고도 뭔가 사연이 있겠지, 하고 깊이 이해해주기도 합니다.
살면서 새로운 재판관님들을 계속 만나지만 어찌어찌 익숙해집니다. 오래 시달린 탓에 재판관이 아닌데도 재판관으로 보이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에, 적응은 필수입니다. 일상의 언어들이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상대의 악의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내 상처가 오래 묵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드러난 상처에 옷깃이 스쳐 아픈 것을 마냥 옷 탓만 하기는 어렵습니다.
난임 부부에게 상처를 스치는 옷깃은 '애는 없는 게 편한 거다', '아직 애 없을 때 많이 즐기면 되지' 같은 것들입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지만 용서할 수 있는 이유는 정말로 악의가 없을 가능성 때문입니다. 내가 언제 결혼을 했는지, 어떤 아픔을 겪고 있는지 자세히 모르면 그럴 수 있습니다. 정말 생각조차 못 했을 수도 있습니다. 모르는 것에 죄를 물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알고도 그러는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보통의 재판관들과 달리 처벌까지 집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일부러 다른 사람들 있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농담으로 감싼 녹슨 칼로 푸욱, 가슴을 깊이 찌릅니다. 여느 재판관들의 언어와 언뜻 보면 같지만 미묘하게, 하지만 분명히 다릅니다. 많이 아픕니다. 아프라고 찌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애써 웃음을 잃지 않습니다. 모두가 웃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눈치를 보는 사람도 보입니다. 그 눈빛에 잠시 따스함을 느끼지만 그뿐입니다. 마음은 이미 폭풍우 속입니다. 배려와 걱정도, 나의 평온함도 진작에 침몰했습니다. 싸구려 인형 같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멍하니 견디다, 혼자가 되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흐릅니다. 아내가 알면 안 되니까 빨리 뚝 그쳐야 합니다. 사내자식이 울면 안 됩니다. 다 큰 어른이 울면 안 됩니다.
평범한 사십대 아저씨는 평범하니까 특별한 힘이 없습니다. 살던 대로 삽니다. 최고의 복수는 내가 더 잘 되는 것임을 숱하게 듣고 느껴 왔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잘 되는 방법이 하나 뿐입니다. 일단 자식이 있어야 합니다. 잘 되려고 노력한 게 아니라 원해서 노력해왔는데 계속 실패했습니다. 나도 내 딸 얼굴 보고 싶었습니다. 나도 내 아들이랑 뛰어놀고 싶었습니다. 나도 좋은 아빠 되고 싶었습니다.
인생을 통째로 실패한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 그런데 몇 초 못 갑니다. 앞날마저 희망적이지 않다는 생각에 몸서리쳐집니다. 두렵습니다. 두려움은 자기 학대가 되고 분노가 됩니다. 칼에 베인 상처를 못 참아내고, 결국 큰 사람이 되는 것마저 실패하고 맙니다. 세상의 모든 악의를 용서하더라도 하나만은 용서하지 않기로 합니다. 언젠가 반드시 나도 너를 아프게 하겠다. 기회가 오면 절대 망설이거나 나약해지지 않겠다. 저 따위의 다짐을 하고, 작아진 자신을 측은하게 바라봅니다.
오랜 시간 나의 일부였던 나쁜 사람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모래처럼 발밑에 흩어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 마음이 보석처럼 결정을 이루었었음을, 좋은 사람 콤플렉스 같은 허상이 아니었음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늦었습니다.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았나봅니다. 흩날리는 마음의 가루를 바라보며 그저 착잡합니다.
아직 부서지지 않은 조각들이 그나마 모두 내 탓이라는 생각은 버리게 됐으니 좋게 생각해, 하고 속삭입니다. 나를 칼로 찌른 사람을, 그 사람 덕분에 내가 남 탓도 좀 하게 됐으니 봐주자고 합니다. 호구 금메달 감입니다. 하지만 망설이기도 전에 그건 아니야, 하는 비명 같은 외침이 귀를 찌릅니다. 전에 없던 그 외침의 크기와 반응 속도와 단호함이 얼음처럼 차갑게 살갗에 와 닿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음을 확실하게 인식합니다.
아픔이 아무리 더해져도 나는 나였는데, 나를 바꾸는 것은 무게가 아니라 칼자국이었습니다. 하긴, 순대는 볶아도 끓여도 순대지만 터지면 그냥 당면입니다.
부록입니다. 아픔의 순위라는 게 도대체 어떤 건지 알고 싶어서 아픔 점수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솔로몬님들의 지혜로 점수를 채워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인연이 만드는 아픔부터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제가 점수를 잘 알아야, 솔로몬님들이 낮은 점수로 쓸데없이 아파하실 때 놓치지 않고 아프신 게 아니라고 정정해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칼잡이님들께서는 항목별 공략법을 알려 주시면 제가 은혜를 갚기 수월할 것 같습니다. 아, 참고로 저는 1-2-1입니다. 저는 몇 등입니까?
1. 인연이 이어져 있지 않음
1-1. 인연이 끊어졌음
1-1-1. 죽음으로 끊어졌음
1-1-1-1. 노화로 인한 죽음으로 끊어졌음
1-1-1-2. 사고사로 인한 죽음으로 끊어졌음
1-1-1-2-1. 자식의 죽음
1-1-1-2-2. 배우자의 죽음
1-1-1-2-3. 이촌(형제자매) 이상의 죽음
1-1-1-2-4. 가족이 아닌 경우
1-1-1-2-4-1. 연인
1-1-1-2-4-1. 친구
1-1-1-2-4-1. 그 외
1-1-2. 죽음이 아닌 이유로 끊어졌음
1-1-2-1. 실종으로 끊어졌음
1-1-2-2. 실종이 아닌 이유로 끊어졌음
1-2. 인연이 이어지지 못했음
1-2-1. 자식
1-2-2. 연인
1-2-3. 배우자
1-2-4. 그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