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노는 삼촌

사실은 아빠 놀이

by 배유정

겸손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편입니다. 남들 보기에 잘난 것이 있어도 되도록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꼭 내 입으로 떠벌리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아이들과 꽤 잘 놀아 주는 것 같습니다.


물론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어머어머, 너 삼촌이랑은 엄청 잘 노네, 하는 소리 여러 번 들었습니다. 살면서 이보다 더 좋은 칭찬은 없었습니다.


장난감 없이도 잘 놉니다. 맨날 똑같은 장난감 어질러놓기만 하는 녀석과는 박스 뒤집어쓰고 두드리며 놀았습니다. 결혼식 억지로 따라와서 삐죽거리며 핸드폰으로 방탈출 게임만 하는 녀석한테 달라붙어 메모까지 해가며 같이 풀었더니, 어느새 폰 내려놓고 온갖 썰렁한 개그를 주고받았습니다(이 녀석은 집에 가는 길에 자기 통장잔고와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까지 술술 불었습니다). 우리 집에 놀러 온 꼬맹이 남매는 짐볼 위에 올려놓고 태앵태앵 몇 번 해줬더니 꺄르륵꺄르륵 아주 숨이 넘어갑니다.


고객 맞춤형 놀이도 합니다. 아들 둘 육아에 지친 엄빠를 위해 장난감 칼 들고 뺑뺑 돌게 합니다. 나는 최대한 편하고 애들은 최대한 힘들게 하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엄빠는 누워서 TV 보고 애들은 그날 꿀잠 잤습니다. 어른들 술자리에 삐쳐서 계속 엄빠 찾고 달라붙는 녀석은, 기찻길 깔아놓고 기차는 만지작거리기만 하길래 기차 뒤집어서 뱅뱅 돌렸더니 뭐가 우스운지 좋아 죽습니다. 엄빠는 맥주에 수다 시간 벌었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해 주면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습니다. 나도 좋은 아빠 된 것 같습니다. 내 입으로 아이들과 잘 논다고 말할 때, 그 단어들은 나도 아빠가 되리라는 주문처럼 묘한 힘을 갖고 동동 떠다닙니다. 그러다 어깨에 내려앉아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다 하고 토닥토닥 합니다.


남의 자식들과 실컷 놀고 이제 삼촌 가셔야지, 하면 아이들이 울고 떼쓰는 게 안쓰러우면서 또 뿌듯합니다. 다음을 기약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문득 깨닫습니다. 아이들과 잘 노는 게 아니라, 내가 아빠 놀이에 신난 거였습니다. 아이들은 실컷 놀고 푹 잘 텐데 나는 잠이 안 옵니다. 집에 와도 아빠 안 되는데 삼촌이나 좀 더 할 걸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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