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없나
지역 가족센터에서 주최하는 '아빠와 치킨 만들기'라는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엄마, 내가 오늘 아빠랑 맛있는 치킨 만들어 올게!"
아침에 등원하는 빛이의 모습이 평소의 게으른 발걸음과 달리 참 가볍다. 유치원을 일찍 마치고 치킨 만들러 갈 생각에 들뜬 모습이다. 저렇게나 좋을까.
'아빠와' '치킨' '만들기'
빛이가 '치킨'을 특별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기에, '아빠와' 함께 한다는 점에서 이만큼 기뻐하는 것이리라 추측해 보지만, 그보다 무언가 스스로 '만들기'를 한다는 사실에 더 신난 것 같다.
"아빠, 내가 치킨 요리하면 엄청 맛있겠지?"
"당연하지!"
평소 집에서 달걀 한 번만 저어도, 김 한 번만 잘라도, 자신이 한 요리라며 기쁘게 남김없이 밥을 먹는 아이다. 오늘 먹는 치킨 역시 그 어느 때보다 맛있을 예정이다.
우린 요리의 결과를 넘어 '뿌듯함'을 먹을 테니까.
유치원에서 나오는 빛이를 데리고 시내버스에 올랐다.
딸과의 데이트가 이런 맛인가. 버스에 나란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 좋다. 이래서 일상을 벗어난 이런 이벤트가 종종 필요한가 보다.
잠시 후 우린 최고 번화가에 위치한 유명 치킨집에 도착했다. 넓은 매장에 우리를 포함한 스무 팀 정도의 아빠와 아이가 테이블을 잡고 앉았다.
"아빠, 뒤에 좀 묶어 줘."
빛이는 벌써 앞에 놓인 앞치마를 목에 걸었다. 장갑을 끼고 두건까지 두르니, 빛이도 나도 제법 기분이 난다. 재료를 가져와 준비된 반죽을 버무리고 주방에서 튀기는 과정도 지켜봤다.
곧 커다란 보울에 막 튀긴 닭다리와 날개가 수북이 쌓여 나왔다. 빛이와 난 양손에 집게와 솔을 들고 한 조각씩 양념을 정성스레 발랐다.
"빛이야, 어때? 맛있어?"
"어, 완전!"
역시 뭐든 만들면서 먹는 게 제일 맛있다. 막 나온 뜨끈한 튀김에 아이들 입맛을 저격한 달콤한 소스가 내 입에도 딱이다. 매장에서 양을 넉넉히 준비해 주신 덕에 실컷 먹고도 한 상자 가득 담았다.
치킨 만들기가 끝나자 직원분들이 쇼핑백에 치킨무와 음료, 기념품까지 넣어 포장해 주셨다. 그럴듯한 모양새에 빛이의 기분도 날아간다.
"이거 가져가면 엄마가 엄청 좋아하겠지?"
이왕 나온 김에 근처 대형서점에 들렀다.
"이렇게 책이 많아? 여기도 다 책이야!"
눈이 휘둥그레진 빛이는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다. 잠시 후, 안 그래도 호기심 가득한 빛이의 눈동자가 더 커진다.
"우와. 아빠책이 여기도 있네?"
아빠가 쓴 책들을 서점에서 직접 마주하는 빛이의 얼굴이 세상 밝다. 죽어라 책 쓴 보람이 충만해지는 순간이다. 이렇게 딸과 서점을 거니는 건 훨씬 더 먼 미래의 일일 줄 알았는데, 오늘 작은 꿈이 이루어지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면 꿈을 이루는 건, 오늘의 작은 실천일지도 모르겠다.
"어? 치킨! 치킨 어디 갔지?"
빛이와 신나게 구경도 하고 맘에 드는 그림책도 읽으며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갑자기 빛이가 외쳤다. 순간 나도 적잖이 놀랐으나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아까 책 읽을 때 어디 잠깐 올려둔 것 같은데.. 찾으면 있을 거야."
없었다. 왔던 길을 되짚으며 한참을 헤맸는데 없다. 원래도 큰 서점이 더 크게 와닿는다. 땀이 삐질삐질 흐른다. 게다가 몇 바퀴를 돌았더니 이젠 지친다. 옆에서 따라다니는 6살 아이는 얼마나 더 힘들까.
"빛이야, 아빠가 잘 봤어야 하는데, 아빠 때문에 힘들지?"
미안한 마음에 빛이에게 물었는데 빛이의 대답이 내 마음을 더 후벼판다.
"아니. 지금 난 속상하거든?!"
맞다. 빛이 입장에서는 지금 힘들고 다리가 아픈 것보다, 치킨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더 아프다. 엄마에게 맛보이고 싶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치킨이다.
포기하고 돌아가는 길에 혹시나 해서 카운터에 물어봤다. 직원분이 "혹시 이건가요?" 하며 친절하게 쇼핑백을 건넨다. 빛이와 내가 책에 빠진 사이 누가 맡겨 둔 것이다. 진작 물어볼 걸. 다리가 풀린다.
다시 찾은 치킨. 그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날 밤, 난 눈물의 치킨을 먹었다.
* 늘 시작할 땐 멀게만 느껴지는데, 마칠 땐 '벌써 이렇게 왔나?' 하게 됩니다. 2편을 바로 시작할까 했으나, 현재 준비 중인 여행이야기를 먼저 다루고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유치원 큰언니, 얼집 작은언니'를 사랑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