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솟지 마라
아, 해가 자꾸 길어지고 있다.
해가 길어진다는 건 내 업무시간도 늘어난다는 뜻이다. 해가 퇴근을 안 하면 빛이와 하늘이도 놀이터에서 들어갈 생각을 안 한다. 여전히 찬바람은 쌩쌩 부는데 아이들은 추운 줄도, 배고픈 줄도 모르고 열심히 뛰논다.
나만 추운 줄도, 배고픈 줄도 안다. 그래서 해가 지지 않으면 내가 진다. 서부영화에서 카우보이가 밧줄로 악당을 잡듯, 할 수만 있다면 밧줄 올가미를 던져 해를 끌어내리고 싶은 심정이다.
"배곺파아아아!!!"
배고프니까 들어가자고 할 때는 "배 하나도 안 고픈데?" 하며 끝까지 버티더니. 집에 들어오는 동시에 밥 달라고 난리다.
"너네 아빠한테 밥 맡겨놨어? 빨리 화장실 가서 옷부터 벗고 손 씻고 와!"
우선 호통으로 맞받아치며 놀이터의 온갖 먼지를 다 쓸고 들어온 아이들을 화장실로 보낸다. 그 사이 잽싸게 물을 끓인다. 전자레인지와 에어프라이어도 바쁘게 돌아간다.
손을 씻고 나오는 아이들과 함께 전자레인지에서는 밥이 나온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밥 위에 치즈를 한 장씩 올리면 '치즈밥' 완성. 밥 위로 슬슬 녹는 치즈와 함께 내 피로도 그렇게 녹아내렸으면 좋겠다. 어쨌든 잠시 시간을 벌었다.
그 사이 끓어오른 물에 조심스레 달걀을 넣고, 방울토마토와 오이를 잘라 그릇에 담는다. 냉동 블루베리와 모짜렐라 치즈 몇 알을 추가로 넣고 약간의 소금과 올리브유를 뿌려 '샐러드' 완성. 또 시간을 벌었다.
기분상 샐러드가 먼저 나왔어야 할 것 같지만 배고픈 아이들은 그냥 주는 순서대로 먹는다. 샐러드를 먹는 사이 끓는 물에서는 삶은 달걀이 나오고, 에어프라이어에서는 치킨너겟이 나온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는 여기서도 치열하다.
정신없이 음식으로 아이들 입막음을 하고 나면 이제 씻을 준비 완료. 사실 마음은 준비 완료인데, 이때쯤이면 준비했던 오늘 하루의 체력은 이미 어디론가 다 증발하고 없다.
겨울엔 땀을 많이 안 흘려서 발만 씻기고 어떻게든 버텨왔으나, 정수리부터 올라오는 딸들의 진한 향기를 차마 견딜 수 없어 씻길 힘을 또 끌어모은다. 아이들 머리에 샴푸를 짜고 손끝으로 영혼 없이 벅벅 문지른다. 빛이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
"아빠는 쉬는 날이 좋아, 어른이 되는 게 좋아? 난 어른이 되는 게 더 좋아."
'쉬는 날이랑 어른이 되는 거랑 무슨 상관이지? 그리고 넌 아빠한테 물어봐 놓고 왜 니가 대답하는 건데?'라는 마음의 소리를 내뱉을 힘이 없어 그저 짧게 묻는다.
"왜?"
"어른이 되면 애기 낳아서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잖아."
"넌 어른도 안 되어 봤는데 그게 더 행복한지 어떻게 알아?"
"아빠가 행복하잖아."
"아빠가 행복한지 안 한지는 어떻게 아는데?"
"아빠 얼굴에 웃음꽃이 피잖아!"
스스로의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분명 지칠 대로 지친 상태의 무표정이었을 텐데. 아빠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는 말에 힘을 내어 활짝 웃어본다.
근데 왜 눈물이 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