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생맥주의 수도, 벵갈루루
내게는 인도 체류 중 찾아오는 고질병(?) 비스무리한 것이 있다. 증상은 체류 3주를 넘어갈 때쯤 시작된다. 더럽고 지저분한 환경, 마음대로 밖을 나가지 못해서 생기는 스트레스, 신선한 야채와 붉은 고기의 부재 등등 이유는 다양하다. 애써 흐린 눈을 하고 잘 지내는 듯하다가도 어느새 도끼눈을 뜨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저절로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진다.
당장 비행기표를 끊어 한국으로 날아가 잘 구워진 고기와 상추쌈을 한 입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가까운 맥주 펍을 찾아 시원한 맥주 한두 잔으로 속을 달래곤 한다. 그런데 인도에서 맥주를 마신다고? 인도는 술 안 먹는 나라 아닌가?
으레 인도 사람들, 특히 힌두교 하면 술을 즐기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뭐 사실은 사실이다. 엄격한 힌두교인들은 대개 술을 멀리한다. 그렇기에 인도에서도 생맥주의 수도(The capital of craft beer in India)라 불리는, 도시 전역에 자그마치 100여 개의 맥주 양조장이 있는 도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더욱 놀라울 것이다. 그 도시는 바로 벵갈루루이다.
독한 술을 잘 마시질 못하는 나에게 맥주는 언제나 좋은 선택지이다. 오늘 우리는 근처에서 가장 가깝고, 규모가 크고, 평점이 높은 한 맥주 펍으로 향했다. 이곳의 이름은 'URU Brewpark'. 들어서자마자 널찍한 개방감을 지닌 실내 인테리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펍 전체가 자연 속에 자리해 있는 콘셉트를 추구하는 듯하다.
언제 겪어도 참으로 황송한 벵갈루루의 접객 태도를 뒤로하고 긴 벤치 테이블에 앉았다. 메뉴 구성은 주로 서양식 요리, 그리고 절반은 인도 요리였다. 여기까지 와서 인도 브리야니를 먹고 싶지 않다며 남편은 파스타를 먹자고 했다. 그렇다면 나야 땡큐지. 우리는 호박 수프 두 개와 홈메이드 라비올리 파스타, 그리고 퀘사디아를 주문했다. 모든 음식에 No pepper를 부탁하는 말과 함께.
음식들은 굉장히 맛있었다. 특히 이곳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라비올리 파스타는 꽤나 먹을만했다. 고춧가루를 첨가하지 않은 호박 수프도 담백하니 괜찮았다. 아, 그런데 퀘사디아는 예외였다. 모름지기 퀘사디아의 매력은 심플함이 아닐까. 토르티야와 모차렐라 치즈, 간단한 속재료 한두 개 정도로. 그러나 참으로 고맙게도(?) 그들은 퀘사디아에도 다채로운 인도 향신료의 맛을 더하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음식들이 맛있었으니 이 정도면 합격점.
음식과 함께 곁들일 맥주 샘플러를 주문했다. 종류는 총 여섯 가지. URU의 시그니처 맥주 4가지와 계절 한정 맥주 2가지가 같이 나온다. 더운 날씨에, 그리고 인도 체류의 스트레스에 지쳐있던 나는 샘플러 중 한 잔을 바로 원샷했다. 남편에게 한 입 맛보라고 권하는 것도 깜박하고 말이다. 그는 나에게 살짝이 원망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벵갈루루는 젊은 도시이다. 그리고 이곳의 힙한 젊은이들은 맥주를 좋아한다.
벵갈루루의 청년들 사이에서는 일이 끝나고 가볍게 맥주 한 잔을 즐기며 수다를 떠는 것이 유행이다. 그렇게 맥주를 즐기는 그들의 말에 따르면 와인은 지나치게 격식을 따지는, 어찌 보면 고루한 문화이기도 하다. 나 역시 이런 벵갈루루의 트렌드에 편승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맥주 한 잔에 스트레스도, 한국에 대한 향수도 날려 보내고 싶었다.
맥주 샘플러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역시나 이곳의 시그니처 맥주, 그중에서도 Oktober Kolsch였다. 평소 필스너(Pilsner)와 같은 라거 맥주를 좋아하는 나의 취향에 딱이었다. 가볍고 청량하고, 부드러운 목 넘김이 좋았다.
다음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맥주는 바로 인도에서밖에 마실 수 없는, 이색적인 인도 맥주의 맛을 보여주는 Mango Ale. 일단 코끝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망고의 향이 압도적이었다. 지금 당장 한 입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런 향이랄까. 대부분의 에일 맥주가 조금은 강렬한 맛을 자랑하는 반면에 이 망고 에일은 적당히 달고 적당히 셌다.
또 한 가지 마음에 들었던 것은 바로 계절 한정 맥주. 코쿰(Kokum)과 타마린드(Tamarind)라는 두 가지 열대 과일을 사용한 맥주였다. 코쿰의 시큼한 맛과 타마린드의 달달한 맛이 어우러진 좋은 맥주였다. 원래 IPA도 추가로 주문하려고 했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이곳 URU Brewpark는 단순히 맥주, 그리고 안주 한두 가지뿐만을 파는 곳이 아니다. 손님 백여 명 정도는 거뜬히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규모를 자랑함과 동시에 애피타이저부터 시작해서 메인 요리, 디저트까지 판매한다. 심지어는 반려동물을 데리고 오는 손님들을 위한 펫 메뉴까지 판매한다.
이렇게 큰 규모의 주점들도 있지만 곳곳에는 소규모의 양조장, 즉 Microbrewery도 여럿 자리 잡고 있다. 벵갈루루 전역에 크고 작은 맥주 양조장 및 주점은 자그마치 백여 개에 달하는데, 그들이 이렇게까지 맥주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여기는 1850년대부터 맥주를 즐겨온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라는 것도 한몫할 것이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벵갈루루의 살인적인 교통체증 때문이다. 바쁜 하루를 마치고 일의 무게와 스트레스에 짓눌린 몸을 이끌고, 그 누가 한 시간씩 운전을 하며 복잡한 도로를 뚫고 맥주를 마시러 가고 싶겠는가. 이 분야에서 벵갈루루는 세계적인 명성 아닌 명성을 자랑하는데, 2024년 세계 최악의 교통체증을 자랑하는 도시 중 3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벵갈루루는 아직 지하철이 없다. 십 년 째 공사중이다.
인도의 도로에는 말 그대로 온갖 것들이 있다. 자동차, 툭툭, 오토바이, 트럭,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소를 비롯한 동물들. 하늘과 도로를 뒤덮은 흙먼지. 사방 천지에서 울려대는 클락션 소리. 대략 5초에 한 번 정도 차가 아래위로 덜컹거리는 최악의 도로포장 상태. 이렇게 시장통이 따로 없는, 아니 차라리 시장 한 바닥이 훨씬 나을 법한 인도의 도로를 달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정신이 아득해진다.
어쨌든, 이렇게 벵갈루루 전역에 경제활동의 중심이 되는 20대에서 40대의 인도 청년들이 모두 펍 문화를 즐기고, 위에서 묘사했듯 살벌한 교통 체증 속에 멀리 가고 싶지는 않으니 그들 나름의 해결책을 마련해 낸 것이다. 더 많은 곳에 사람들의 발길이 닿을 수 있게 소규모로 여러 곳에 점포를 내는 것. 벵갈루루의 교통체증이 주는 한 가지 장점이라면 장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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