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장된 행복, 일탈, 죄책감
라면은 참 요상한 음식이다.
그렇게 좋은 재료로 만들어지지도 않았는데도, 먹으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그 모든 것을 보상받는 느낌이랄까? 어렸을 때부터 몸에 안 좋은 음식이니 먹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도 들어서일까? 라면을 먹으면 내 안의 규칙이 하나 깨어지는 느낌도 들면서 일탈의 쾌감도 가끔은 느껴진다. 너무 열심히 일해서 밥 먹을 시간이 없어 급하게 먹는 것도 라면, 오늘 하루 고생했으니까 5분 안에 촤르르 맛있게 끓여서 먹는 것도 라면이다. 전자의 라면은 조금 서글프다면 후자의 라면은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을 것 같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라면은 가족들과 한밤중에 같이 끓여 먹은 라면이다. 나의 부모님께서는 야식에 엄청나게 엄격하셨다. 밤에 먹는 것을 거의 죄악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집은 저녁에 치킨도 안 시켜 먹었고, 8시 이후에는 잘 안 먹었다. '야식'이라는 것은 우리 집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 식사였다. (그래선지 다 커버린 나는 나가서 뭔가를 많이 먹고 온다...)
어느 날 TV에서 주말 명화로 <매트릭스>를 틀어줬다. 채널을 돌리던 우리 가족은 갑자기 그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빠져들었다. 매트릭스는 정말, 지금도 내가 본 영화 중에 가장 재밌는 영화다. 네오가 빨간 약과 파란 약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느부갓네살호를 타고 모피어스와의 여정을 시작하고 트리니티와 사랑에 빠지고... 매트릭스에서 쿵후를 배우고... 영화의 모든 것들이 재밌고 흥미롭다. 내가 앞으로 볼 영화들 중에서 이 영화를 뛰어넘을 것이 있을지 모르겠다. 넷이서 열심히 보다가 중반부쯤이었을까? 갑자기 영화가 끊기고 2부가 곧 시작된다는 표시가 떴다. 거의 밤 11시가 넘었을 시간이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강경 야식 반대파인 우리 아버지가 냄비를 꺼내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야식 반대에 라면 반대파인 아버지가 라면을. 그것도 직접 끓이신다고? 매트릭스가 불러일으킨 묘한 상황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2부가 시작되기 전에 후딱 끓여서 먹어야 됐었는지, 아버지는 주방에서 정신없이 라면을 끓여왔고, 어머니, 나, 동생은 그 라면을 빠르게 먹었다. 냉장고에 어찌 콩나물도 있었는지 콩나물까지 넣어서 끓여온 그 라면. 막간의 광고 시간에, 그것도 밤 11시에 먹는 라면은 꿀맛이었다.
매트릭스는 밤 12시가 넘을 때까지 계속됐다. 사실 처음에는 그 영화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야 인간들이 건전지로서의 역할만 하는 어떤 미래를 그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매트릭스>는 나의 첫 영화였기도 했고, 부모님과 문화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첫 영화이기도 했다. 그전까지는 부모님께서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화에 대해서 나에게 말해준 적도 없고, 무엇을 보고 듣고 자랐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영화를 같이 보고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렇게 처음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도 그들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라면은 나에게 보장된 행복이자, 약간의 일탈, 죄책감과 함께 오는 기쁨이다. 일어나자마자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친구들과 여행 가서는 둘째날 눈을 뜨면 그렇게 먹고 싶고, 밥 먹을 시간도 없는 날엔 왠지 라면을 먹으면 처량한 내 존재가 슬프기도 하면서 그 강렬한 맛에 잠깐 동안은 고생을 잊기도 한다. 아주 오래전에 먹었던 라면의 맛이 지금도 기억나는 것처럼 언젠가 또 라면을 먹으며 좋은 추억이 생기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