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음식이란?
다시 그 곳에 가도 좋을까?
그 때처럼?
응, 그 때처럼.
글쎄, 나는 너무 변해서 아쉽더라.
여유로운 연휴에 친구들과 먹는 점심은 꿀맛이다. 남들이 잘 모를 법한 식당에 쪼르르 앉아서 이것도 먹어보라고, 저것도 먹어보라고 서로 권하며, 떠들며, 세상을 씹으며, 농담을 주고받는다. 시킨 음식만큼이나 다양한 주제로 한참 이야기하던 우리는 한국이 아닌 곳에서 살아본 경험들을 나누고 있었다. 영국에서 딱 한 달 동안 살아본 나는 또 그 동네에 다시 가보고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풀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그 곳에 다시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어렸을 때 외국에서 살았었던 친구가 자신은 나중에 커서 그 동네를 다시 구경하러 간 것이 좀 후회된다고 했다. 옛 추억이 새록새록 나면서 즐겁기만 했을 것 같은데 그 친구는 오히려 새로운 기억이 너무나 좋았던 추억들을 ‘덮어쓰기’해서 예전의 것들이 희석되었다고, 그래서 아쉽다고 했다.
처음에는 이해가 잘 안 됐지만 이유를 듣고 보니 친구의 말에 공감이 갔다. 나에게도 그런 추억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당시에 행복했기 때문에 다른 기억들로 대체될까 봐 노심초사하며 조심스레 다루는 기억들 말이다. 그런 기억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이스크림이라는 것을 먹었던 날, 초등학생 때 가족들과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놀러 간 날, 어른이 되어 산촌으로 여행 가서 이곳저곳 누비다가 동동주를 한 잔 한 날 등 여러 가지 기억들이 있다. 소중한 기억들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자물쇠를 잠가 보관하고 싶은 기억은 바로 우리 할머니와의 기억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하셔서 나는 자주 할머니 집에 맡겨졌다. 할머니 집과 가까운 곳에 터를 잡은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우리 부모님의 전략일지도 모르겠다. 회사를 다녀보니 이제야 알겠지만, 애도 키우고 일도 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부모님께 우리 할머니께서는 아마 구세주 같았을 것이다. 나는 할머니 집과 우리 집 사이에 있는 유치원을 다녔는데,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것은 엄마였고, 집으로 데려오는 것은 할머니였다.
할머니께서는 꽤나 엄격하셔서 할머니와 다니려면 몇 가지 생활 규칙을 반드시 지켜야 했다. ‘길에서 걸어 다니면서 음식 먹지 말기,’ ‘밥 먹을 때는 TV를 끄기,’ ‘밥 먹기 전에 과자 먹지 말기’가 주요 세 가지 규칙이었다. 대부분 식생활과 관련되어 있는데, 우리 할머니께서는 여느 할머니가 그렇듯이 내가 먹는 것에 신경을 많이 쓰셨다.
할머니께서는 애매한 시간에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것도 차려주셨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음식이 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알감자 구이와 비슷하지만 먹는 방법은 전혀 다른 ‘감자 범벅’이다. 이름은 내가 방금 붙였다. 항상 할머니께는 ‘감자 그거 있잖아... 감자 구워서 설탕이랑...’ 이렇게 말씀드리며 해달라고 했기 때문에 그 당시에 그 음식을 부르는 명칭은 사실 없었다.
이 ‘감자 범벅’이라는 것은 조리법이 매우 간단하다. 기름을 두른 큰 프라이팬에 껍질을 벗긴 감자를 넣고 모든 면을 정성스레 구워주는 것이다. 감자는 4분의 1 크기 정도로 자르고, 모든 면이 노릇노릇 구워지면 뚜껑을 덮고 속까지 익혀준다. 사실 어렸을 때는 먹기만 해서 이제 와서 ‘이렇게 하셨겠지’라고 상상하며 적어보니 조금은 번거로운 조리법인 것 같다. 알겠지만 감자는 생각보다 잘 익지 않아서 속까지 익히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감자가 다 구워지면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 이른바 ‘겉바속촉’ 상태가 되는데, 이를 각자의 국그릇에 배분해 주신다. 밥그릇보다는 조금 큰 국그릇에 구운 감자를 세네 조각 넣고 황설탕을 솔솔 뿌린다. 이름에서부터 알았겠지만 감자를 좀 으깨서 감자 샐러드처럼 만들어 줘야 한다. 그렇지만 너무 많이 으깨면 씹는 맛이 없으니 적당히 으깨서 알갱이가 좀 씹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설탕과 비비면 약간 노릇한 부분이 가끔 씹혀 아주 맛있게 한 그릇 뚝딱할 수 있는 ‘감자 범벅’이 완성된다.
초등학생 땐 국그릇에 숟가락이 부딪힐 때까지 싹싹 긁어먹었지만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는 한 번도 이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다. 세상엔 감자 범벅보다 맛있는 음식이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리저리 학원으로 쏘다니고, 공부하느라 할머니 집에도 자주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시간들이 지나, 지금 이 음식을 떠올리며 생각해보니 과연 지금 먹어도 그 감자 범벅이 맛있을까 싶다.
할머니께서 해주신 감자 범벅이 아닌 이상, 밖에서 한참 뛰어놀다가 배고파서 들어와 먹은 음식이 아닌 이상, 할머니 집에서 할머니의 냄새를 맡으며 먹은 음식이 아닌 이상 그 음식이 맛있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니 음식에는 정말 제‘철’ 음식이 있는 것 같다. 제철음식이라는 게 그 식재료가 그 계절이나 그 기간에 가장 맛있다는 뜻에서 수여되는 이름이긴 하지만, 한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철들어 가면서 먹는 음식들 중에 딱 그때만 맛있는 음식이 있다는 뜻도 되지 않을까 싶다.
겨울이 지나고, 그 따뜻함에 힘입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봄이 왔다. 올해를 지나는 나는 올해 먹은 음식들 중에 어떤 음식을 오랫동안 기억할까? 그때 먹을 그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다음엔 그 음식을 ‘덮어쓰기’ 싫어 다시 먹기가 꺼려지더라도 그런 음식이 올해도 예상치 못하게 등장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