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출발선에 섰다

by 자향자

대회 당일 이른 새벽, 스마트폰 알람 소리가 단잠을 깼다. 혹여나 아이가 깰까 재빨리 아무 버튼이나 눌러 소리를 끄고 눈을 비볐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다. 전날 밤 잠을 이루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딸아이와 하루 종일 뛰어논 덕에 피로가 쌓였던 탓일까, 아니면 올해만 네 번째 참가하는 마라톤이라 긴장이 덜했던 걸까. 나름 꿀잠을 잤다.



깜깜한 방 한편 화장실 스위치를 켜고 기지개를 켰다. 거울에 비친 부스스한 내 모습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오늘이구나.' 가볍게 세안을 마치고, 전날 미리 준비해 둔 운동복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3만 원이 채 안 되는 운동복 상하의 세트, 러닝 선글라스와 5,900원짜리 헤어밴드, 그리고 에너지젤 2개가 담긴 러닝 베스트. 풀코스 마라톤이라는 전쟁터에 나가기 위한 내 장비의 전부였다.


하나둘 준비물을 챙기고 있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아내가 일어났다.


"컨디션 어때?"

"음, 괜찮은 것 같아."

"다행이다. 차 한잔 마시고 가. 끓여줄게."


곤히 잠든 딸아이를 두고 아내가 공용 부엌으로 나가 뜨끈한 차를 건네며 다시 말했다.


"무리하지 마. 어제 내가 말했지? 힘들면 그냥 백기 들어. 내가 데리러 갈게."

"크크, 알겠어. 일단 최선을 다해볼게."


내일모레 마흔 인 나를 이렇게나 보듬어주는 사람은 엄마 제하곤 오롯이 아내뿐이다. 겉으로는 툴툴대는 나지만 속으로 그녀에게 언제나 감사하다. 따뜻한 차로 몸을 데우고 아내와 가벼운 포옹을 나눈 후, 대회장으로 향하기 위해 숙소 문을 열었다. 내가 제일 먼저 마주한 풍경은 무엇이었을까? 새벽녘 짙게 드리운 안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풍경이었다. 숙소가 강가 주변이라 안개가 더욱 자욱했을 것이었다.



그 길을 홀로 나섰다. 숙소와 대회장은 2km 남짓 되는 거리로 제법 가까웠다. 도보로 20분 내외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 천천히 걷다 보면 대회장이 나올 터였다. 아내와 딸은 대회가 끝나갈 무렵 피니시 라인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른 아침부터 나오게 하는 것도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깜깜한 밤, 안개가 자욱이 드리운 강가 주변 길을 혼자 걷는다고 상상해 보라. 어떨 것 같은가? 솔직히 나는 좀 무서웠다. 듬성듬성 가로등 불빛이 있긴 했지만, 아무도 없는 길을 걷다 괜히 뒤를 돌아보기도 하고 소름이 돋기까지 했으니, 겁쟁이란 단어가 그날의 나에게 딱 어울린다.



그 길을 걸으며 사실 대단한 생각을 하진 않았다. 그저 '달리다가 배탈이 나면 어떡하지?', '근데 완주는 진짜 할 수 있는 걸까?' 정도의 가벼운 질문이 머릿속을 맴도는 게 전부였다. 이런저런 잡념에 사로잡혀 있을 무렵, 내 발걸음은 어느새 대회장 주변에 닿았다.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한 건가? 그래도 빠듯하게 도착하는 것보단 낫지.' 이런 생각을 하는 찰나, 하나둘 차량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아침 해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부러 대회장에 일찍 가는 편이다. 이동 중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고, 혹시 모를 배탈에 대비해 화장실도 미리 다녀올 수 있으니 해가 될 일은 아니었다. 마라톤 대회장 화장실은 어디나 줄이 길다는 것, 참고하시길. '미리 준비해서 해 될 것은 없다.'가 나의 지론이다.



마라톤 대회장에는 특별한 분위기가 맴돈다. 심장이 쿵쾅댈 정도로 신나게 울려 퍼지는 음악, 북적이는 인파, 그 안에서 서로 담소를 나누거나 몸을 푸는 사람들의 모습. 그 사람 냄새나고 기분이 한층 고조되는 분위기 덕분에 풀코스 마라톤 대회까지 오게 되지 않았나 싶다. (굉장한 매력이 있는 스포츠다.) 올해 총 다섯 번의 마라톤 대회를 참가했다. 대부분의 대회에 홀로 참가했지만, 그저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훈훈해진다.



그날의 날씨는 그리 춥지도 당연히 덥지도 않았다. 마라톤을 하기에 꽤 괜찮았던 날씨로 기억한다. 이른 아침이라 몸을 푸는 동안 체온 유지를 위해 패딩을 입어줬다. 나의 11월 마라톤 대회 복장은 어땠을까? 혹시 모를 추위에 대비해 레깅스를 입고 반바지를 덧입었다. 상의는 반팔에 손이 시릴까 봐 장만한 6,000원짜리 장갑 한 켤레가 대회 참가 복장의 전부였다.



11월 겨울 초입의 대회임에도 민소매 상의에 반바지를 입고 참가하는 이들도 수두룩하다. 딱히 정해진 복장은 마라톤 대회에 없다. 나는 추위에 약한 편이라 레깅스를 입었다. 마라톤 복장에 고민이 있는가? 그런 거 없다. 그냥 입고 싶은 대로 입으면 된다.



대회 1시간여를 앞두고 사회자의 진행 아래 행사가 막을 올렸다. 리듬감 넘치는 음악 소리에 맞춰 개막 공연이 펼쳐지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내 가슴도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대회장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토록 꿈꿔왔던 마라톤 풀코스 대회를 앞두고라서 인지 모르겠지만, 그 시간부터는 꽤 긴장되기 시작했다.



이어서 대회 관계자들의 축하 인사가 이어졌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대회 시작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출발선 부근으로 이동해 몸을 풀었다. 그날 오랜만에 기도를 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완주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 행여나 실패하더라도 최선을 다하게만 해달라.' 인간은 간절한 순간이 닥쳐야만 그를 찾는다.



긴장된 마음을 풀어보려 출발 전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어났어? 나 이제 조금 있으면 출발해."

"어, 지금 호떡이랑 보고 있어."

"응?"

"그 대회 유튜브로 생중계해 주더라고. 잘하고 와. 이따 보자."

"그래, 이따 보자. 파이팅."



대회 관계자들이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3분 후면 출발한다는 사회자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이 순간을 위해 지난 3월부터 쉼 없이 달려왔다. 고작 30km밖에 달려본 게 끝이지만, 최선을 다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나는 완주할 수 있을까? 그리고 멋지게 가족들을 만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출발 신호가 울렸다. 세상 떠나가라 함성을 지르며 외쳤다. "가자, 자향자! 오늘 사고 한번 치자!" 2025년 나의 마라톤 풀코스 도전은 그렇게 막을 올렸다.








keyword
월, 수, 금 연재
이전 14화결전의 장소, 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