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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남이 Jul 09. 2024

새로운 기능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부부 모두 육아휴직을 하고 하루 종일 집에 있다 보니 삼시 세 끼를 대부분 집에서 먹는 날이 많았습니다. 회사 다닐 때는 점심, 저녁을 대부분 해결하고 왔었고 주말에는 이따금 외식을 해왔던 터라 이런 상황이 좀 생소하게 느껴졌습니다.



요리에 서투른 저희는 음식을 직접 해 먹기보다 주변 밀키트 전문점 등에서 반조리된 음식을 사 와 간단히 끓여 먹거나 가끔씩 어머니와 장모님께서 가져다 주신 음식으로 식사를 해결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매번 밀키트만 사다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더라고요. 당분간 수입이 제한돼 있는 저희 사정에서는 마냥 사다 먹는 것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편하긴 하지만 편한 만큼 그대로 소비하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로 빠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투르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요리를 한 번도 안 해본 건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집에 먹을 게 거의 없어서 찬장을 뒤지다 베트남 쌀국수 봉지 라면 두 개가 있어 슈퍼에서 숙주하나 사고 엊저녁에 먹다 남은 불고기를 얹어 아내에게 만들어준 적이 있어요. 맛있게 먹어주더라고요. 그때가 아마 제가 처음으로 아내에게 요리 비슷한 걸 만들어준 걸로 기억합니다.     



여하튼, 여느 날과 다름없이 ‘오늘은 뭘 먹어야 하지’ 고민하다 주방을 가만히 살펴봤습니다. 구석에는 쌀자루가 놓여있고, 냉장고에는 양파나 대파 같은 기본적인 채소가 눈에 띄었습니다. 음식을 만들기 위한 기본적인 재료들은 어느 정도 구비가 돼있었던 셈입니다. 문득 ‘음식 만들어 먹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밥에 물을 어느 정도 채워야 하는지도 모르고 칼도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는 제가 아내에게 하나씩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밥 물은 어느 정도 넣어야 돼?” “밥 짓는 거 예약은 어떻게 하는 거야?”를 시작으로 조금씩 주방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생각보다 요리가 재밌게 느껴져서 요리를 만드는 과정을 개인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블로그를 보며 레시피를 익히고 잊어버리면 다시 보고를 반복하면서 하나씩 음식을 만들어줬습니다.



정성을 다해 만든 음식을 식탁에 올리고 아내가 맛있게 먹어주는 날이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음식에 숟가락이나 젓가락이 많이 가지 않는 날에는 조금 시무룩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맛없는 음식을 최대한 맛있게 먹어주는 아내에게 고마웠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음식 은근히 있었거든요.



아내에게 요리해 준다는 만족감 외에 제가 요리를 시작한 이유가 또 하나 있었습니다. 제가 먹고 싶은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었거든요. 제일 처음 만든 음식이 아마 ‘된장찌개’였을 겁니다. 된장찌개가 정말 먹고 싶었는데 아내는 아이를 돌보느라 요리해달라고 말하기 정말 미안하기도 했고요. 온갖 야채를 부엌에 꺼내놓고 블로그 보면서 만든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푹 끓이면 더 맛있는 된장찌개라고들 하는데 의도치 않게 요리시간이 길어져 생각보다 괜찮은 된장찌개를 만들었습니다.



뭐든 하면 할수록 손에 익게 되는 법입니다. 매일 점심과 저녁을 거의 책임지다시피 하니 시간도 점점 단축되고 만들 수 있는 음식도 하나씩 늘어갔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거창한 요리를 만들 수 있게 된 건 아니고 그냥 된장찌개, 김치찌개, 콩나물국, 소고기뭇국 정도는 레시피 없이 조리가 가능한 정도입니다. 숙달이 되다 보니 쉽고 빠른 음식 만드는 방법도 고민하게 됐습니다. 육아 중에는 요리 외에도 할 일이 태산이었으니까요.



가정주부는 마트에서 시장 물가를 체감하는 순간이 자주 찾아옵니다. 저는 그 체감의 척도를 ‘애호박’으로 삼았는데요, 된장찌개를 자주 끓여 먹는 부부에게 ‘애호박’은 감자만큼 중요한 요리 재료였거든요. 한동안 애호박 하나에 이천 원씩 하면서 가격이 고공행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애호박이 비싼 날에는 느타리버섯을 넣어주고, 느타리버섯 마저 비싸 보이는 날에는 팽이버섯 2묶음을 장바구니에 담곤 했습니다. 아줌마 다 됐죠?



아침 먹고 나면 점심 그 이후에는 저녁. 이제 저는 주부들의 마음을 정말 십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기 저는 가정주부와 다름이 없는 상태였으니까요. 이제는 냉장고 문을 열어 어떤 재료가 있는 빠르게 확인하고 있는 재료를 활용해 어떻게 점심, 저녁을 최대한 해결할지 고민합니다. 바로 검색해서 제가 할 수 있겠다 싶은 레시피는 담아두기도 해요.



딸아이도 이제 조금씩 제가 요리한 음식을 하나씩 맛보고 있습니다. 야채 볶음밥, 스파게티, 콩나물국, 된장국 등을 맛있게 먹어주는 날에는 그렇게 행복할 수 없고, 입에 하나도 안 댄 날에는 솔직히 아쉬움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괜찮습니다. 언젠가는 제 진면목을 알아줄 테니까요.



아이가 장성해 제가 만든 음식 앞에 가족이 모여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 나누는 상상을 합니다. 요리하는 취미를 알게 해 준 아이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언제나 맛있게 먹어주는 아내에게도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 딸아이 덕분에 ‘요리’라는 제 고유의 스킬이 하나 늘어났습니다. 육아휴직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요리에 진심을 다하진 않았을 거예요.



그렇게 ‘새로운 기능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아이가 자라가면서 저는 아이를 통해 또 어떤 기능을 업데이트할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제 안에 또 어떤 능력이 자리 잡고 있을지 아이가 적극 발굴해 주길 희망하며 '아빠'라는 이름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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