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끈한 국물이 땡길 때 보통은 팔팔 끓는 뚝배기에 담긴 국밥류를 떠올리겠지만 나는 쌀국수를 떠올린다. 맵고 뜨거운 걸 잘 못 먹는 내게 적당히 뜨뜻하며, 맵지 않아 속을 시원하게 하기에 적절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쌀로 만들어 소화도 잘 된다. 직장 다닐 때 점심으로 쌀국수를 꽤 자주 먹은 것도 이런 이유다. 점심에 과식을 하거나 고기를 먹으면 속이 불편해 오후 업무 내내 속이 답답해 고생인데 쌀국수는 속이 아주 편안하다. 소화가 너무 잘 돼 3시쯤 배가 고파진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게다가 딱히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음식도 아니라 의견 통일에도 좋고, 고기를 고명으로 올려 탄단지의 조화도 적당해 점심 식사에 제격이다.
얼마 전 한 쌀국수집에 방문했다. 바 형태의 테이블만 있어 어느 자리에 앉아도 조리 과정을 볼 수 있는, 언뜻 보면 라멘 가게로 착각할 것 같은 재미있는 가게다. 더 특이한 점은 이 가게에서는 대화는 최소한으로, 작은 소리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누구나 편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식사할 수 있는 분위기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일행과 나름 작은 소리로 몇 마디 속닥거리다가 점원에게 지적을 받았다. 민망하기도 하고, 약간 의기소침해져 각자 핸드폰을 하며 말없아 음식을 기다렸다.
쌀국수를 만들 때 가장 마지막에 고명으로 올려 색감을 살리기도 하고, 국물의 깊은 맛을 더해주는 쫑쫑 썬 대파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생각해보면 동남아에서 먹은 쌀국수에는 대파가 올라가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건 한국인 맞춤 변형인가. 쌀국수를 무척 좋아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쌀국수의 본고장 베트남에는 가보지 못했다. 베트남에 가서 1일 1 쌀국수를 하는 것이 작은 소망인데도 말이다. 곧 베트남에 가서 쌀국수에 파를 올려주는지 아닌지 직접 확인해봐야겠다.
서빙된 쌀국수 위에 올라간 숙주를 그릇 아래로 보내 익히려고 젓가락을 집어 든 순간 그릇 가장 위에 올라간 파가 눈에 띈다. 종종 하트 모양의 파를 볼 수 있는데 이건 너무 완벽하게 귀엽고 통통한 하트다. 하트 모양이 망가지지 않게 조심스레 집어 들어 일행의 쌀국수 그릇 위에 살포시 띄워주었다. 수업 시간에 몰래 쪽지를 돌리며 킥킥거리는 학생들 같다. 이 하트 모양 파가 뭐라고 아까 점원에게 지적받아 살짝 찌그러졌던 마음이 사르르 풀린다. 사실은 일반적인 모양의 파가 아니라 어딘가 찌그러진 파였기 때문일 텐데, 그러니까 조금 하자자 있는 상품이라고 볼 수도 있는 건데 네잎클로버를 찾은 것처럼 기분이 좋다. 왜 어떤 돌연변이는 미운 오리 새끼가 되고, 어떤 것은 행운의 상징이 되는 걸까.
식사하다보니 쌀국수 안에서 또 하트가 나왔다. 아깐 초록색 하트였는데 이번 건 연두색이다. 또 집어 들어 이번엔 내 그릇 벽면에 붙여보았다. 그런데, 파 한 뿌리 한쪽이 전부 살짝 찌그러졌었는지 한 젓가락 들어 올릴 때마다 쌀국수 속에서 하트가 계속 나온다. 하얀 하트, 작은 하트, 찌그러진 하트, 길쭉한 하트. 같은 단에서 잘린 조각들인데도 색도 모양도 크기도 다 다른 것이 재밌다. 동상이몽이 파들인가. 같은 줄기라도 사람 마음이 다 다르듯 이 파 하트도 다 다른 것이 신기하고 웃겨 쌀국수를 먹으며 발견한 파들을 그릇 벽면에 줄 세워보았다.
식사를 다 마치고 내 그릇을 본 일행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이 그릇을 치울 점원이 보는 게 좀 부끄러운데 파를 흐트러트려 국물에 다시 넣을까 하다가 점원도 이걸 보고 피식 웃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냥 남겨두고 나왔다. 배가 많이 고팠던 탓에 면 리필까지 해서 먹었더니 일어나는 순간 포만감이 밀려온다. 그래도 맛있었다. 훌륭한 식사였다. 후회와 만족감을 동시에 위장에 꽉 채우고 가게를 나선다. 그래. 오늘도 쌀국수, 너는.. 러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