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망각'이 아닐까?
우리들은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자신들의 하루하루를 보냈다. 간혹 은우에게서 잠을 못 자 힘들다는 톡이 오면 병원을 한 번 바꿔보는 건 어떠냐, 수면보조제 같은 걸 알아보자.. 누구나 할 수 있는 시답잖은 답변을 할 뿐.. 은우의 상태에 대해서도 우리 모두 무뎌져 가고 있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은우의 우울증도 은우만의 일이 되어 가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은 본인만의 일이다.
시간은 그런 우리와 상관없이 자기 할 일을 책임감 있게 해낸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 은우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헤어지고 난 이후에야 '사실은 그런 일이 있었다'라고 들은 게 전부지만 말이다. 지구대에서 경찰서로 옮기고 민원인들 위주로 하던 업무가 경찰서 내에서 하루 종일 직원들과 부대껴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많이 힘들어했다. 친근하게 다가와서 은우의 사생활을 알아내고는 주변에 퍼트리는 사람도 있었다. 본인의 이혼 사실이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이유 없는 냉소와 차별을 받았고 더욱더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 수가 없었다. 물론 좋은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남의 불행은 커피타임 또는 술자리에서 꺼낼 수 있는 좋은 소재거리였고 본인의 이혼이 공공연히 사람들 입에 오르는 걸 알면서도 내색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명절에도 쉽게 내려오지 못했다. 혼자 사니까 명절에 대신 근무 좀 서달라는 부탁부터 갑작스러운 당직 변경까지도 당연히 은우의 몫이 되었다. 자기 지인 중에 애 딸린 홀아비가 있는데 사람은 착해라는 흔해빠진 중매까지.. 이혼녀라는 꼬리표는 은우의 자존감을 바닥까지 떨어뜨려 놓았다. 늘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거절을 모르는 사람이 되어 갔고 늘 피곤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어.. 이게 최선이야라고 자기가 만들어둔 덫에 가둔 채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말이다.
그러던 중에 그 사람이 나타났다고 한다. 연하의 총각이었고 같은 서에서 근무하는 사람이었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늘 실실거리는 은우에게서 연민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종종 왜 그러고 사냐고 안 되겠다 내가 딱 잡아주어야겠네.. 그렇게 서서히 다가와서는 은우의 옆에서 지켜주겠다며 옆자리를 내어달라고..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 얘기를 꺼낸다.
은우는 재혼할 생각이 없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불면증이 너무 심해서 약 종류가 늘어가던 때였다. 그와 동시에 우울함은 더 깊어졌고.. 그 사이에 이 친구가 비집고 들어오니 부담스러웠나 보다. 여느 썸남썸녀처럼 차 마시고 얘기하고 그 정도가 딱 좋았는데 이 친구는 선을 넘기 시작했다.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은우도. 하지만 본인에게 붙어있는 이혼녀라는 꼬리표를 무시하면서까지 자기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다. 자기감정 또한 선을 넘었을지도 모른다. 그 마음마저도 애써 부정하려고 노력했겠지..
"우리 엄마한테 말했어. 너랑 결혼하고 싶다고.."
그가 어느 날 이렇게 말했을 때 은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 너랑 결혼 안 한다고 그런데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허락받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나 믿어.."
은우는 이때 심장이 쿵하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고 했다. 이건 아니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웠고 어찌해야 할지.. 이 세상 물정 모르는 고집불통 청년에게 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이 앞섰다. 나는 너랑 결혼할 생각이 없고, 그보다 내 이혼을 너희 부모님들이 달가워할 이유가 없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먹히지를 않았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게 현실이라고 했던가. 드라마에서나 보던 장면이 연출된 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은우 씨되세요?"
"네.. 전데요.. 누구시죠?"
사무실 전화로 중년 여성이 은우를 찾는다. 피의자인가.. 조사날짜 변경이라도 하려나.. 대수롭지 않게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렇지가 못했나 보다. 본인 확인 절차가 끝나자마자 대본이라도 있는 듯 막힘없이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혼녀 주제에 감히.. 어디 내 아들을 넘보냐로 시작된 일방적인 대화는 은우의 죄송합니다 안 만나겠습니다를 들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꽤 긴 시간 통화가 이어졌는데 당신 부모님은 뭐하는 사람들인데 양심도 없이 이혼녀가 총각 만나는데 모른척하고 있냐라는 말도 들었다고 한다. 내가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감히 니 따위가 들러붙어서 재수 없게 말이야도 들었다고 한다. 돈다발 던지면서 먹고 떨어져라라도 할 것이지.. 그럼 그 면상에 돈봉투라도 한 번 던져주는 건데... 은우가 그럴 수 있는 애가 아니니 내가 옆에 있었더라면 내가 대신 면상에 던져줄 텐데 듣고 있는 내가 너무 화가 나고 억울해서 미쳐버릴 거 같았다. 결국, 그 패기 넘치던 사랑꾼 총각은 밀어내는 은우에게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자기 엄마가 바라는 대로 조용히 사랑을 접었다.
모든 일은 상황이 종료되고 나서야 전달된다. 그 모든 걸 혼자 다 겪어내고 수많은 밤을 낡아빠진 빌라 한 구석에서 혼자 울음을 삼켰겠지. 가족에게 걱정 끼치기 싫어서라고 말하지만 가족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렇지 않게 사실은 그런 일이 있었어 그 뿐이야..웃으면서 얘기한다.
이혼도... 재혼에 관련된 에피소드도....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아무런 조언도 듣지 못한채 혼자서 다 해결해버렸다. 우리는 무능한 가족이라는 죄책감만 가득 생겨버렸고... 그저 기다려줄뿐.. 다른 방법은 어차피 없었던걸까.. 내가 더 챙겼더라면 털어놓고 의지해줬을까? 멀 더 얼마나 챙겨야하나? 아침저녁 전화로 문자로 많은 얘기를 했음에도 결국 껍데기뿐인 대화였나? 힘든 시간 함께 해주지 못한 미안함과 서운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다 혼자 끌어안고 가려니 병은 나을 수가 없다. 그즈음부터 공황장애가 시작되었을거다.. 남자에 대한 절대적 불신까지 더해져 우울과 베프 먹고 더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여러 차례 산사람에 대한 절대적 불신이 생긴 은우는 결국 죽은자들과 대화하는 길을 택했고, 과학수사대에 지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