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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정아줌마 Sep 27. 2024

목격자

완결

 다음 날, 오전 박 형사는 사건 현장을 다시 찾았다. 하지만, 노란 폴리스라인 안이 아닌 옆 호실의 벨을 눌렀다. 

“누구시죠?”

“박 형사입니다.”

712호 남자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아, 형사님. 그런데 무슨 일로.”

“사건이 너무 안 풀리네요. 시간 괜찮으면 안에서 잠시 얘기 좀 나눠도 될까요? 그때 봤다는 야구모자…. 자세히 다시 듣고 싶어서요.” 

잠시 머뭇거리나 싶더니 712호 남자는 문을 열고 식탁 쪽에 앉을 것을 권하며 음료수 한 잔을 내왔다.

“여기서 산 지는 오래됐나요?”

“네, 엄마랑 같이 살다가 재작년에 돌아가시고, 이제 혼자 살아요.”

“아, 그렇구나. 외롭겠네요.”

“아니에요. 혼자 사는 사람이 저뿐인가요.”

“하긴, 그런데 오늘은 휴무인가 봅니다. 근무 중일 거 같아서 전화하려다가 현장 오면서 벨 눌러본 건데.”

“네, 일주일 휴가를 냈어요. 세상도 시끄럽고 옆집에서 살인 사건도 나고 뭔가 뒤숭숭해서 말이죠. 여행이라도 갈까 하고.”

그러고 보니 거실 한쪽에 큰 여행 가방이 나와 있었다. 좀 전까지 짐을 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디 좋은 데라도 가나 봅니다. 그때 야구모자가 검은색이라고 하셨죠? 저는 집에라도 가면 좋겠는데 말이지요.”

“네, 맞아요. 검은색. 그나저나 힘드시겠네요. 증거도 없고. 저는 내일 아침에 거제도에 아는 형이 있어서 거기 좀 갔다가 오려고요.”

“거제도 좋죠. 그래도 범인 단서라도 알려 줘서…. 빨리 검은색 야구모자에 나이키 신은 놈 찾아서 나도 집에 가야죠. 감사 인사차 왔습니다.”

“아이고, 무슨. 당연한 일인데요.”

“여행 잘 다녀오십시오.”

 박 형사는 712호를 나와서 713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시간이 문제네, 시간이.’     

박 형사는 어젯밤 사건을 다시 정리하던 중,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목격자는 있는데 목격자가 말하는 용의자는 공중에서 사라졌다. 혹시, 목격자가 가공의 인물을 말한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는 왜 거짓 목격자행세를 해야 했을까? 그가 범인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굳이 묻지도 않은 일에 직접 나서서 목격자를 자처한 것일까? 어쩌면….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왜?라는 의문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박 형사는 새벽 5시가 되길 기다렸다. 한겨울 암흑이 자리 잡은 계단. 막내에게 검은색 야구모자를 씌우고 계단에서 목격 현장을 다시 재현해 보기로 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미리 약속한 대로 막내에게 고개를 돌려보라고 지시하고 한 층 내려가 보라고도 지시했다. 그리고, 하얀색, 빨간색, 다양한 색의 야구모자를 씌워서 똑같은 상황을 반복했다. 그리고, 오전 9시, 712호 남자가 근무하는 곳에 전화를 걸어 그가 이틀 전, 퇴사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그의 집 벨을 눌렀다.


 박 형사는 마음이 급해졌다. 712호 남자도 덩치가 컸다. 여자 하나쯤 얼마든지 들어 옮길 수 있는 건장한 체격이다. 그는 야구모자의 색깔은 말하지 않았었다. 만약 검은색 모자였다면 모자는 전혀 보이지 않아야 했다. 박 형사는 712호를 나온 이후 팀원들을 사건 현장 아파트 곳곳에 잠복시키고 그의 행적을 쫓기로 했다. 아직 직접적 증거가 없다. 그렇다고 용의자를 놓칠 수도 없다. 뒤를 쫓으며 결정적 증거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매트리스 뒷면의 물질이 그가 범인임을 알려 준다면…. 박 형사는 바짝바짝 목이 타들어 갔다. 


 그때였다. 혼수상태였던 여성이 의식을 되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박 형사는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갔다. 피해자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만 응시하고 있었다. 급하다고 섣불리 피해자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조용히 문 앞에서 그녀가 마음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피해자는 그럴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들었어요. 제 친구가 죽었다고. 그리되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네,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때가 생각이 난 건지 한참 흐느끼던 피해자는 작심한 듯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날의 일을 힘겹게 진술해 나갔다. 박 형사는 그녀의 진술을 녹음하며 ‘개새끼, 꼭 잡아서 법정에 세우고 만다.’ 있는 힘껏 주먹을 움켜쥐었다. 

“힘드셨을 텐데 진술 감사합니다. 혹시, 그 사람 인상착의는 보셨습니까?”

“전혀요. 그런데, 제가 살았는지 확인하려고 가까이 다가왔었는데 제 등에 딱딱한 게 살짝 닿았어요. 그리고, 몸집이 큰 남자? 아마도요. 그리고, 슬리퍼 끄는 소리가 나더니 바로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났어요. 다시 들어오는 줄 알고 너무 놀라서 그 이상은 기억이….”

 피해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잠복하고 있던 팀원이었다.

“팀장님, 712호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도보야? 차량이야?”

“렌트 차량입니다. 바로 따라붙겠습니다.”

“절대 놓치면 안 돼. 그 새끼 숨어버릴지도 몰라.”

 박 형사는 잠복 팀에게 그의 뒤를 바짝 쫓으라고 말하고, 상황실에 그가 타고 간 차량을 실시간 추적해 달라고 요청했다.


‘쥐새끼 같은 녀석. 여태 경찰을 갖고 놀렸어.’ 박 형사는 그의 친절한 미소 뒤에 숨은 검은 의도가 확실히 파악되었다. 완벽하다고 생각했겠지. 바로 도망가면 의심받을 게 분명하니까 가공의 용의자를 만들어 시간을 끌 생각이었음이라.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기 욕망 때문에 죄 없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 빌어먹을, 그런 새끼한테 놀아나다니.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분노를 삭일 틈도 없이 막내가 그를 보고 달려왔다.

“팀장님! 방금 국과수 결과 나왔어요. 매트리스 뒤에서 나온 물질에서 712호 남자 DNA 검출됐습니다.”

“됐어! 가자. 범인 잡으러.”

박 형사는 피해자 진술 확보 후 신청한 영장이 나오자마자 과학수사팀과 함께 712호 집부터 수색했다. 가장 의심스러웠던 안방 문을 열었다. 어제 방문했을 때 한쪽 벽에 컬렉션처럼 야구모자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박 형사는 안방 문부터 활짝 열었다. 그리고, 모자 진열대 반대편을 보고 경악했다. 벽면 전체가 옆집 여자의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놀라고 있을 틈이 없었다. 그가 범인이라는 다른 증거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712호 남자는 강원도 고성 바닷가 앞 조그만 민박집에서 형사들에게 긴급 체포되었다.


 조사실에서 두 사람은 형사와 용의자로 다시 마주했다. 박 형사는 712호 남자에게 운을 떼기 시작했다. 

“거제도에서 갑자기 강원도로 마음이 바뀌었나 보네요.”

“거제도 형님이 바쁘다고 하셔서요. 그게 문제가 되나요?”

“아뇨. 그럴 리가요.”

“그런데, 왜 저를 잡아 오신 거죠? 저는 목격자지 범인이 아닙니다.”

“그렇죠. 목격자죠. 그와 동시에 용의자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이거 봐! 무슨 근거로 저를 용의자로 지목하는 거지? 증거도 없이 사람 이렇게 잡아도 되는 거야? 병신들 내가 말해 준 놈부터 잡으라고!!”

712호는 악을 쓰며 박 형사에게 대들었다. 박 형사는 그의 집에서 찾은 증거물의 국과수 감식 결과를 수색영장과 함께 보여주었다. 모자 진열대에 놓인 빨간색 야구모자와 싱크대에 있던 과도에서 나온 혈흔과 지문의 감식 결과였다.

“무슨 근거로 내 집을 마음대로 들쑤신 거야?”

오히려 당당하게 묻는 712호 남자에게 박 형사는 보여준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그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피해자 안방 매트리스에서 당신 DNA가 나왔거든.”

“그럴 리가 없어! 당신들이 조작한 거지? 어?”

경찰이 증거를 조작했다며 큰소리치는 712호 남자를 보니 박 형사는 단전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친절했던 이웃집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용케도 숨겼더군요. 그 큰 매트리스를 뒤집어가면서.”

712호 남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완전 범죄라고 생각했겠지. 그리고, 형사들을 조롱했겠지. 거짓 정보에 우왕좌왕하는 형사들을 보며 얼마나 배꼽을 잡았을까? 하지만, 712호 남자는 모르는 게 하나 있다. 수사관들은 포기를 모른다는 것을. 그가 입을 다문 지 십여 분이 흘렀다.

“담배 하나 주시겠습니까?”     

 

 무지개아파트 713호 살인 사건 현장검증이 이루어졌다. 좁은 복도는 피해자 가족들과 이웃들까지 몰려와 난동을 부리는 통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그들을 진정시키고 경찰들의 통제하에 현장검증이 재개되었다. 그는 713호 여성이 혼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 몰래 그녀를 지켜보며 속으로 마음을 키웠고, 계단 옆에 숨어서 그녀가 집에 들어갈 때 비밀번호를 확인해 두었다고 했다. 

 포승줄에 묶인 712호 남자는 조심스럽게 713호의 문을 열었다. 낯선 여자의 등장에 당황한 712호는 뒤돌아서 방으로 들어간 뒤를 따라 미리 준비한 칼로 등을 세 차례 찔렀다. 여자는 쓰러졌고, 잠시 후 다가가 숨을 쉬지 않는 걸 확인하고 안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713호 여성에게 살금살금 다가가 입을 막고 말했다. “옆방 친구는 죽었어. 소리 지르면 너도 죽일 테니까 조용히 해.” 그렇게 그는 그녀를 겁탈하고,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샤워를 시켰다. 피해자는 712호 남자의 얼굴을 보았고, 712호 남자는 핸드폰 충전기 선으로 그녀의 목을 졸랐다. 그리고, 그녀가 사망한 걸 확인하고, 안방 매트리스를 뒤집고, 1시간에 걸쳐 집 안 곳곳을 닦고 또 닦았다. 그녀의 싱크대에서 들고 간 과도를 씻고 슬리퍼를 신고는 자기 집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박 형사에게 거짓 정보를 흘린 날, 형사들이 현장에서 철수한 사실을 확인하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계단을 말끔히 청소했다. 현장검증은 그렇게 끝이 났다.     


 박 형사는 경찰서 밖 편의점 야외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저 사람 중에 범죄와 연관되어 있는 사람이 있을까? 박 형사는 그에게 다가와 친절하게 단서를 알려 주던 712호 남자가 떠올랐다. 오늘 아침에 그는 검찰에 송치되었다. 평범하게 생긴 우리네 이웃의 얼굴이었다. 

“박 형사님, 여기서 뭐 하세요?”

김 주임이 박 형사 맞은편에 앉으며 커피를 건넸다.

“고마워∼ 안 그래도 하나 사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둘은 한동안 말없이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따뜻한 햇살이 매서운 겨울바람을 이기고 있었다.

“박 형사님, 저는 이렇게 지나가는 사람들 보면요. 머리 위에 별이 보여요, 저 사람은 특수강간 2범, 또 저 사람은 강도상해 1범. 뭐 그런 식으로요. 평범한 시민들을 그렇게 보는 게 잘못됐다는 건 아는데 의심병이죠. 직업병. 이제 아무도 못 믿겠어요. 그래서 다시 결혼을 못하나. 하하하.”

“나도 못 믿는 거 아냐?”

“에이, 살벌하게 참. 하긴 저 다른 청에 있을 때 저희 팀장님이 제 돈 오백만 원이랑 주변 지인들 돈 깡그리 해 잡숫고 튀신 적이 있긴 해요. 결국 잡힐 거 알면서. 왜 그러셨을까요? 이 바닥 누구보다 잘 아는 양반이.”

“욕심이지. 그 조그마한 욕심이 욕망이 되고, 거짓과 자기 우월이 섞이면서 변질되는 거지. 태어날 때부터 사기꾼이나 살인범으로 정해져서 태어나진 않으니까.”

“성선설 쪽이신가 보네요. 전 성악설 쪽인데.”

“왜?”

“본래 사람은 나빠요. 그런데 후천적으로 그러면 안 된다고 배우면서 자라는 거죠. 도둑질은 나쁘고, 강간하면 안 되고, 사람을 죽이면 안 되고…. 그걸 못 배운 거예요. 집에서든 사회에서든. 사이코패스인데도 의사로 유명한 사람도 있잖아요.”

박 형사는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며 김 주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유, 재미없는 양반! 집에 안 가세요? 딸 보러 가야죠?”

“어, 가야지. 가야지. 일주일 동안 못 갔어. 김 주임은?”

“저는 당직입니다∼. 오늘은 좀 무사히 지나가면 좋겠네요. 엊그제 당직 땐 산꼭대기에서 목매신 분 모시고 내려왔잖아요.”

“김 주임 팔뚝이 그래서 튼튼한가 보네.”

김 주임은 팔 근육을 내보이며 경찰서로 들어갔다. ‘너도나도 참, 힘들게 산다.’ 박 형사는 김 주임의 뒷모습을 보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평범한 하루, 그렇지 못한 사건들. 이성과 비이성,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 아직 피어 보지도 못한 젊은 피해자들. 문득 딸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딸이 방에서 나오기는 할까? 범인보다 사춘기 딸이 더 무서운 거 같기도 하다. ‘딸이 좋아하는 거나 사 가야지.’ 박 형사는 딸이 좋아하는 게 뭔지 생각했지만 떠오르는 건 없었다. 딸의 취향도 범인의 심리도…. 아직 박 형사에겐 넘어야 할 산이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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