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2월 한기는 저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사무실로 돌아온 박 형사는 손을 비비며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좀 전과는 달리 차분하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하나씩 나열하기 시작했다.
아파트에서 친구로 보이는 두 여성이 한 명은 사망한 채로, 또 한 명은 의식이 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등에 자창을 입은 여성은 출혈이 심해 예후를 장담할 수 없었다. 사건이 접수된 건 오후 여섯 시. 살인 사고로 의심된다는 지구대원의 연락에 현장으로 향했다. 현관 앞에는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고, 과학수사팀도 이미 도착해 있었다. 신고자는 사망한 여성의 엄마였다. 전날 오후 11시경 곧 들어간다는 연락을 마지막으로 딸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저녁 때가 되어도 연락이 닿지 않자 걱정스러운 마음에 찾아왔다고 했다. 그 걱정이 딸의 살해 사건일 거라고는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십 년간 숱하게 봐 온 살인 사건 현장들. 이보다 더 참혹하고 끔찍한 경우도 수없이 많았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성급하게 결론내릴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가진 비인간적인 모습을 지겹게 봐 온 그였다. 많은 동료가 다른 부서로 옮겼다. 하지만, 박 형사는 강력팀에 남았다. 아직 다수의 인간은 착하고 선하다는 마음 부적을 가슴 한쪽에 넣어 두고 버티어 왔다. 스물네 살의 젊은 여성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해 꿈에 부풀었을, 이들은 왜? 무엇 때문에 가장 편안해야 할 자기 집에서 죽어야만 했을까?
CCTV는 엘리베이터 안에 하나, 경비실 앞에 하나가 전부였다. 어제 경비원들과 7층에 거주하는 일부 주민들의 탐문 수사를 진행했고, 사건 당일 CCTV도 분석해 봤지만,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쉽게 풀리지 않겠다는 본능적인 예감이 들었다. 다음 날 박 형사는 팀원들과 무지개아파트를 다시 찾았다.
박 형사는 3일 치의 엘리베이터 CCTV를 다시 각층 별로 분석했다. 범행 추정 시각은 새벽 4시에서 5시 사이다. 하지만, 그 시각에 7층에서 타고 내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아파트의 계단은 외부로 바로 나갈 수 있는 구조다. 당연히 CCTV는 없었다. 그렇다면, 계단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하지만, 외부 계단에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려면 방범용 CCTV에 포착되거나 경비실을 통해야만 한다. 하지만, 양쪽 CCTV 모두 수상한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았다. 피해자인 두 여성은 사건 당일 새벽 두 시에 7층에서 내리는 것이 확인되었고, 그 이후 그녀들의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그녀들의 행적은 그렇다 치고, 그녀들을 해친 누군가가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7층에서 내리고 탄 사람은 해당 층에 거주하는 주민들이었고, 거주하지 않는, 즉, 이런 사건에서 주로 쓰는 위장법이 의심스러운 택배나 배달 기사들도 1~2분 이내 여지없이 다시 7층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1층으로 내려가 경비실을 지나갔다. 다른 팀원들이 이 아파트를 다녀간 모든 택배기사와 배달 기사의 알리바이를 확인하는 동안 박 형사와 팀 막내는 본격적으로 아파트 주민들의 탐문 수사를 시작했다. 먼저 사건 현장이 있는 7층부터 다시 탐문 하기로 했다. 어제는 대부분 부재중이었다. 오늘은 탐문의 결실이 있어야 할 텐데…. 박 형사는 현장 앞에 다시 섰다. 7층 맨 끝 집. 713호 앞에서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박 형사의 어깨를 누군가가 톡톡 친다. 박 형사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 어제 살인 사건이 있었다면서요?”
“아, 예, 혹시 여기 사십니까?”
“네, 옆집이요.”
“아, 712호?”
“네, 그런데 범인은 잡혔습니까?”
“아니요, 아직. 옆집에 사신다고 하니 몇 가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네, 안 그래도 저도 말씀드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사실 제가 새벽까지 안 자고 있었는데 옆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여기 오래 살아서 713호 주민분이 그런 시간에 다니는 분은 아닌데 싶어 궁금해서 문을 살짝 열고 내다봤어요. 그때가 새벽 5시쯤이었나? 보시다시피 713호 옆으로 돌면 비상계단이 있잖아요. 계단으로 사람이 급히 내려가는 게 보이더라고요. 살인 사건이 났다고 하니까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해서, 고민하다가 말씀드립니다.”
박 형사는 그의 말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메모하며 말했다.
“인상착의는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덩치가 제법 큰 남자 같았어요. 제집 문소리를 들었는지 살짝 뒤돌아보는데 야구모자 캡 있잖아요. 그런 게 살짝 보였던 거 같아요. 센서 등이 나갔는지 너무 어둡더라고요. 어젠 그믐이어서 달빛도 없었고.”
712호 남자의 말처럼 계단의 센서 등은 고장난 상태였다. 712호 남자는 더 할 말이 없었는지 가 봐도 되냐고 물었다. 박 형사는 모든 주민에게 협조를 구하고 있으니, DNA 수집과 알리바이 제공 등의 협조를 요청했다. 그는 모든 조사에 적극적으로 임해 주었다.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였다. 썩 반기지는 않았지만, 협조하지 않으면 괜히 의심을 사게 될까 봐 걱정한 것인지 DNA 채취와 알리바이 조사는 어렵지 않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국과수에서 온 연락은 암담했다. 사망자의 사인은 경부압박질식사. 목에 있던 흔적으로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그리고, 사망한 여성에게는 성폭행의 흔적이 있으며 그녀의 몸 안에서 남성의 정액은 발견되지 않았고, 특이한 건 그 이후 샤워를 한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범인이 그랬겠지. 그녀의 몸에 남은 자신의 흔적을 모두 없애기 위해.’ 그리고, 싱크대에서 자창을 입은 피해자의 혈흔이 발견되었고 그녀에게 성폭행의 흔적은 없어 보인다는 결과였다. 결국, 713호에선 두 여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지문과 DNA 외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젠장.
주민들과 택배기사, 배달 기사 외에는 이 아파트에 드나든 사람은 없었다. 택배기사와 배달 기사의 알리바이가 확인되면, 결국 아파트 주민의 소행이거나 계단을 이용한 외부인의 침입. 두 가지 가설로 좁혀진다. 유일한 단서가 되어 버린 야구모자를 쓴 덩치 남의 행적도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파트 내부, 그리고, 근처의 방범 CCTV에서는 그의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 병원에 있는 피해자가 의식을 되찾으면 범인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으련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아직 의식이 없었다.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택배기사도 배달 기사도 모두 그날의 행적에 수상함이 없었다. 열심히 사는 가장들이었다. 아파트 주민들과 기사들의 DNA 모두 확보했지만, 정작 비교할 수 있는 범행 현장의 DNA가 없었다. 주민들 역시 알리바이가 대부분 확실했으며 전과가 있거나 동종 범죄의 이력이 있는 자도 없었다. 그야말로 결백한 아파트였다. 결국 계단을 통한 외부인! 야구모자를 쓰고 새벽 5시경 계단으로 사라졌다는 덩치 남! 그를 찾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박 형사는 근처 편의점과 24시간 빨래방 등 혹시나 그 시간에 거기 있었을지도 모를, 새로운 목격자를 찾아보기로 했다. 편의점과 빨래방 내부의 CCTV를 모두 확인해 그 시간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흔적이라도 쫓아보기로 한 것이다. 뭔가 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외에는 사건 발생 시간 전, 후로 편의점과 빨래방을 이용한 사람은 없었다. 아르바이트생 말에 따르면 어르신 주거율이 높은 동네나 보니 새벽엔 편의점을 이용하는 고객이 많지 않고, 심지어 사건 추정 시간에 편의점을 이용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루 종일 발품을 팔았는데도 추가된 단서가 없어서 힘이 빠졌다. 그리고 보니 이틀째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사무실 의자에서 한 시간 정도 졸았을까?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는 통에 선잠에서 깨어났다.
“박 형사님이시죠?”
“네, 그렇습니다만.”
“저 무지개아파트 712호 사는 사람입니다. 그때 연락처 주셔서….”
박 형사는 자세를 고쳐 앉고 습관적으로 수첩을 펼치고 볼펜을 손에 들었다.
“아! 네, 그런데 무슨 일로?”
“제가 생각난 게 하나 더 있어서요.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야구모자 쓴 남자 말입니다. 운동화가 나이* 에어** 하얀색. 그거 같아요. 이런 것도 도움이 될까요?”
“아네, 도움이 되죠. 아, 그리고, 그때 옆집 여성분과는 잘 모르는 사이라고 하셨죠? 오며 가며 인사라도 나눈다거나 그러진 않으셨나요?”
“아뇨, 마주칠 일이 많지 않으니까요. 제가 낯가림이 심하기도 하고.”
“아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생각나는 거 있으면 전화 주세요.”
박 형사는 잠이 달아났다. 야구모자와 하얀색 나이키 신발이라. 단서가 업그레이드되었다. 박 형사는 친하게 지내는 과학수사팀 김 주임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김 주임도 무지개아파트 713호 사건 감식했지?”
“네, 저희 팀 당직 때 난 사건이니까요. 그때 계셨잖아요. 현장에서 저랑 인사도 해놓고선.”
“아, 맞다. 하도 자주 만나니까 그날이 그날 같아서 말이지.”
“저도 그럴 때 많아요. 그런데 왜요? 그 사건 때문에요?”
“응, 목격자 말로는 덩치 큰 남자가 외부 비상계단으로 야구모자를 쓰고 하얀색 나이* 에어** 신고 달아 나는 걸 봤대. 713호 옆 계단 쪽은 감식했었어? ”
“아니요, 713호 내부 전체랑 현관문까지요. 안 그래도 뭔가 찜찜해서 다시 감식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아, 그래? 잘됐네. 그럼, 계단 쪽도 한 번 살펴봐 줄 수 있어?”
“목격자가 그렇게 진술했다면 당연히 가야죠. 그 신발은 희귀 아이템이라 계단에서 족적이 나오면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어요. 제가 운동화 좀 알죠.”
“오~김 주임 그런 취미가 있었구나. 몰랐네. 어쨌든 부탁해.”
박 형사는 김 주임의 운동화를 떠올려봤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713호…. 제발 계단에서라도 야구모자 덩치 남의 흔적이 나오길 바랄 뿐이었다. 탐문 수사 내용들을 정리하다 보니 해가 기울어간다. 아침부터 한 끼도 못 먹었다. 막내와 짜장면 한 그릇 먹으려던 찰나, 김 주임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라도 나왔길 바라며 전화를 받았다.
“박 형사님. 이상해요. 여기 너무 깨끗한데요? 마치 누가 빗자루로 공들여 청소한 것처럼. 아무 흔적이 없어요. 굳이 왜?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요.”
박 형사는 전화를 끊으며 비닐도 뜯지 않은 짜장면 그릇을 치웠다. 도저히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 증인도, 증거도 없다. 단서는 야구 모자와 나이키 신발뿐.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병원에 연락해 보았다. 유일한 증인일지도 모르는 피해자의 의식이 돌아왔는지 확인해 보았지만, 아직 아무런 차도가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녀마저도 잘못된다면 이 사건은 미제 사건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박 형사는 무거운 마음으로 막내와 함께 사건 현장을 다시 찾았다. 칠흑 같은 어둠이 계단에 어려 있었다. 현장에는 감식팀이 아직 있었다.
“김 주임, 여태 있었어?”
“발길이 안 떨어지네요. 계속 뭔가 놓친 게 있는 거 같단 말이죠.”
“뭐가?”
“여기처럼 범죄 현장을 깨끗하게 치우는 경우는 많아요. 범인들도 똑똑해져 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소파며, 침대며, 바닥, 온 집안을 더 꼼꼼히 살폈는데도, 뭔가 놓친 거 같단 말이죠.”
“뭘 놓쳤어?”
“그러니까요. 그걸 알면 여태 이러고 있겠냐고요.”
박 형사는 천천히 살피다 안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박 형사의 눈에 침대가 먼저 들어왔다. 킹사이즈 침대였다.
“김 주임, 이 방 말이야. 침대가 너무 크지 않아?”
“저도 킹사이즈 침대 쓰는데 제 방도 이 정도 크기에요.”
“그래?”
박 형사는 묘한 느낌이 들어 안방을 계속 살폈다.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려도 결국 침대로 눈이 향했다.
“김 주임! 혹시 이 매트리스 뒤집어는 봤어?”
“아뇨, 뒤집지는 않고 매트리스를 빼서 사이사이랑 아!”
김 주임은 서둘러 과수 가방을 곁에 갖다 놓고 박 형사와 함께 매트리스를 잡았다.
“이거 뒤집어 보자. 매트리스가 커서 힘들긴 하겠지만.”
막내까지 달려와 힘을 보탰다. 셋이 들어도 무거운 매트리스였다. 혼자는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매트리스를 뒤집었다. 이렇게까지 했을까 싶지만, 틀을 벗어날 필요는 있었다. 뒤집힌 매트리스를 보자마자 김 주임과 과학수사팀원들이 여기저기 살피기 시작했다.
“박 형사님! 여기 이 흔적. 단순히 얼룩일까요? 오래된 거 같진 않은데….”
“제발, 우리가 생각하는 그거였음 좋겠다.”
그들은 매트리스 뒷면에 있던 얼룩을 채취해 증거 수집 봉투에 넣었다. 실낱같은 희망이지만, 걸어야만 했다.
경찰서로 돌아온 박 형사는 다시 사건을 정리해 보았다. 옛날식 아파트. CCTV는 엘리베이터에 하나, 경비실 앞에 하나. 근처에 있는 방법용 CCTV, 상점의 CCTV ….그 어디서도 증인도, 증거도 찾지 못했다. 단서는 목격자의 진술뿐이다. 야구모자를 쓰고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덩치 남. 그의 흔적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마치 계단에서 공중으로 증발해 버린 느낌이다. 잠시만, 덩치 남. 공중?…. 박 형사는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