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결
신 씨는 생각보다 재력가였다. 본인은 세 들어 살고 있지만, 아들 집을 사 주고, 혼자 살면서 알뜰하게 돈을 모았는지 은행에 예금도 제법 있었다. 최기영이 통장을 들고 있고, 비밀번호를 안다면, 언젠가는 출금을 하기 위해 은행에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범인을 기다리고 있자니, 그것도 못 할 노릇이었다.
보름이란 시간이 흘렀다. 주거지라고 알려 준 고시원은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박 형사는 누나 집을 세 조로 나뉘어 돌아가며 잠복했다. 그 덕에 잠시 시간이 난 박 형사는 일주일 만에 집에 잠시 들렀다. 옷도 갈아입고, 필요한 것들을 좀 챙길 필요가 있었다. 평소엔 본 척도 안 하는 딸이 박 형사에게 인사를 꾸벅한다. ‘탕후루 여파가 일주일은 가는구나.’ 박 형사는 기분이 좋았다.
이번처럼 수사가 길어지면 어머님께 연우를 부탁한다. 씻고 나와서 어머니가 차려 준 저녁을 먹고, 다시 사무실로 나가려는데 어머니가 방으로 살짝 부른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그런 건 아니고, 연우. 그거 시작했어.”
“그러라니? 아! 벌써….”
“벌써 라니! 요즘엔 초등학교 고학년 때 다 한 대. 중 2인데도 안 하니까 내심 걱정했었나 봐. 그래서, 어제오늘 기분이 좋아. 연우가.”
‘탕후루 때문이 아니었구나.’ 박 형사는 기분이 묘했다. 딸아이가 무슨 고민을 하고 사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좋은 아빠 되긴 힘들겠다 싶던 찰나, 팀원에게 연락이 왔다. **동 현금인출기에서 신 씨의 돈이 빠져나갔다는 내용이었다. 박 형사 일행은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CCTV를 실시간으로 추적해 최기영이 누나네 집으로 향한 것을 알아내었다. 동생이 집에 오면 연락을 주기로 했었다. 하지만, 누나는 연락을 주지 않았고, 누나 집을 지키던 잠복조에게 최기영이 누나 집에서 아직 나오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박 형사는 누나를 떠 보기로 했다.
“네, 여보세요.”
“아, 안녕하십니까? 일전에 다녀간 박 형사입니다.”
“네, 무슨 일로?”
“혹시 동생에게 연락온 건 없었나 하고요.”
“아니요, 없어요. 전화 한 통도 없네요.”
“아, 그렇군요. 동생분 찾아오면 꼭 저희한테 연락 부탁드립니다.”
“네, 그럴게요.”
박 형사는 전 팀원을 소집시켰다. 그리고, 최기영을 누나 집에서 검거할 준비를 했다. 구속 영장이 없으니 누나 동의 없이 문을 강제 개방할 수는 없다. 박 형사는 경비실에 도움을 청했다. 경비 아저씨가 누나네 집 벨을 눌렀다. 의심 없이 누나가 나왔고, 팀원들은 최기영을 검거하기 위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최기영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최기영 씨,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당신의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어요.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고, 변호인에게 대신 발언하게 할 수 있습니다. 변호인을 선임하지 못하면 국선변호인이 선임될 거예요. 인지했습니까?”
최기영은 밥 먹다 말고 수갑을 차는 신세가 되었다. 최기영의 누나는 박 형사에게 밥만 먹이고 연락하려고 했다며 제발 밥 한 그릇만 먹이고 보내게 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최기영은 살인 용의자입니다. 누님 아셨잖습니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박 형사는 최기영이 교도소에 있는 동안 누나가 일주일에 한 번은 면회를 왔었고, 영치금이며 옥바라지를 해 온 것을 확인했다. 동생이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가족이라는 끈으로 단단히 메여져 있었다. 누나에게는 안타까운 동생이었다. 삐뚤어져 가는 동생이지만 하나밖에 없는 혈육. 피를 나눈 가족….
박 형사는 조사실에서 최기영과 마주 앉았다. 최기영은 신 씨의 집에서 귀금속과 현금, 통장을 훔친 건 맞지만, 죽인 적은 없다며 살인은 극구 부인했다. 자기는 도둑질은 해도 사람을 죽일 만큼 간은 크지 않다며 손을 내저었다. 박 형사는 신 씨의 손톱 밑에서 나온 최기영의 DNA를 먼저 증거로 내밀었다. 그러자, 최기영은 그날 아침에 신 씨 집에 가서 잠시 만났는데 다투다가 그녀에게 얼굴을 긁혔다며 왼쪽 얼굴을 보여주었다. 거의 아물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얼굴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 그 이후 신 씨가 홧김에 집을 나갔고, 그 사이 통장과 현금 등을 뒤져서 들고나왔을 뿐이라고 했다. 박 형사는 최기영의 이전 사건 기록을 보고, 순순히 자백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박 형사는 최기영을 혼자 조사실에 두고 나왔다. 밥 한 숟갈 더 먹이려던 그의 누나가 생각났다. 안타까웠다. 그 깊은 사랑으로 올바른 길을 인도했어야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사람을 하루아침에 싸늘한 시신으로 만들고도 인정하지 않고, 저 살길만 찾는 악마로 만든 건 어쩌면 그릇된 사랑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 형사는 다른 팀원에게 진술을 맡기고 구속 영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증거는 충분했다. 김 주임이 놓치지 않고, 발견한 덕에 찾을 수 있었다. 팀원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조사실을 나왔다.
“팀장님, 자백받기 힘들겠는데요? 증거 들이밀어도 아니라고 하는 놈인데, 저 인간. 진짜 악질이네요.”
“그러게나…. 그래도 자백은 받아야지?”
박 형사는 숨을 고르며 조사실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차기영 앞에 두 가지 증거물을 내밀었다.
“혹시 이 중에 사망한 여성의 집에 있던 게 어떤 건지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최기영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박 형사를 올려다보았다.
“그 집에 들어가려면 이 줄을 넘기고 들어가야 해서 만약에 아침에 그 집에 들어갔다면 당신 DNA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그날 아침에 신 씨 집에 들어갔다면, 분명히 줄을 만졌을 텐데요?”
빨랫줄은 그녀의 집 현관 바로 앞에 있었다. 집주인 말로는 그 집으로 들어가려면 줄을 잡아 올려야 현관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고 했다. 이전에도 그랬고 신 씨가 이사오고 나서도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박 형사와 김 주임이 갔을 때는 잘려져 있었지만 말이다. 자기가 쓴 꾀를 어떻게 넘어갈 것인지, 지켜볼 참이었다.
“이거 같네요.”
최기영은 하나를 짚으며 말했다.
“확실합니까?”
“네, 제가 이걸 잡고 들어갔어요, 그날 아침에. 그러니까 제 DNA가 있어도 이상할 건 없죠. 이게 제가 그 여자를 죽인 직접적인 증거는 아니지 않습니까?”
박 형사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당신이 왜 살인 사건의 범인인지 말해 줄까?”
김 주임은 변사자의 목에서 빨랫줄에 가려진 이전 시간의 사건을 보았다. 빨랫줄은 위장이었다. 그녀는 빨랫줄에 목이 메여 죽은 게 아니었다. 이미 부드러운 재질의 어떤 것으로 목이 조여 죽었다. 그리고, 신 씨의 집에서 범행 도구로 보이는 그녀의 레깅스에서 최기영의 DNA를 확보했다. 최기영은 레깅스에서 DNA를 찾아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뒤에 장갑을 끼고, 구석구석을 뒤졌다.
박 형사가 내민 두 개의 빨랫줄에서는 그의 DNA가 검출되지 않았다. 하나는 시신의 목에 있던 거고, 하나는 박 형사가 집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구해온 빨랫줄이었다. 그녀의 집에서 김 주임이 수집한 빨랫줄의 잘린 부분에서 그의 DNA가 나왔다. 옥상에서 잘린 부분은 이미 장갑을 끼고 잘랐는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신 씨를 옥상에 매달아 두고 신 씨의 집으로 가서 빨랫줄을 잘랐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 자살로 위장하고, 형사들을 속이기 위해 생각한 나름의 이중트릭 같은 거였을 것이다. 국과수 부검 결과, 사망 시각은 발견된 전날 오전 10시에서 11시경으로 확인되었고, 그녀는 죽은 상태로 최소 10시간은 방치되었다. 목을 매달고 죽은 사람의 등에 시반이 나타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사망한 여성을 캐리어에 담아서 옮겼더군. 오토바이에 속을 뻔했지. 아무리 시신의 체구가 작아도 그렇게 옮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 제법 거리가 있더라고. 오토바이가 멈춘 곳에서부터 걸어보니까 구불구불 500미터는 족히 되던데, 50킬로가 넘는 사체를 당신 체구로 옮기기엔 쉽지 않지. 아! 이걸 말 안 했네. 새벽 5시에 당신이 택시를 타고 빌라 입구에서 내린 걸 확인했어.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말이야.”
박 형사는 최기영 누나의 집 앞 CCTV를 확인하다가 신 씨가 사망한 상태로 발견된 전날 오후, 그녀가 큰 캐리어를 들고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크기에 비해 가벼워 보였다. 그녀는 그 캐리어를 동생이 거주하던 고시원에 갖다 놓고 나왔다. 그녀는 그 캐리어가 시신을 옮기는 도구로 사용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신 씨가 발견된 빌라에 그날 새벽 5시, 캐리어를 들고 내린 남자를 태운 택시 기사를 수소문해서 찾아냈다. CCTV가 없는 사각지대. 최기영은 완전 범죄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잔꾀를 많이 부릴수록 허점이 많으며 형사들은 항상 범인들이 생각하는 이상을 읽고 있다는 걸 그는 모르는 것 같았다.
최기영은 자신의 죄를 시인했다. 사망한 여성에게 돈 좀 빌려달라고 했더니 욕을 해서 홧김에 이불 옆에 있던 쫄바지로 목을 졸랐는데 죽을 줄은 몰랐다고 했다. 시신은 눕혀 놓고 집안 곳곳을 뒤져 현금과 통장 등을 쓸어 담았다. 은행 비밀번호를 모르니 현금만 훔칠 생각이었는데 지갑에 있던 현금카드 뒷면에 비밀번호가 자그맣게 쓰여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돈이 됨직한 것들을 다 챙기고, 시신을 어떻게 처리할지 궁리하다가 누나에게 원양어선 타서 돈 벌어 오겠다며 짐 쌀 캐리어를 부탁했다고 한다. 누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가져다준 것뿐이고 아무 것도 모른다며 그 와중에 누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새벽 두 시에 오토바이를 훔쳐서 빈 자루를 들고 이동하고, 의미 없는 빨랫줄을 끊으며 형사들의 눈을 속일 머리는 있지만, 죽은 이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는 기대할 수 없었다.
박 형사는 구속 영장을 청구하고 그를 구치소로 보냈다. 사건을 해결했지만, 찝찝함이 남았다. 이번엔 빨리 나오지 못할 것이다. 누나는 또, 옥바라지하느라 정신이 없겠지? 그것도 핏줄이라고.
아침이 밝았다. 사무실을 나서는데 김 주임이 사복 차림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김 주임! 어제 당직이었어?”
“네! 지금 퇴근이요~~”
“진~짜 미안한데 10분만 시간 내 주면 안 되냐?”
“연애 상담이라도 하시게요? 그런 거면 오케이요~!”
“야, 그럴 리가 없잖아. 편의점 젤리 어때?”
그렇게 둘은 편의점 밖 의자에 마주 앉았다. 박 형사는 커피를 김 주임은 젤리를 먹고 있었다.
“젤리랑 탕후루랑 같은 느낌이야?”
“뜬금없이 뭔 말이에요?”
“미안해. 물어볼 데가 없어서, 이런 말 한다고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자들 생리 전에 단 거 당긴다며? 그거 사실이야?”
“우리 사이에 그런 걸 가지고. 음, 글쎄요.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겠죠? 전 늘 단게 당겨서. 분석해 드려요?”
“안 어울리게 진지하기는 진짜.”
“헤헤, 연우 일이죠?”
“응, 얼마 전에 시작했대. 그때 탕후루 너무 좋아하더라고. 그래서, 단순하게 좋아한다고만 생각한 거지. 연우 엄마도 생리 전에 단 거 많이 먹었거든. 평소엔 잘 안 먹는데.”
“에구, 우리 박 형사님, 정은 언니 생각나시는구나. 그냥 다른 부서로 가시지, 아직도 강력팀에서 일하고 싶으세요?”
“응, 아직은 해야하 일이 있으니까. 그나저나 딸 키우기 왜 이렇게 힘들어? 아들이었으면 좀 편했을까? 딸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들이라고 달랐을까요? 우리 엄마는 딸 키우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는데요?”
“그건, 너라서 그런 거 같은데? 딸도 딸 나름인 거고, 우리 연우는 착해.”
“이 양반이 진짜! 정은 언니 봐서 그냥 넘어가 드리는 거예요!!”
“하하하, 김 주임 어머니는 좋으시겠다. 딸이 씩씩해서.”
김 주임은 그새 젤리 한 봉지를 다 비웠다. 박 형사는 김 주임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저 속에 뭐가 있을지….’
“갈수록 연우가 정은이를 닮아가. 피는 어쩔 수 없나 봐.”
“예쁜 건 엄마 닮고, 까칠한 건 아빠 닮았죠. 피가 어디 가나요? 하하하, 맞기 전에 가야겠다. 저 갑니다. 일찍 들어가세요.”
박 형사는 주차장으로 뛰어 가는 김 주임을 바라보았다. 언제봐도 씩씩한 녀석이다. 그 많은 아픔을 가지고도…. 박 형사는 김 주임의 밝은 표정 뒤에 있는 그림자를 안다. 속을 좀 터놓으면 좋으련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거겠지?
연우가 자라면 자랄수록 그녀의 빈자리가 더 커지는 느낌이다. 박 형사는 퇴근길에 경찰서 근처 꽃집에 들렀다. 그리고, 연우가 좋아하는 노란색으로 장미 열다섯 송이를 샀다. 그리고, 목걸이도. 책상 위에 조용히 올려 둘 생각이다. 연우 엄마가 좋아하던 장미와 가느다란 목걸이. 딸도 좋아해 주면 좋겠는데…. 박 형사는 주차장으로 향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만간 정은이한테 한 번 다녀와야겠네. 연우 얘기 들으면 좋아하겠지?’ 박 형사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늘 저녁은 마라탕 먹자고 해볼까?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