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결
쉬는 날이다. 어제 아침 당직을 마치고, 온전한 휴무다. 시영은 운동이라도 가야겠다 싶어 주섬주섬 옷을 입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박 형사였다.
“김 주임, 쉬는 날이라며? 통화 가능해?”
“네, 박 형사님. 무슨 일이에요?”
“위층 여자 말이야. 집에서 30분 거리 편의점에서 카드 사용한 게 나왔어. 해당 편의점에서 위층 여자 얼굴까지 확인했고.”
“뭘 샀어요?”
“분리수거장에서 발견한 캔 맥주 두 개랑 아이가 마신 음료, 그리고, 페트병 맥주 하나.”
“페트병…. 현장엔 없었어요. 그리고, 재활용 수거가 끝나서 페트병은 아예 없었고. 위층 여자에게 물어보셨어요?”
“응, 방금. 저녁 먹으면서 맥주 한 캔씩 마셨대. 딸아이한테는 음료수 하나 주고. 이른 거 같아서 거기까진 아직 말 안 했어. 답답하네. 페트병이 위층 여자 집에 있을까? 압수수색영장 신청해서 집을 털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섣부른 거 같아서 말이야.”
“맥주는 어느 회사예요? 페트병 말이에요.”
“이번에 새로 나온 맥주 있잖아. 캔은 **인데, 페트병은 그거더라고.”
“박 형사님, 저 지금 **재활용센터로 갈게요. 거기로 오실 수 있어요?”
“거긴 왜?”
“뭐라도 해봐야죠. 수사팀 다른 사건들도 많아서 바쁘잖아요. 저 오늘 쉬는 날이니까 박 형사님이랑 저랑만 가요.”
“알았어. 바로 출발할게.”
시영은 곧바로 **재활용센터로 향했다. 이미 압축되어서 다른 곳으로 보내졌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 모른다. 박 형사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둘은 재활용센터 안으로 들어가 신분증을 내밀고 페트병 작업장으로 향했다.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지난주 들어 온 페트병은 아마도 작업이 끝났을 거라고 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박 형사와 시영은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재활용품 사이에서 새로 나온 맥주 페트병을 일일이 찾았다. 서울에서 김 서방 찾는 거보다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수거할 수 있는 페트병만 일단 찾아내 분류했다. 신제품이라 아직 많이 유통되지 않은 걸까? 수거하고 보니 예상보단 작았다. 1.6리터 ** 맥주 페트병. 시영은 그것들을 들고 사무실로 향했다. 하나라도 나와라. 시영은 간절함을 담아 지문을 채취하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새로운 사건들은 계속 일어났다. 고독사도 늘었고, 자살자도 늘었다. 마약범들도 늘어서 정신없는 하루하루가 흘렀다. 화재 사건도 반갑지 않은 일 중의 하나이다. 심지어, 사망자가 발생한 경우는 사물의 탄내와 함께 시체의 탄내까지 옷에 베여 빨아도 사라지지 않아 힘들다. 세상이 흉흉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갈수록 강력 사건들은 잔인해졌고, 방법도 다양해졌다. 연수도 받고, 해외 사례까지 찾아가며 공부하지만, 발전해 가는 새로운 현장 앞에 무기력해질 때가 많았다. DNA 기술이 많은 범죄자를 특정해 주었지만, 그만큼 그들의 수법도 진화했다. 증거 없는 사건들. 시영은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국과수에서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시영과 박 형사의 노력이 헛고생은 아니었다. 페트병 하나에서 위층 여자의 지문과 졸피뎀 성분이 검출되었다. 하지만, 또 난관에 부딪혔다. 혼자 먹었다고 하면 끝이다. 잠이 안 와서 수면제를 맥주에 타서 먹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시영은 박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 형사는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
“답답해 미치겠어. 위층 여자가 졸피뎀을 직접 넣었다는 인과관계가 성립이 안 되니까, 게다가 수사에 협조적이고…. 무조건 용의자로 대놓고 특정하기가 조심스럽단 말이지. 주위 이웃들도 위층 여자가 사망한 여자를 아꼈다는 말만 하고. 아, 김 주임 바쁜데 또 미안해.”
“제 사건이기도 한 걸요. 마무리는 박 형사님이 하셔야 하지만. 저녁 먹고 나서 위층 여자의 행적을 알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요. 엄마 몸속에서 검출된 알코올 양이 제법 많았잖아요. 맥주 한 캔은 아닌 게 분명해요. 위층 여자는 분명히 확인했을 거예요.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그래서, 살아 있던 엄마에게 어떻게든 약을 탄 맥주를 더 마시게 한 게 아닐까 싶은데….”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페트병에서 일단 졸피뎀 성분이랑 위층 여자의 지문이 나온 이상 그 여자가 범인이라는 심증은 나도 굳어졌어. 다른 증거를 찾아봐야지. 팀원들 풀어서 목격자가 혹시나 있는지 계속 탐문 중이야. 사건이 많아도 너무 많다. 김 주임아. 미쳐버리겠어. 하긴, 너도 그렇겠다. 이제 내가 풀어볼게. 바쁜데 고마워, 김 주임!”
근래에 일어난 사건들은 대부분 마침표를 찍었다. 자살은 자살로 의심할 데가 없었고, 무연고 변사자들은 신원이 밝혀져도 인계해 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다수의 살인 사건들도 대부분 증거가 나와서 범인을 특정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이 사건만 아직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다. 벌써 열흘이 흘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증거는 사라질 가능성이 높았다. 시영은 지석과 함께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현장을 다시 찾았다. 이번엔 다른 방법으로 현장을 둘러보았다. 구석구석, 하나하나에 신경을 썼던 것과 달리 이번엔 좀 크게 보기로 했다. 다른 면식범에 의한 범행일지도 모른다. 위층 여자가 집으로 돌아간 뒤 제3의 인물이 왔다 갔는지도. 맥주에 졸피뎀을 넣어 먹이고, 증거는 하나도 남기지 않은 채 말이다. 드러난 증거가 오히려 수사에 방해가 될 때도 있다. 시영은 벽에 걸린 달력, 그리고, 장롱 안 등. 증거가 될 것 같지 않은 것들을 중점으로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멀리서부터 시야를 좁혀 나갔다. 천장과 벽에서 시선을 아래로 옮기는데 티브이 옆에 최근에 찍은 듯한 모녀의 네 컷 사진이 있었다. 사이 좋아 보이는 모녀다. 같은 날 갔으니 외롭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울적해지려는 찰나, 시영의 눈에 반짝이는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의 목. 금목걸이.
시영은 집 안 곳곳을 열어 목걸이가 있을 만한 곳을 다 뒤졌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목걸이 아니, 실반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꽤 무게가 나가 보이는 목걸이다. 시신에는 분명히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이 목걸이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시영은 박 형사에게 급히 사진을 전송하고 전화를 걸었다.
“박 형사님! 이 목걸이. 엄마가 평상시에 하고 다닌 거 같은데, 시신에 없었어요. 집 안에 있을 만한 곳 다 찾아봤는데도 없어요. 보내드린 사진 확대하면 모양이 대충 보이실 거예요. 확인 좀 해 주세요.”
시영은 박 형사의 연락을 기다리기로 했다.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출동 신호가 떨어졌다. 연이은 사건들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느라 잠시 모녀 사건은 잊고 있었다. 박 형사에게서 연락이 온 건 밤이 늦은 시간이었다.
“김 주임! CCTV 다시 처음부터 최근까지 그 여자 이동 경로 전부 확인했더니 나왔어. 금은방. 그저께 사진 속 금목걸이랑 또 다른 목걸이 두 개, 반지까지 제법 팔았더라고. 주인한테 방금 확인했고. 금은방 CCTV까지 확보했어.”
“아, 다행이다.”
“네 덕분이야. 고마워.”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사건이다. 이번엔 동반 자살로 추정되는 사건이다. 남자 셋이 모텔 방 안에서 착화탄을 피우고 숨진 채 발견되었다. 외상도 없었고, 유서도 없었다. 현장 증거들만 수집해서 돌아오는데,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누구는 친한 사람이 건넨 술 한잔에 삶이 끝나고, 아직 젊디젊은 남자 셋은 무엇 때문에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처음 만나 함께 저승길로 갔을까? 늘 마주하는 죽음이지만, 시영은 매번 그들의 죽음과 마지막 모습이 안타깝고 슬펐다. 한 번만 더 생각했더라면, 남을 죽이지도 스스로 죽는 일도 멈출 수 있지 않았을까. 항상 일이 벌어지고 나야 그 현장을 마주할 수 있다. 그 전에 막을 수 있었더라면…. 시영은 자신의 직업을 후회한 적은 없지만, 가끔 그들의 감정에 스르륵 빠져들 때도 있어서 상담 치료를 받기도 한다. 연달아 바빠서 지쳤을까? 시영은 검은 그림자가 슬며시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나저나, 위층 여자는 왜 아래층 모녀를 죽여야 했을까?
박 형사는 위층 여자에게 임의동행을 요청했다. 위층 여자는 순순히 응했고, 박 형사는 여섯 시간 내에 이 여자를 참고인에서 용의자로 특정해야만 한다. 조사실로 향한 박 형사는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고민했다. 불면증에 의한 졸피뎀 처방.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저녁에 나눠마신 맥주. 그 또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 안에 졸피뎀을 누가 넣었는지는 넣은 당사자만 알겠지. 페트병 맥주는 본인이 마셨다고 했고, 목걸이에 대해선 아직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용의자로 의심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들이 스치고 있을까? 박 형사는 조심스러웠다. 증거들을 먼저 내밀었다간 빠져나갈 기회를 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심증대로 그녀가 범인이라면, 이 상황까지도 분명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목걸이도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다. 죽은 여자가 목걸이를 줬다고 해도 확인할 방법이 없다. 어떻게 보면 증거가 많지만, 직접적으로 연관 지을 수 있는 건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일단, 처음부터 하나씩, 모녀와의 관계부터 다시 물었다.
“**님. 수사에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위 아래층에서 꽤 오래 친분이 있으셨죠? 이웃분들이 그러시더라고요. 평소에도 친자매처럼 잘 지내셨다고. 혹시 사망한 분께 의심 갈 만한 사람에 관해 들으신 건 없을까요?”
“**가 우울증이 심해서 저한테 많이 의지했어요. 남편 죽고 아이랑 둘만 사니까 제가 자주 챙겼죠. 평소에도 자살 얘기 많이 했었거든요. 그나저나, 수상한 사람이라…. 글쎄요.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혹시, 타살 혐의라도 나왔나요?”
“아니요. 딱히 특정할 만한 게 없어서 수사가 난항이네요. 그래서 **님께 혹시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있을까 해서 부득이 오늘 다시 모셨습니다. 두 분이 사망한 날, 저녁을 같이 드셨다고 하셨잖아요. 혹시 그때 저녁 메뉴가 뭐였는지 기억하시나요?”
위층 여자는 특정할 만한 게 없다는 박 형사의 말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치킨요. 맥주랑 같이 마셨어요.”
“자주 한 잔씩 하시나 봐요? 맥주는 **님이 사셨고, 치킨은 사망하신 분이 주문하신 건가요?”
“아뇨, 치킨도 제가 샀어요. 우울증이 심하니까 맨날 죽고 싶다고. 제가 그래서, 그날도 달래주려고 치킨이랑 맥주 사서 갔던 거고요. 살기 싫다고 하길래 애가 있는데 나쁜 생각 하면 못쓴다고 한참 달랬는데…. 제가 집에 돌아간 뒤에 그랬나 봐요. 제가 좀 더 살폈어야 하는데. 지금도 그날 생각하면 후회가 돼요.”
위층 여자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울음을 터트렸다. 박 형사는 티슈를 건넸다. 그리고, 메모하는 척하며 그녀의 표정을 조심히 살폈다. 흐르는 눈물 아래 경직된 얼굴 근육.
“혹시 술은 얼마나 드셨는지 기억하시나요?”
“맥주 한 캔씩 마셨어요. 자꾸 죽고 싶다고 하니까 제 마음도 안 좋더라고요. 속상한 마음에 집에 가서 페트병 하나 다 마시고 저는 곯아떨어졌어요.”
“마음이 안 좋으셨겠네요. 아,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탐문을 나간 팀원에게서 온 전화였다. 박 형사는 조사실 안에 있는 위층 여자를 바라보며 전화를 받았다. 위층 여자에게 불안함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 그래? 알았어.”
박 형사는 다시 조사실로 들어갔다. 그는 방금 팀원에게 전달받은 동영상 하나를 보여 주며 물었다.
“혹시 이분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네? 글쎄요.”
“제가 볼 땐 **님 같은데요?”
“저 아닌 거 같은데요.”
위층 여자는 시치미를 뚝 떼며 손을 책상 아래에서 가지런히 모아 꼭 쥐더니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늘 부재 증이었던 맞은편 빌라에서 마침 휴일이라 집에 있던 주민에게서 옥상에 CCTV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네에 절도사건이 잦아서 설치한 지 3주 정도 됐다고 했다. 확인 결과, 사건 당일 밤 11시경. 위층 여자 집의 현관이 열리며 센서 등이 켜지고 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들어 가는 게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동영상을 그에게 보내왔다. 박 형사는 전에 없던 낮은 목소리로 본격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님, 목걸이는 왜 가져가셨어요?”
“제가 가져간 게 아니에요. 제가 빌려준 돈이 있었는데 도저히 갚을 능력이 안 된다고 목걸이로 대신 갚으면 안 되겠냐고 해서 받은 거예요. 그거뿐이에요.”
“그 목걸이는 지금 어딨습니까?”
“모르겠어요. 어딘가 있겠죠.”
동영상을 본 이후, 위층 여자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졸피뎀은 다 드셨나요?”
“하루에 한 알씩 먹으라고 하더라고요. 꼬박꼬박 매일 먹었어요.”
“매일 한 알씩?”
“네, 매일 한 알씩.”
“그럼 아직 약이 남아 있겠네요?”
“네? 네….”
“**맥주 페트병에서 **님 지문이랑 졸피뎀 성분이 나왔는데 맥주에 타서 드신 건 아니고요?”
“아, 맞다. 그랬나 봐요. 그날 집에 가서 맥주에 넣어서 마셨어요.”
“그렇게 곯아떨어지셨고?”
“네네. 그럼요.”
“아까 본인이 아니라고 하셨죠? 그럼, 이 동영상에서 맥주 페트병을 꼭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분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제가 잠결에 그랬나? 저는 전혀 기억이 안 나요.”
박 형사가 위층 여자를 조사하는 동안 팀원들은 긴급으로 영장을 발부받아 그녀의 집을 수색했다. 그리고, 비어있는 졸피뎀 통을 확보했다. 처방받은 양은 3주분이었으나 안은 텅텅 비어있었다. 그리고, 목걸이 등을 팔고 받은 영수증도 발견했다.
위층 여자는 더 이상 답하지 않았다. 위층 여자는 임의동행 신분에서 구속 신분으로 전환되었다. 박 형사는 모든 증거와 자료들을 첨부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그리고, 퇴근하기 전 그는 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오늘 당직이냐?”
“아뇨. 일근요.”
“그럼, 나랑 술 한잔 어때?”
시영은 경찰서 앞에 있는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청승맞은 양반. 박 형사는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이고, 박 오라버니. 좀만 기다리지.”
“왔냐? 그냥 한 잔 먼저 마시고 있었어. 오늘 그 사건 송치했거든. 오늘 드디어 집에 간다. 근데 말이다. 김 주임. 왜 이렇게 찝찝하냐?”
“할 만큼 하셨잖아요. 증거도 확보하셨고.”
“형사 짬밥 20년인데도 범인들 심리를 도통 모르겠어. 위층 여자는 왜 아래층 모녀를 죽였을까?”
“그냥 살인이 목적이었을지도 몰라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무슨 말이야?”
“사소한 감정의 골이 있었고, 그게 하나하나 쌓여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린 거예요. 양심의 가책마저도 못 느끼는, 그들을 어떻게든 죽였어야 하는 거죠.”
“도대체 무슨 소리야?”
“또 다른 가설은 돈이에요. 목걸이 팔았잖아요. 아마 같이 판 것들도 사망한 분의 것일지도 몰라요. 돈이 필요했다. 어때요? 깔끔하죠?”
“그래, 나도 돈이 목적이었다고 생각해.”
“본인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는데 어떻게 알겠어요. 아마 위층 여자는 재판장 가서도 인정 안 할 거예요. 저도 답답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니까 그런가 싶기도 하고. 범인이 되어봤어야 말이죠. 그 속을 알면 우리가 이 고생을 왜 하겠어요?”
“하긴.”
시영과 박 형사는 조용히 잔을 비웠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사건은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또 누군가는 다른 이의 삶을 끝내려고 하고 있겠지. 이러다가 모든 사람이 사이코패스 또는 소시오패스가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사건을 해결해도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고인에 대한 연민이랄까? 못다 이룬 그들의 삶에 대해서, 적어도 마지막을 본 이의 최소한의 예의는 차리고 싶었다. 말없이 술잔을 비우며, 시영도 박 형사도 아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영아, 아이 얼굴 봤어?”
“네, 박 형사님도 보셨잖아요?”
“그 아이는 무슨 죄가 있을까? 잠들면서 다시 깨어나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거야.”
“박 형사님!”
“왜?”
“상담 진짜 받으셔야겠는데요? 혼자 가기 힘들면 저랑 같이 가요. 꽤 도움 되더라고요.”
“그래야 할지도 모르겠어. 첫날 들었던 위층 여자의 통곡 소리가 귀에서 떠나질 않아. 혼자 갈게. 말이라도 고맙다. 아, 시영아. 아니다. 다음에 얘기하자.”
수많은 죽음 앞에서 유난히 마음에 남는 사건들을 만날 때가 있다. 죽은 사람도 증거도 있다. 모든 증거가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음에도 아니라고 발뺌하는 이번 사건처럼…. 이 사건은 한동안 그들을 괴롭힐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일은 더 한 사건들이 일어나 가슴에 또 다른 상처를 남길지도 모른다. 미쳐 가는 세상이다. 시영은 박 형사와 헤어지고, 불빛이 흘러나오는 경찰서를 바라보았다. 내일은 내가 저 안에서 다시 밤을 밝히겠지. 세상은 위층 여자 같은 자들로 넘친다. 범죄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릴 책임이 그녀에게 있었다. 시영은 핸드폰을 열고 사회면에서 오늘의 사건 사고를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 상담소 번호를 박 형사에게 전송했다. 다가오는 내일, 다가오는 또 다른 사건. 시영은 주먹에 힘을 쥐고 걸었다. 그리고, 박 형사는 무슨 말을 하려다 멈춘걸까? 시영은 무언지 모를 두려움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