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버스 판타지 단편소설 2)
김회장은 꿈속에서 바위를 옮기고 있었다. 커다란 바위를 줄에 묶어 여러 사람이 짊어지고 언덕을 오르는 일이었다. 발이 미끄러져 주저앉으니 등짝으로 채찍이 떨어졌다.
“제발~”
자신의 비명소리에 놀라 눈을 뜨니 온 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언제부턴가 김회장은 같은 꿈을 꾸고 있다. 현실에서는 분명 대기업 회장인데 어찌 꿈에서는 매번 강제노역장에 끌려가는가? 꿈속에서의 노역은 고통스러웠다. 현실이 아니라고 꿈을 꾸고 있다고 중얼거려도 어깨를 파고드는 바위의 무게는 견딜 수가 없었다. 꿈에서 깨기 위해 일부러 넘어졌다. 채찍을 맞으면 비명을 지를 수 있고 잠을 깰 수가 있었다.
새벽 네 시, 김회장은 다시 꿈속으로 끌려들어 갈까 겁이 나 찬물을 마셨다.
금고에서 쇳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금고를 열어보았지만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을 닫으면 다시 들리는 쇳소리가 몹시도 거슬렸다.
김회장은 그 새벽에 인터폰을 눌렀다.
“아침에 박수 들어오라고 해.”
아침식사가 끝날 때 쯤 유난히 백발의 노인이 들어왔다.
“요즘 금고가 시끄럽게 울어대 꿈자리가 몹시도 사나워. 내가 고대 강제노역장에서 바위를 져나르고 있어. 밤새 노역에 시달리다 깨면 하루 종일 몸이 무거워. 그리고 도대체 금고가 왜 저러나?”
“금고의 돈이 줄었나요?”
“외국에 공장을 짓느라 투자한 돈이 회수가 되지 않긴 하네만.”
“금고는 돈이 줄면 불안해합니다. 금고는 회장님의 기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회장님의 기가 허해 지고, 회장님의 꿈자리를 훔치는 자가 있는 것이지요.”
“꿈자리 도둑이라니, 그런 것도 있나?”
“고구려 봉상왕 시절에 을불이라는 왕손이 있었지요. 봉상왕이 아우 돌고를 죽이자 돌고의 아들 을불은 도망쳐서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수실촌 음모라는 부자의 집에 품을 팔러 들어갔는데, 땔나무를 해오고 밭일을 하면서도 을불의 표정은 행복한 얼굴이었지요. 동료 머슴들이 까닭을 물으니 좋은 꿈을 꾸어 그렇다고 대답하더랍니다. 주인은 그것이 못 마땅했지요. 자기는 개구리 울음 때문에 잠도 못 자는데 머슴놈이 잠을 잘 자다니 말입니다. 그래서 을불에게 밤새 연못에 돌을 던지게 하였지요. 을불은 연못에 돌을 던지다가 잠시 조는 사이에 꿈을 꾸었답니다. 자신이 왕이 되어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앉아있는 꿈이었거든요.”
“그렇다면 내가 과거의 누군가와 꿈자리와 연결이 되어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하면 놈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낼 수 있나?”
“일단은 금을 채워 금고를 달래십시오. 그리고 이 부적을 베개 속에 넣고 주무시면 그자가 누구인지 드러날 것입니다.”
생산 공장 구내식당에 근로자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식판에는 먹다 남은 것 같은 반찬과 멀건 국이 담겨 있었다.
“해외공장 짓고부터 반찬이 이 모양이군.”
한 근로자는 묵은 쌀로 지은 밥이 입안에서 겉도는데도 맛있게 먹고 있는 을수에게 물었다.
“자넨 어째 지치지도 않냐? 일이 즐겁냐고.”
동료의 물음에 을수는 밝게 웃었다.
“현실이 팍팍해도 꿈속에서는 내가 사장이거든요. 어쩌면 지금 이곳이 꿈속이고 그 꿈속이 현실일지도 모르죠.”
“대단한 긍정감이구나.”
동료들은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비서가 이 장면이 찍힌 파일을 김회장에게 보여주었다.
“말씀하신대로 혼자 행복한 표정을 짓는 직원입니다.”
김회장은 그자가 꿈자리 도둑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별 것도 아닌 놈이 내 꿈을 훔치고 있단 말이지. 그렇다면 놈의 잠 잘 시간을 줄여줘야겠군.”
김회장은 생산 공장을 2교대로 바꾸고 인원감축을 시행했다. 그리고 을수를 야간근무에 고정시켰다.
“이제 됐어. 인건비를 줄였으니 금고에 금이 찰 것이고, 놈이 밤에 잠을 자지 않는다면 내 꿈을 도둑맞을 일이 없겠지.”
김회장은 흐뭇한 표정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간만에 김회장은 꿈 없이 잠을 잘 수 있었다. 푹 자고 일어나 출근하는 길이 모처럼 행복할 참인데, 회사 앞에 몰려있는 해고근로자들이 길을 막았다.
“해외 공장건설 중지하라!”
“부당해고 근로자 문제 해결하라!”
근로자들의 구호를 들으며 미간을 찡그린 김회장은 경비실장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일 똑바로 안 해?”
경비실장을 맞은 다리를 절뚝이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겠습니다.”
하고 경비원들을 향해 손짓했다.
회장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오전 업무를 시작하려는 김회장에게 낮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김회장은 고개를 흔들어 잠을 쫓았다. ‘부자는 일찍 일어나고 낮잠을 자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낮잠과의 전쟁을 치러야했다.
깝북 잠이 든 김회장은 또 꿈속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이건 꿈이야 깨어나야 해.’
안간힘을 쓰면서 잠에서 깨려고 했지만 아득한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비서가 흔들어 깨워서야 겨우 잠을 깼지만, 몸이 천근의 바위에 눌린 것 같았다.
그리고 정작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독한 술을 마시거나 수면제를 먹어도 소용없었다. 밤새 뒤척이다 출근하는 시간이 되면 잠이 쏟아졌다. 김회장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실장! 그놈의 작업장 화면을 가져와.”
잠시 후, 비서가 보여주는 작업장 화면을 보며 김회장은 이를 갈았다. 녀석은 낮잠을 잘 자고 왔는지 피곤한 기색 없이 야간근무를 하고 있었다.
“놈이 자는 낮 시간에 내게도 잠이 쏟아지는 것이었어.”
김회장은 비서에게 무언가 은밀한 지시를 내렸다.
야간조로 출근하는 을수 앞에 노조 위원장이 나타났다.
“노조사무실에 회사 측 공문이 내려왔어요. 3작업장의 고을수씨를 노조위원에 포함시키면 협상에 응하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요? 저는 주간에는 자유로우니 노조의 일을 도울 수가 있겠어요.”
을수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래서 을수는 밤에는 근무를 하고 낮에는 노조위원으로 불려 다녀야 했다. 그래도 을수는 불평하지 않았다. 해고된 동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수고를 감수하고 싶었다.
며칠 후, 을수는 홀로 노조사무실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을수씨, 오늘은 노조사무실 쉬는 날인데 왜 이러고 있어?”
“노조위원장 형님께서 급한 일이 생겼다고 사무실을 좀 봐 달라고 해서요.”
“야간작업 하려면 저 간이침대에 누워 눈이라도 붙이지 웬 볼링경기를 봐? 볼링 쳐?”
“아뇨, 제가 볼링 칠 여건이 되나요? 그저 볼링공의 역동적인 모습이 보기 좋아서요. 원래 공놀이는 손이든 발이든 작대기로든, 공을 때리잖아요. 그런데 볼링공은 병정처럼 서 있는 병을 때려 쓰러뜨려요. 공도 때릴 힘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 희망이 느껴져요.”
“참 희한한 논리일세. 저 병은 깨지지도 않고 매번 다시 일어서는 걸.”
무심코 던진 아주머니의 말에 을수는 강철 오뚝이 같은 볼링병을 보고 새삼 두려움을 느꼈다.
다음날 을수는 노조위원들과 함께 노사협상 장소에 나갔다.
부당해고 근로자 복직과 2교대 철회를 요구했다. 하지만 회사 측은 시간을 끌며 협상을 미룰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을수는 낮에 잠을 자지 못 했고, 김회장도 낮에 졸음이 오지 않았다.
“밤잠을 잘 자니 낮에도 몸이 가뜬하군.”
김회장은 지방공장 시찰을 위해 이동하는 중이었다. 차 안에서 한 통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즉시 오질 항아리에 들어가십시오.’
문자를 확인한 김회장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소리쳤다.
“차 돌려!”
김회장은 화학공장 시찰일정을 전격 취소하고 차를 돌렸다.
갑작스럽게 자택으로 들이닥친 김회장을 맞느라 집 안팎이 분주했다.
김회장은 곧장 서재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비밀통로를 통해 들어간 곳은 실내정원이었다. 고운 잔디가 깔려 있고 분재된 고목들이 서 있는 일본식 정원 가운데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 사람 하나가 겨우 앉을 만큼의 크기인 연못 주위에는 대나무로 울타리를 쳐 놓아 제법 운치가 있었다.
김회장은 연못에 들어가더니 그대로 앉았다. 물이 넘치며 목까지 잠겼다.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간만에 연못에 앉으니 오래 전의 일들이 생각났다.
헌병장교 쇼오류는 상관의 명령을 전달 받고 미간을 찌푸렸다. 은밀히 고위층의 탈출을 호위하라는 명이었다. 얼마 전부터 총독부가 어수선하더니 이런 명이 내려졌다. 쇼오류는 헌병대 트럭을 모두 동원하여 총독부 간부들의 가족과 짐을 내보냈다.
호송차량을 다 보내고 마지막 지프차에 쇼오류가 탑승하려는데 상관이 심부름을 보냈다. 집무실에 중요한 서류를 두고 왔으니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쇼오류가 서류를 찾아 돌아오니 지프차는 떠나고 없었다. 쇼오류의 자리에 상관의 첩실을 태워 떠난 것이었다.
그리고 라디오에서 일본왕의 항복 방송이 흘러나왔다. 거리마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조선인들로 넘쳐났다. 집과 재산을 빼앗겼던 조선인들이 일본인을 색출해 내고 있었다.
쇼오류는 장교복을 벗고 몰래 빠져나가려 했지만 누군가 알아보고 소리쳤다.
“저기 헌병장교가 있다!”
쇼오류는 골목으로 도망쳐 민가로 숨어들었다. 다급한 마음에 뒷간의 오줌독에 들어가 엎드렸다.
“어디로 샜지?”
사람들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쇼오류는 코를 막고 엎드려 오줌 속에 머리까지 넣었다. 한 사내가 오줌독을 살펴보더니 오줌을 누었다. 숨을 참던 쇼오류는 발소리가 멀어져가자 머리를 내밀어 가쁜 숨을 들이켰다.
“이게 누구신가?”
하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떠나간 줄 알았던 사내가 다시 와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헌병장교 쇼오류 아니신가? 용케도 저승사자를 피했구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굽신거리던 순사보조 오공이었다. 오공은 쥐를 본 고양이처럼 눈을 반짝거렸다.
“이 오질 항아리가 저승사자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신물(神物)인 줄을 어찌 알았지? 운이 좋군. 헌병장교를 발견한 나도 운이 좋고 말이야.”
하며 사람들을 부르려하자 쇼오류가 바지자락을 붙잡았다.
“금괴가 있는 곳을 안다.”
그 말에 오공은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고위층들이 금괴를 다 못 가져가게 되자 땅에 묻었다. 금을 갖고 싶으면 내 살길부터 마련해 보게.”
헌병 장교 쇼오류는 오공의 주선으로 족보를 사들였다. 김승룡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신분을 세탁했다.
그리고 지금 앉아 있는 연못이 바로 그 오줌독이다. 지금은 해양심층수 맑은 물이 흘러들게 해 놓았다.
몸을 씻고 가운을 걸친 김회장이 나오자 비서가 급히 들어왔다.
“시찰하시려던 공장에 폭발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인명피해는 조사 중이라고 합니다.”
“완제품 창고 쪽은?”
“다행히 무사하다고 합니다. 기일 내에 납품은 가능하다고 합니다.”
“됐어. 생산라인 신속히 복구하라고 하고. 사상자들 명단 밖으로 새지 않게 기자들 입막음 잘 하라고 해.”
“....... 알겠습니다.”
비서가 나가자 김회장은 소파 깊숙이 몸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사고가 난 낡은 공장이야 보험금이 나올 테고, 이참에 해외로 공장을 옮기면 인건비도 줄이고 잡소리도 없을 테니 차라리 잘 되었지.”
하며 신문을 펼쳐 들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깝북 잠이 들었다.
그 짧은 시간에 꿈을 꾸었다. 김회장은 검은 옷차림의 사내들에게 쫓겨 도망치는 중이었다. 오질 항아리가 있는 집으로 달렸다. 현관의 계단만 오르면 되는데 달랑 서너 칸 있는 계단을 오르지 못했다. 발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데 시커먼 옷의 사내들이 어느새 다가왔다. 시커먼 손톱으로 김회장의 목덜미를 낚아채려는 순간, 노크소리에 잠에서 깼다.
“회장님, 송박사가 왔습니다.”
“들여보내.”
송박사가 죄 지은 사람처럼 들어왔다.
“회장님, 지난번 검진 결과가 나왔습니다.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간암 말기입니다.”
“간암? 1기도 아니고 말기?”
“회장님의 신체나이가 워낙 젊으셔서 그동안 검진 수치상으로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얼마 전 불면증 때문에 스트레스에 심하게 노출 된 것이 갑자기 진행된 이유인 듯합니다. 죄송합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병원장은 처분만 기다렸다.
김회장은 손을 부르르 떨더니 앞에 있는 찻잔을 집어던졌다.
“겨우 이따위 말을 들으려고 자네를 병원장에 앉혀놓은 줄 알아?”
송박사의 이마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이식수술 받으시면 문제없습니다. 맞는 간을 찾아내겠습니다.”
하는 수 없이 김회장은 입원해야 했다. 사지 멀쩡한 몸으로 병원에 누워있어야 하는 것이 몹시도 짜증스러웠다.
박수 오공이 들어왔다.
“저승사자의 추적범위가 점점 조여오고 있습니다. 이 베개를 베고 주무십시오. 고을수가 베고 자던, 전생을 보여주는 베개입니다.”
김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날더러 이 더러운 베개를 베고 자라는 거야?”
“이제 환생을 준비하셔야지요.”
“환생이라니? 지금껏 쌓아올린 이 지위와 재물은 어찌하고?”
“병든 노구의 몸에 갇혀서 재물과 지위가 무슨 소용입니까? 젊고 건강한 새 몸을 얻으셔야지요.”
“젊고 건강한 새 몸이라고?”
“환생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망자의 관 속에 넣고 장사 지내면 원하는 집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나를 현혹하여 이득을 취하려는 것은 아닌가 말이야.”
“불국사를 지었다는 신라시대 김대성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요. 가난한 과부의 아들 대성이 흥륜사에 시주하고 죽어 재상 김문량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절에 시주라도 하라고?”
“신화에 의하면 천계의 서천꽃밭에 다섯 가지 ‘되살이꽃’이 핀다고 합니다. 뼈를 살리는 뼈살이꽃, 살을 살리는 살살이꽃, 피를 살리는 피살이꽃, 그리고 혼을 되살리는 혼살이꽃이지요. 어느 해에 서천꽃밭에 도둑이 들어 ‘되살이꽃’ 씨앗들이 도난당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설악산 오색동에 오색의 꽃이 피는 나무가 있었는데, 바로 되살이 꽃이지요. 그 나무껍질로 실을 자아 짠 비단이 바로 환생포입니다.”
“환생포라........ 그것이 정말 있다는 말인가?”
하고 묻는 김회장의 말투가 상당히 부드러워 졌다.
“오질 항아리가 있는 것처럼 있지요. 회장님이 바로 환생으로 태어난 누군가의 후생입니다. 그러니 이 베개를 베고 전생을 보시면 환생포가 누구의 관 속에 들어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거 솔깃하군. 내 전생의 무덤을 찾아 환생포를 찾으면 금숟가락을 물고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지? 당장 찾아 봐야지.”
김회장은 베개를 머리에 대고 소파 깊숙이 기댔다.
“편히 하십시오. 제가 저승사자의 접근을 막고 있겠습니다.”
김회장은 저승사자라는 말에 겁이나 일어나려 했지만, 베개가 빨아들이는 잠 속으로 뚝 떨어졌다.
꿈속에서 누군가를 보았다.
백작의 옷을 입고 일본왕에게 절을 하는 사람이 보였다. 백작은 일본왕에게서 후작으로 작위를 올려 받았다. 후작이 훈장을 가슴에 주렁주렁 달고서 거울 앞에 섰다.
김회장은 깜짝 놀랐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김회장 자신이었다.
잠에서 깬 김회장은 호탕하게 웃어 재꼈다.
“전생과 이생이 이렇게 호화롭다니, 환생포를 찾으면 다음 생을 결정할 수 있다지 않은가? 다음 생에는 정치인 집안을 고를까? 아니면 검사로 태어날까? 투자귀재? 대통령? 아하하하!”
꿈 얘기를 들은 박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의 전생과 연결이 되었으니 이제 환생포의 위치를 추적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후작의 이름을 알아내십시오.”
김회장은 베개를 베고 다시 꿈속으로 들어갔다.
인력거를 타고 가다가 엎어졌다. 옆구리와 가슴에 칼이 쑥쑥 들어왔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김회장은 가슴을 움켜쥐고 비명을 질렀다. 가슴에 상처하나 없었지만 칼에 찔린 통증으로 괴로워했다.
“진통제!”
의료진들이 다급하게 주사를 놓자 호흡이 진정되는 김회장이었다.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오자 기침을 했다. 한 번 시작한 기침은 몇 십초 간 지속되었다. 다시 의료진이 들러붙어 정밀사진을 찍었다.
“폐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찬바람만 쐬어도 기침이 나고 그치질 않는 거야? 이 돌팔이들아!”
김회장은 손에 잡히는 데로 집어던졌다.
오공의 눈짓에 의료진들이 김회장을 눕혔다. 그사이 송박사는 진정제를 주사했다.
다시 꿈속으로 들어갔다. 칼에 찔린 후작은 일본 의료진의 치료를 받고 살아났다. 폐가 손상되어 기침을 쿨럭쿨럭 하면서도 십오 년을 더 살았다. 어느덧 죽음을 준비하는 시기가 되었다.
후작은 거액을 들여 붉은 비단을 장만하였다. 그리고 남은 전 재산을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사회사업 기부금 명목으로 넘겨주었다.
다음 장면에서 그는 관 속에 누워있었다. 붉은 비단이 시신에 덮이고 관 뚜껑이 닫혔다. 하관이 이어지고 봉분이 올라가고 비석이 세워졌다.
잠에서 깬 김회장은 꿈속에서 본 비석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리고 오공의 귀에다 그 이름을 속삭였다.
오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갔다.
김회장은 오공이 찾아올 환생포에 대한 기대감에 벅찼지만, 또 졸음이 쏟아졌다. 베개 때문인지 약기운 때문인지 도무지 잠을 이길 수가 없었다.
“아버지, 회사 걱정은 마시고 편히 쉬십시오.”
장남이 김회장을 뉘어주며 담요를 다독여 주었다.
“그래, 내 걱정 해 주는 건 너 밖에 없구나.”
며칠 후 돌아온 오공의 보고를 받은 김회장은 실망해야 했다.
“비석에 새겨진 인물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습니다만, 비석 주인의 무덤은 없어졌다고 합니다. 친일파라 비난을 받던 자작의 후손들이 파묘하여 화장하였다는 것입니다.”
김회장은 찻잔을 집어던졌다.
“그럼 이제까지 다 헛짓 한 거야?”
오공은 깨진 이마를 눌러 지혈하며 병실을 나섰다.
오공이 지긋이 웃으며 복도를 지나는데 환자 하나가 병실로 이송되고 있었다. 을수였다. 결국 과로로 쓰러진 모양이었다. 을수의 얼굴은 행복한 꿈을 꾸는 아이처럼 웃고 있었다.
“베개가 없어도 꿈을 꾸는군. 하긴 김회장이 그 베개를 베고 있으니, 이제는 김회장이 저놈의 꿈을 훔치는 건가?”
오공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돌아섰다.
을수가 깨어나지 않자 김회장도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김회장이 깨어나지 않자 장남은 기다렸다는 듯이 회장직을 맡으려 했다. 그러자 두 아우가 반대하고 나섰다.
“아버지 숨이 붙어있는 한 회장 승계는 안 되지요.”
하며 수십대의 의료장비를 연결해 놓았다.
김회장의 머리맡에 선 저승사자들은, 죽지도 살지도 못 하는 미망자를 내려다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김회장은 이제 깨지 않는 꿈을 꾸고 있었다.
채찍이 김회장의 등짝에 휘감겼다.
“요령 피우지 마라! 새 왕이 시찰하러 오신단 말이다.”
김회장은 무거운 돌짐을 메고 비탈을 기어올랐다.
멀리서 나팔소리가 나더니 왕의 수레가 화려한 호위를 받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수레에서 내리는 왕이 바로 을수가 아닌가?
김회장은 그대로 비탈을 내달렸다. 미끄러지고 굴러 수레 앞에 닿아 소리쳤다.
“이 도둑놈아, 내 꿈을 물러내라!”
노역장 감독의 채찍이 김회장의 등에 휘감겼다.
“이놈을 땅속 감옥에 던지고 물 한 모금 주지 마라!”
수레에 오르는 을수를 보며 김회장은 관리자들에 의해 질질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