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버스 판타지 단편소설 1)
조선시대 선비 복색을 한 사내가 넋이 나간 얼굴로 도로 위를 헤매고 있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옷이 물에 젖어 몰골이 형편없다. 차들이 경적을 울려대자 사내는 허둥대다가 트럭에 치이고 만다. 끼이익! 급정거 하는 트럭의 소리가 요란하다.
병원 응급실에서 깨어 난 사내는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간호사들을 곁눈질 하던 정경위는 사내가 깨어나자 다가왔다.
“정신이 드십니까? 몇 가지 질문을 좀 하겠습니다. 이름이 뭡니까?”
“광천 김씨 순정공파 38대 손, 부영이라 하오. 여기가 대체 어디오?”
“여기는 병원 응급실입니다. 김부영씨는 무단횡단 중에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주민등록증 보여주시죠.”
수첩에다 기록하며 정경위는 무단횡단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부영이라는 사내는 허리춤에서 호패를 꺼내 보여주었다.
“장난하지 마시고, 민증 없으면 주민번호라도 대세요.”
“번호라면 과거시험 번호 말이오?”
“지나간 과거 얘기하지 말고 주민등록번호 대요!”
정경위는 사내의 행색과 말투에서 자신의 우위를 확신하자 정중함을 버렸다.
“네 일개 포졸인 듯한데 양반에게 이리 불손 한가? 자네 상관 나오라고 하게.”
기가 막힌 정경위는 들고 있던 수첩과 볼펜을 내렸다.
“이보세요. 양반나리, 어디서 사극 촬영하다 왔나 본데, 촬영장 밖에서까지 양반 행세하시게요? 지금은 1974년 현재 시점이니까 카메라 밖으로 나오세요.”
그때 간호사가 다가왔다.
“정신이 드셨어요?”
“김부영 씨랍니다, 이름이.”
정경위가 표정을 바꾸어 간호사에게 알려주며 자신이 예쁘장한 간호사에게 정보를 줄 수 있다는 것에 만족 해 했다.
간호사는 차트에 이름을 적으며 나이를 물었다.
“남녀가 유별하거늘 아녀자가 함부로 외간 사내의 이름과 나이를 묻다니 이 무슨 해괴한 짓인가?”
간호사는 부영의 얼굴을 살피다가 무언가 기록한다.
“올해가 몇 년도죠?”
“갑오년 아닌가? 여인네 말고 남자 의원을 데려오게.”
부영은 낯선 여인이 빤히 쳐다보는 것이 민망하여 정경위에게 말했다.
부영의 목소리를 들은 의사가 다가왔다. 의사는 차트를 보더니 동공 반응 검사와 청진기 검사, 촉진 몇 가지를 하더니 차트에 몇 글자 써 놓고는 말없이 가버렸다.
간호사는 건네받은 차트를 읽어보고 의사의 뒷모습을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김부영 씨 이상 없습니다. 바로 퇴원하셔도 되겠습니다.”
하고 정경위에게 말하고 자리를 떠나는 것이었다.
“여보세요? 교통사고 환자라고요. 정신도 오락가락하는데 정밀검사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정경위가 항의했지만 의사도 간호사도 못 들은 척 가버렸다.
“무슨 일이야? 정 경위.”
“과장님이 직접 나오셨습니까?”
정경위는 당황하여 경례를 붙였다. 뺑소니 사건도 아니고 피해자가 유명인도 아닌데 형사과장이 직접 사고 피해자를 만나러 온 것이 의아한 정경위였다. 과장은 조용한 복도로 향하고 정경위가 뒤따랐다.
“교통사고 피해자가 깨어났는데 뇌에 이상이 있는지 현재의 시간과 장소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의사가 ‘이상 없음’으로 판명했는지 바로 퇴원하랍니다.”
“그럼 됐지 뭐, 당장 퇴원 수속하고 귀가조치 해.”
“아직 피해자의 신원파악이 안 되어 보호자 연락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피해자는 혼자 귀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판단됩니다.”
“가해자 조사가 끝났네. 음주운전도 아니고 신호위반 사항도 없고, 삼대 기업에서 운전자 신원을 보장했고, 충분한 보상이 있을 걸세.”
“그렇다면 사고 경위서 작성한 후에 귀가조치 하겠습니다.”
소장의 구둣발이 정경위의 정강이에 날아들었다.
“가해차량이 삼대 기업 트럭이야. 해외무역 선두기업의 물류방해로 빚어진 손실이 얼마인지나 알아? 사고조사 한다고 사람 오라 가라 하지 말란 말이야. 서장님 지시야. 이 사고는 일어나지 않은 거야. 알겠어?”
“알겠습니다.”
“피해자 주소 알아내서 귀가조치하고 보고 해.”
과장이 떠나자 정경위는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찌그러진 갓을 쓰고 끈을 매는 부영을 보니 기가 막혔다. 올해가 갑오년이라니, 그래서 아직 단발령의 영향을 받지 않았는지 갓 속에는 상투가 틀어져 있었다. 이런 사내를 어디로 데려다주어야 할지 난감했다.
“광천 김 씨라고 하셨죠?”
정경위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부영을 시장 골목으로 데려갔다. ‘광천 전각’이라는 간판이 걸린 상점이었는데 ‘광천김 씨 종친회’라는 목간판이 세로로 걸려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입구 쪽에 도장을 새기는 사람이 작업대 앞에 앉아 있고, 안쪽으로는 낡은 소파에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어르신들, 안녕하십니까?”
“여어~ 정경위 아니가? 오랜만에 들렀네.”
바둑을 두던 노인들이 정경위를 반겨주었다.
“이 분이 광천 김 씨라고 하십니다. 사고 후유증으로 집 주소를 기억하지 못하니 혹시 아실 수 있을 까요?”
정경위의 설명에 노인들이 시선을 돌려 부영을 살펴보았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종친이라며 들어와 푼돈이나마 얻어가는 일이 잦은 터라 그리 반갑지 않은 표정들이었다.
부영이 공손한 자세로 허리 굽혀 인사했다.
“광천김 씨 종친 어르신 되십니까? 소생은 순정 공파 38대손 김부영이라 합니다.”
“내가 순정 공파 48대손인데, 종친이라 사칭하려면 항렬을 좀 맞춰서 하게. 젊은 사람이 쯧쯧.”
유림의 복색을 한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어르신, 그래도 족보 한번 열람해 보아 주시지요. 이 사람의 가족에 대한 단서가 나올지 압니까?”
정경위가 정중히 청하자 노인은 마지못해 돋보기와 족보책을 꺼냈다.
“음...... 38대라....... 여기 있군. 부자, 영자.......”
부영은 족보책을 뺏다시피 하여 이름을 확인하였다.
“이게 무슨 일이오? 형님의 이름 아래로 4대의 이름이 올라있다니.........”
“기록에 의하면 38대손 차남인 김부영 어른이 과거시험 보러 떠났다가 시험이 끝난 지 석 달이 지나서야 돌아왔다가 다시 집을 나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합니다.”
나이가 제일 많아 보이는 어른은 38대손이라는 부영에게 하게를 써야 할지 합쇼를 써야 할지 난감해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갑오년 5월에 식년문무과전시를 치르고 산골고개를 넘어 집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갑오년 식년시라면 고종 31년인 1894년에 치러진 마지막 과거시험을 말씀하는 게요?”
“마지막 과거시험이라니........ 고종은 또 뉘시오?”
“고종은 철종 다음의 보위를 이으신 임금의 시호 아니오? 조선이 문을 닫은 지가 언제인데.........”
어른은 앞뒤 아는 것 없는 젊은 양반이 안 됐다는 표정으로 말을 줄였다.
정경위가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은 1974년입니다. 갑오년에서 80년 후의 세상입니다.”
정경위의 설명에 놀란 부영은 망연하여 넋을 놓았다. 신선 바둑 구경하다 도끼자루 썩은 듯 세상이 바뀌어 있다니.
“저어~ 어르신들.”
정경위가 어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분이 사고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답니다. 연고자를 찾을 때까지 지낼 만한 갈 곳이 없을까요?”
하니 어른들이 서로 돌아보았다. 유림 복색을 한 어른이 나섰다.
“밤에는 이 사무실이 비니 여기서 지내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렇게 하여 부영은 밤에는 빈 사무실에서 자고 낮에는 바둑 구경을 하거나 공원에 나가 사람 구경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길어지자 종친회에서 정경위를 불러 교통사고 보상문제를 물었다.
“그게 말입니다. 김부영 씨가 주민등록이 안 된 사람이라 사고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그럴 리가 있나? 이 사람은 오래전 실종되었던 7촌 당숙 어른이네. 여기 족보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나? 그러니 이 분의 신분을 회복시켜주게. 사고 트럭이 큰 회사 소속이라던데, 사람을 치어놓고 그리 외면하면 쓰나?”
하자 옆의 노인이 거들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 종친 중에 판사가 있으니 법원에 주민등록에 대해 알아봅시다. 원, 큰 회사에서 없는 사람 무시해도 유분수지 말이야.”
하고 나오니 정경위는 난감해졌다. 윗선에서 묻어버린 사건을 들추게 될 상황이었다.
“이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부영이 과장에게 이 일을 보고하니 과장은 생각 난 듯 서장실로 들어갔다.
며칠 후, ‘경찰서장 추천’으로 부영은 삼대 기업 노동자로 취업하게 되었다. 종친회 사무실에도 새 소파와 탁자가 들어오고 술값이 전달되었다.
부영은 낯선 사람을 따라 어느 창고에 도착했다.
“이리 오쇼. 일을 하려면 기술을 익혀야 하니 잘 보고 연습 하쇼.”
부영은 창고 안에서 납땜 기술을 익혀야 했다. 그동안 신문물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졌건만, 인두에서 튀는 불꽃은 공포 자체였다.
어느 날 창고에 도착한 트럭에서 기사 하나가 차에서 내렸다.
“저 사람을 데려가겠소.”
“아직 숙련되지도 않았는데 벌써요?”
“납땜공이 또 갔어요. 우리야 위에서 시키니 어쩔 수 있나요? 아까운 목숨 또 하나 보내는 거지요.”
운전기사는 부영을 태우고 어디론가 갔다. 부영이 이 사람 저 사람 손에 인계되어 도착한 곳은 바다였다. 높은 철판 위에서 하루 종일 납땜을 해야 했다. 하지만 아직 땜질이 서툰 부영이었다. 옆에서 땜을 하던 사람이 소리쳤다.
“물 버리는 시간이오.”
하면서 바다를 향해 오줌을 누었다. 부영도 참았던 방광을 비워냈다. 이곳에 와 처음으로 느낀 행복감이었다. 말 걸어 준 사람이 있고 배설도 시원하게 했으니 말이다.
옆의 사내는 다시 땜을 하며 말을 붙일 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를 두어 시간 밥이 배달되었다. 식판에 담긴 밥상을 받아 들고 부영은 옆의 사내를 돌아보았다.
“먹어두시오. 식당까지 오가는 시간 아깝다고 친히 가져다주는 밥님인데 황공하게 영접해야지. 이다음 식사는 언제 올지 모르니까 지금 든든히 먹어두시오.”
다음날 출근하는데 경비원들이 막대기를 휘두르며 머리 긴 사람들을 잡아내는 것이었다.
“오늘 회장님 시찰 나오시는데 머리가 이리 길어서 되겠나?”
경비들은 용모가 단정치 않다며 근로자들을 한 줄로 앉히고 이발기로 머리를 밀었다. 상투를 틀어 올린 부영도 단속에 걸렸다.
“어찌 나의 머리를 자르려 하시오? 무례하오.”
“머리를 자르는 게 아니고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거요.”
“부모가 주신 터럭 하나 자르는 것이 머리를 자르는 것이거늘! 물렀거라.”
경비원은 모자를 벗어 다리에다 탁탁 털었다. 경비원의 해병대 머리가 아침햇살에 반짝였다. 경비는 모자를 반듯하게 썼다.
“고종황제가 단발령을 내리고 박대통령 각하께서 바통을 이어받아 내리신 삭발령을 거부해?”
경비원의 구둣발이 부영의 정강이에 날아들었다. 도끼날에 찍히는 통증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엎어진 부영의 머리에 가위가 닿았다. 상투가 뭉텅 잘려 나갔다.
“안 돼!”
부영은 잘린 상투를 안고 뒹굴었다.
옆 사람의 도움으로 작업장에 겨우 올라 온 부영은 치욕감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대로 바다에 뛰어들고 싶었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졌다. 부영의 위 칸에서 작업하던 기술자가 떨어진 것이었다.
“사람이 물에 빠졌다!”
호각 소리가 나고 경비원들이 달려와 바다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물에 빠진 기술자는 이미 숨을 거두었다.
“다들 구경 났나? 어서 작업 계속 해!”
작업반장의 고함이 이어졌다.
“아니 사람이 죽었는데 일을 계속하라니 이 무슨 경우인가?”
부영이 장갑을 벗으며 나서려 하자 옆의 사내가 말렸다.
“소용없소. 그냥 하던 일이나 하시오. 사흘 꼬박 땜질을 하다 보면 졸다가 바다에 떨어지는 일이 다반사이니, 정신 바짝 차리시오.”
“이건 사람의 일이 아니오.”
일어서는 부영을 발견한 작업반장이 곤봉을 휘두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부영은 아침에 걷어차인 정강이의 통증이 되살아나 얼른 작업대에 붙어 섰다.
그날 저녁 부영은 정경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기 사람이 죽었소.”
“사람이 죽다니요? 살인사건이 났다는 말입니까?”
“일꾼이 일하다가 바다에 빠져 죽었소. 그런데 아무 조처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채워 일을 강행시키고 있소. 일꾼들을 때리고 강제로 삭발시키오. 정조대왕께서 수원성 축조하실 때는 이러지 않았소. 인부의 안전을 위해 거중기를 쓰고 인부 하나하나 정당한 몫을 지급하였소.”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그쪽은 저희 관할이 아니라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럼 이쪽 관할 관원을 연결해 주시오.”
“그쪽 관할 경찰을 불러도 아마 소용없을 겁니다.”
“이 사람들을 구제할 방법이 없다는 말이오?”
한참을 망설이던 정경위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시행한 적이 없어 죽은 법이긴 한데....... ‘노동법’이라는 것이 있긴 합니다. 대법전을 뒤져보십시오. 저는 더 이상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노동법이오? 고맙소. 도움이 되었소.”
“조심하십시오, 그 법은 ‘공공연한 금기법’이라 함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럼.........”
정경위는 쫓기는 듯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부영은 서점에 가서 대법전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점원은 그런 책을 들어본 적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여긴 고시 공부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책은 들여놓지 않아요.”
하고 점원이 정리하는 책이라고는 표지가 빨간 책들 뿐이었다.
“헌책방에 가보세요. 거긴 있을지도 모르죠.”
부영은 헌책방을 뒤져 노동법 한 줄을 찾아냈다.
부영은 대법전을 들고 공장으로 찾아가려다 정경위가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하라던 말이 떠올랐다. 금기의 법이라니........
부영은 작업반장의 눈을 피해 옆의 인부에게 찢어 온 책장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대법전에서 찢어 온 낱장인데, 여기를 보게. 노동자의 권리를 법령으로 명시 해 두었네. 저들은 법을 어기고 있는 거야.”
“이런 법도 있었어요?”
놀란 인부는 책장을 받아 품속에 넣으며 주위를 살폈다.
며칠 후, 부영은 근로자들 틈에 서 있었다.
“노동자도 사람이다. 노동자의 작업환경 개선하고, 산업재해 보상하라!”
근로자들은 본사 마당에 서서 소리쳤다.
하지만 회사의 실무자들은 본사 건물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트럭에서 내린 경찰들이 포위하고는 곤봉으로 수박깨기 놀이를 시작하였다. 근로자들은 머리가 깨지고 살이 터져나갔다. 그리고는 트럭에 실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가까스로 트럭을 피한 부영이 몰래 도망하여 공중전화를 걸었다.
“이보오, 정경위. 큰 일 났소. 경찰들이 이리 사람을 개 패듯 해도 되는 것이오? 개·돼지처럼 실어서 어디론가 데려갔으니 조사 좀 해 보시오.”
정경위는 한 참을 말이 없었다. 한 숨을 내쉬더니 대답해왔다.
“그 사람들은 신분이 없어서 죽거나 다쳐도 형사사건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사람이 죽었는데 조사를 할 수 없다니.”
“김부영 씨는 종친회에서 보증을 해서 신분을 만들어드린 겁니다. 지난번에 저랑 손가락에 붉은 인주 찍어서 수첩에다 지장 찍는 연습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저들은 어찌 된 일인지 주민등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나라 국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긴 했죠. 김부영 씨도 주민등록이 되어있지 않아서 교통사고가 민·형사상 고소가 불가능했거든요. 윗선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사고를 덮으려고 했어요. 다행히 광천김 씨 종친회에서 항의서를 제출하는 바람에......... 형사상 책임은 묻지도 못하고 김부영 씨를 삼대 기업에 취업시키는 조건으로 마무리했던 겁니다.”
부영은 수화기를 놓았다. 이 무슨 일인가? 호패가 없으면 사람 취급도 않는단 말인가? 사람 나고 호패 났지, 호패가 나고 사람이 났는가?
그때 낯익은 사내가 본관 사무실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정강이를 차였는지 다리를 절룩거리는 사내의 서류봉투에서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부영이 주워 드니 종이에는 ‘폐기’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여기 이것을 흘렸소.”
하고 부르니 돌아보는 사내는 분명 낯이 익었다.
부영은 오래전에 들었던 사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보시오, 혹 저 집에 기거하시오?”
“그렇소이다만 어찌 그러시오?”
부영의 대답에 사내는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내 늦지 않게 와 다행이오. 실은 저 집에 사는 여인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있어 내 이리 달려왔소.”
“그 여인은 아주 고마운 분이오. 과거시험에 낙방하여 나무에 목을 매려던 나를 살려주고 내 가족들에게도 물질적 도움을 주었소. 나는 그 여인에게 청혼하려고 이리 은비녀를 장만하였다오, 허흠.”
부영이 계면쩍은 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사내가 기겁을 하여 손을 내저었다.
“큰일 나려고 그러시오. 그 여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나 그러시오? 그 여인은 천년 묵은 구렁이요. 짐승이 천년을 살면 요정이 되어 인간의 모습을 취할 수가 있지요. 못 믿겠거든 몰래 담장으로 넘어가 여인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시오.”
“나는 담장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였소. 장부의 약속은 천금의 무게와 같소. 사람을 구렁이라 하여 이간질을 하다니 참으로 방자한 짓이오.”
“사람의 목숨은 그 약속보다 무거워야 할 것이오. 나는 분명 충고하였소.”
하고 사내는 떠나갔다.
사내가 떠나고도 부영은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구십 구일을 함께 지낸 여인이었다. 따뜻한 밥을 지어 주고 뜨거운 목욕물을 데워주고 깨끗이 옷을 빨아준 여인이었다. 그 의리를 저버리다니........ 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정말 그 여인이 구렁이라면........
부영은 자신도 모르게 이미 담장을 넘고 있었다. 그리고 목욕통에 들어앉은 커다란 구렁이의 뒷모습을 보았다. 부영은 정신없이 달려 나오다 개천에 빠지고 말았다.
기억에서 돌아온 부영이 사내를 붙들었다.
“당신이지요? 구렁이 여인의 비밀을 알려준 이가.”
부영을 알아본 사내가 화들짝 놀랐다. 이내 표정을 바꾸어 부영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아하, 선생이군요. 이제 생각이 납니다. 이렇게 만나니 정말 반갑소. 다행히 구렁이에게 당하지 않고 이리 살아있군요. 차라도 한 잔 하면서 지난 일이나 회상해 봅시다.”
사내는 부영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데려갔다.
사내가 데려간 곳에 커다란 트럭이 있었다. 부영은 그 트럭이 낯이 익었다. 대형 탑차에 새겨진 삼대 기업의 문양, 부영은 교통사고가 나던 날 자신을 덮쳐오던 트럭을 떠올렸다. 사내가 트럭 짐칸의 문을 열었다. 어둠 속에 무언가 꿈틀대는 것을 보고 부영이 다가서자 뒷머리에 강한 타격이 전해졌다.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얼굴을 대고 얼마나 엎어져 있었던가? 바닥에서 올라오는 진동에 정신을 차린 부영은 뒷머리의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발끝에 닿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허둥대며 주머니를 뒤졌다. 정경위가 선물로 준 지포라이터를 켜자 부영은 경악했다.
재갈이 물린 사람들이 손을 뒤로 묶인 채 앉아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덫에 걸린 짐승처럼 공포에 질려 있었다. 게다가 멀미에 시달려 토하기까지 했다.
트럭은 외딴곳 창고로 들어갔다. 문을 열어 노동자들을 내리게 하니 부영도 휩쓸려 나왔다. 곤봉을 든 사내들이 양 옆으로 줄지어 서서 지하로 통하는 문으로 소 몰듯이 몰아넣었다.
땅속으로 들어가니 콘크리트로 마감한 현대식 터널이 나타났다. 방독면을 쓴 사내들이 뒤를 후치며 쫓아왔다.
유황냄새가 나는 매캐한 안개 속을 통과하니 옛날 방식의 토굴이 나타났다. 더 이상 사내들은 뒤따라오지 않았다.
이제는 오공 혼자서 노동자들을 인솔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은 매캐한 연기를 마셔서인지 저항하지 못하였다.
토굴을 따라가니 너른 장소가 나오고 여러 개의 감옥에 사람들이 갇혀있었다.
오공은 노동자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매캐한 연기가 들어오더니 노동자들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홀로 정신을 잃지 않은 부영.
“이 보시오, 정신 차리시오.”
흔들어보지만 꿈쩍도 않는다. 문을 밀어보니 열린다.
“내 사람들을 불러오겠소. 조금만 참으시오.”
토굴을 나가는 동안 버려진 호패들이 밟혔다. 하나를 집어 드니 옆에서 일하던 동료의 이름이었다. 주민등록이 없는 사람이라던 정경위의 말이 떠올랐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다.’
동굴 밖으로 나가니 기와집 마당에 조선시대 복색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돌아왔구나, 내가 살던 시대로 돌아왔어.”
부영의 기쁨도 잠시였다.
장정들이 사람들을 한 줄로 세우고 있었다.
“정말이오? 호패를 넘겨주면 군역을 피할 수 있소?”
“눈덩이처럼 불은 고리 빚도 탕감되니 아무 염려 말고 줄을 서시오.”
부영은 숨어서 지켜보다 경악했다.
‘저렇게 노비문서에 이름을 올려 사람 취급도 안 하는 미래로 보내는구나. 내가 오공의 말에 속아 설이를 배신하였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었어.’
부영은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저택을 빠져나갔다. 연신내에 닿으니 설이의 집 담장을 넘었다가 개울에 빠졌던 기억이 났다. 연신내를 건너 설이의 집으로 향했다.
부영은 놀라 주저앉았다. 설이의 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미안하오, 설이에게 용서라도 구해야 하는데........ 모든 것이 내 잘못이오.”
부영은 흙을 움켜쥐고 엎드려 울었다. 부영의 눈물이 땅에 닿자 어둠 속에서 설이가 밥상을 들고 나타났다. 바닥에 왕골자리를 깔고 밥상을 내려놓았다. 설이의 눈빛은 공허했고 초점이 없었다.
부영이 사과했다.
“미안하오. 오공이라는 놈의 말에 넘어가 약속을 어기고 말았소. 너무 놀라 뛰쳐나가다 낙상하여 개천에 빠지고 말았소. 다시 돌아갔으나 ‘부용당’은 보이지 않았다오. 박석고개를 돌고 돌았지만, 부용당은 흔적도 없었다오. 이렇게 부끄러운 핑계를 대고 있구려.”
“다 지난 일이에요. 이제 와 얘기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리 돌아와 주었으니 마지막 저녁이나 드셔요.”
밥상 위에는 말라비틀어진 나물 무침과 식어버린 밥과 국이 있었다. 설이는 이 밥상을 차려놓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부영은 모래 같은 밥과 얼음물 같은 국을 떠먹고 시래기처럼 마른 나물을 씹었다. 아주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밥을 먹는 동안 설이의 얼굴에 핏기가 돌아왔다.
부영이 마지막 밥 한 톨까지 삼키자 설이의 눈빛이 부영의 얼굴을 향했다.
“그날 담장을 뛰어넘는 생원님의 발소리를 들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담장이 내게로 쓰러지는 것 같았습니다.”
“미안하오. 진심을 다해 미안함을 전하오만 이제 와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소?”
부영은 미안함에 고개를 숙였다.
설이가 일어나 부영에게 절을 올렸다.
“다행히 오늘 자시를 넘기지 않아 한 줌 재로 변하는 일은 면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부영이 다가앉으며 설이의 손을 잡았다. 아직 손의 온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너무 늦게 돌아와 면목이 없소. 이 집이 어찌 없어진 것이오? 그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부영의 물음에 설이는 자세를 고쳐 앉아 먼 어둠 속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오공이라는 자는 군역과 고리대금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꼬드겨 노비문서에 이름을 올려 백 년 후의 세상으로 끌고 가 팔고 있습니다. 생원님도 다녀오셨겠지요.”
“그렇소, 그들은 그곳에서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일을 하다 죽으면 어딘가에 버리는데, 그들에게 신분이 없어 발고도 하지 못하는 지경이었소.”
“이 집터는 '시간의 통로' 바로 위쪽이에요. 오공의 일을 막기 위해 이곳에 집을 지었지요. 혼자서는 오공의 악행을 막을 수 없어 생원님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이 점은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아니오.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내가 더 미안한 일이지요. 그대가 이토록 막중한 소임을 감당하는 줄은 미처 몰랐소. 만약 백일의 시간을 채웠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었소?”
설이는 부용의 물음에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백일의 약속을 채우면 저는 용이 되어 오공을 제압할 힘을 갖게 되는 것이었지요. 오공이 생원님을 꼬드겨 약속을 어기게 만든 후에 저는 힘을 잃었고, 오공은 시간의 통로를 막고 있던 이 집을 헐어버렸지요.”
“그놈을 관에 발고하면 어떻겠소? 아니면 다시 집을 지으면 되겠소? 며칠 후면 오공이 사람들을 끌고 땅굴로 들어갈 것이오. 그곳에는 시집 안 간 애기들도 갇혀 있소. 애기들을 술청으로 넘길 모양이오.”
부영의 말에 설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오공에게 뒷돈을 받는 고관대작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새벽닭이 울면 구렁이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는 땅속에 파묻혀 있을 뿐입니다. 다만.......”
설이는 망설이는 표정으로 말을 멈추었다.
“다만, 무엇이오? 내 무슨 일이든 하리다.”
부영이 다그쳐 묻는 동안 첫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설이의 모습이 안개 속에 묻히듯 희미해져 갔다.
“제 입으로 천기를 누설할 수 없습니다. 생원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을 찾아내기 바라요. 생원님은 오공을 막을 수 있습니다.”
설이의 목소리가 바람에 날려가고 설이의 모습도 사라졌다.
부영은 망연하여 허공만 바라보았다. 먹물 같은 밤이 서서히 씻겨나가고 아침 햇살이 부영의 이마에 내려앉았다.
오공은 시집 안 간 애기들을 데리고 땅굴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자를 못 갚아 빚더미에 오른 아비들이 딸들을 기적에라도 올리라고 데려온 것이었다.
오공이 유황냄새나는 연기 속을 통과하다가 단단한 벽에 이마를 부딪쳐 뒤로 나동그라졌다. 연기 속에서 땅굴을 가로막은 바위벽이 나타났다. 시간의 통로가 닫힌 것이었다.
오공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달려간 설이의 집터에 못 보던 사당이 서 있었다. 사당이라 해 봐야 작은 토실에 불과했다. 부영이 그곳에서 향불을 피워 절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사당 안에는 설이의 신위가 모셔져 있었다.
“네 이노옴!”
오공이 달려들다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쳐 튕겨 났다.
부영이 말했다.
“이곳은 구백 아흔 아홉 해 묵은 업왕신의 영역이라 지네는 범접할 수 없는 곳이네.”
“그래? 땅 속은 지네의 영역이지.”
오공은 아름드리 지네로 변하였다. 포클레인 같은 지네 턱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흙이 젖어있어 파기가 수월했다. 구덩이를 파서 사당을 무너뜨릴 작정이었는데, 땅을 파던 지네의 아름드리 몸뚱이가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지네는 손가락만큼 가늘어져 제가 판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부영이 지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백 년 묵은 지네한테 묵은 기름이 좋다 하여 내 준비하였네. 묵은 기름이 닿으면 지네의 몸이 줄어든다더니 효험이 있군. 어떤가? 이제야 제대로 된 지네가 되었네그려.”
기름과 흙에 범벅이 된 지네는 몸을 뒤채다가 개천으로 떨어졌다. 물에 떠내려가며 소리쳤다.
“백 년 후에 다시 돌아올 것이다.”
오공의 절규가 바람에 흩어졌다.
뒷이야기
도장 가게의 문이 열리며 유림 복색의 노인이 지나가는 정경위를 불렀다.
“여보게, 정경위!”
“예 어르신, 안녕하신지요?”
“여기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자네가 꼭 봐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정경위가 도장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광천김 씨 종친회 어른들이 모두 정경위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그들 앞에는 족보책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를 좀 보게. 자네, 우리 선대 어른 중에 김부영이라는 분을 아는가?”
“글쎄요, 우리 선대 어른도 잘 모르는 걸요.”
정경위는 족보책을 들여다보다 깜짝 놀랐다.
김부영 이름 아래 붉은 날인과 추서(追書)가 있었다.
‘은평경찰서 정성국 경위는 연신내를 복개하라.’
“웬 장난이 십니까 들?”
정경위가 싱겁게 웃으며 물었다.
“장난이라니 이 사람아. 이건 광천김 씨 족보 원본이네. 우리도 포쇄(曝曬)하려고 열어보다가 발견한 것이야. 보게, 우리가 써넣으려면 이 만큼의 빈칸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때에도 나무 도장을 찍었답니까?”
말하던 정경위는 무언가 미심쩍어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수첩을 뒤적이다 예전에 부영이 날인 연습을 한 흔적을 찾아냈다.
“돋보기 좀 주십시오.”
정경위는 돋보기로 두 지장을 비교해 보았더니 목도장의 문양이 일치했다.
멍한 정경위 대신 어른들이 묻고 답했다.
“연신내를 복개하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무슨 말이긴, 청계천마냥 시멘트로 덮으라는 말이지.”
“그나저나 오늘 우리가 이리 모인 건 사당에 제사 모시기 위해서 일세. 정경위 자네도 함께 가세나.
어른들이 사당에 술과 떡 한 접시 놓고 간단하게 제를 올렸다. 제문을 읽는 동안 사당의 구석 틈에서 구렁이 한 마리가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