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버스 판타지 단편소설 5)
1928년, 유재준은 이준성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끼리 친구였는데, 재준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재준이 준성의 집에서 일을 도와주고 받는 품삯으로 어머니와 동생을 부양하고 있었다.
어느 날 준성의 집에 육촌 형제인 이수흥이 방문했다. 동료인 유택수와 유남수 형제와 함께였다. 준성의 부친은 이들에게 방을 내어 주었다.
재준은 이 청년들을 흠모하였다. 그들은 독립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곳을 다니는 중이었다. 재준은 그들에게서 독립군 이야기 듣는 시간이 제일 즐거웠다.
“형님, 저도 무관학교에 들어가 독립군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 재준이 너라면 훌륭한 독립군이 될 거다. 너 글은 읽을 줄 아니?”
“그럼요, 제가 얼마나 명필인지 보실래요?”
재준은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어 이름을 써 보였다.
‘독립군 유재준’
“이것이 제 꿈이에요.”
“정말 재준이 명필이구나. 이번에 상해로 건너갈 때 함께 가자꾸나.”
옆에서 지켜보던 준성은 심술이 났다. 수흥 형님이 육촌인 자신보다 머슴살이하는 재준에게 더 관심을 보이는 것에 화가 났다. 그래서 딴지걸이를 했다.
“재준이 너 장작은 다 패고 노닥거리는 거야?”
“내일 다 해 놓을게.”
재준이 엉거주춤하여 대꾸하자 수흥이 재준을 거들었다.
“그래, 오늘 못 하면 내일 하면 되지. 준성이 너는 친구끼리 너무 네일 내일 따지지 말고, 같이 장작도 패고 그래야지 사내라면 말이야. 안 그래?”
수흥이 재준을 편들자 준성은 뱃속이 뒤틀렸다.
“이 만년필은 웬 거니?”
준성이 탐욕스러운 눈으로 만년필을 보며 물었다.
“호연 아씨가 주셨어. 여기 내 이름도 새겨져 있어.”
“호연 아씨? 아버님끼리 정해 두었다던 네 정혼녀 말이니? 낭만적인데.”
하고 택수가 물으니 재준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준성은 호연아씨가 주었다는 만년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호연아씨는 어찌 자신의 마음은 받아주지 않고 재준만을 바라보는지 원망이 앞섰다. 준성은 슬그머니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재준아, 호연 아씨에 대해 좀 더 얘기해 보렴.”
남수가 재준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자 준성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방문을 닫았다. 아무도 자기가 나가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며칠 후, 주재소 습격사건이 터졌다. 일본순사들은 모든 길을 차단하고 독립군을 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밤에 재준은 인기척에 눈을 떴다.
준성이 방에 들어와 벽에 걸린 옷을 더듬고 있는 것이었다.
“준성이구나, 안 자고 뭐해?”
재준은 잠결에 한마디 하고 다시 돌아누웠다. 그런데 준성이 놀란 듯 뛰어나가는 것이 평소와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재준이 일어나보니 재준의 겉옷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옷을 더듬으니 만년필이 없었다.
“설마 준성이가?”
재준은 벌떡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대문이 열려 있었다. 준성이 이 새벽에 어디로 달려간 것일까? 순간 재준은 등줄기를 훑고 지나는 싸한 기운을 느꼈다. 멀리서 호각 소리가 다급하게 밤하늘을 건너다녔다. 재준은 방으로 뛰어 들어가 수흥 일행을 깨웠다.
“형님들, 일어나세요. 순사가 몰려오고 있어요. 어서 도망가세요.”
하지만, 수흥과 택수 형제는 각오한 듯 침착하게 일어나 앉았다. 단정히 앉아 각자의 이부자리를 개키고 옷을 입었다.
“머문 자리는 항상 깨끗이 정리하고 떠나야 한다. 준성이 밀고 한 것이라면 재준 너도 안전하지 못하다.”
하고 세 사람은 재준을 벽장에 밀어 넣고 이불을 쌓아 보이지 않게 했다.
“너는 살아남아 독립군이 되어라.”
수흥과 남수·택수 형제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담장을 뛰어넘는 소리와 순사들의 외침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잠시 후 방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헌병 하나가 군홧발로 방으로 들어왔다. 명찰에는 쇼오류 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 집이 확실해?”
“확실합니다. 여기 친필 서명도 있습니다.”
하고 순사보 최태원이 건넨 종이에는 ‘독립군 유재준’이라고 쓰여 있었다.
재준은 숨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심장이 벽장 밖으로 튀어 나갈 것 같았다.
벌컥 벽장문이 열리더니 칼이 이불 사이로 쑥쑥 들어왔다. 칼끝이 아슬아슬하게 재준의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재준은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밖에서 다급한 외침소리가 났다.
“저쪽이다! 담장을 넘는 놈이 있다!”
그러자 방을 나가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호연은 안방의 반닫이 옷장을 열었다. 옷가지를 꺼내고 바닥의 판자를 들어 올리니 구들장 아래에서 재준이 올라왔다.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 있을 수만은 없어요.”
재준이 한숨을 내쉬자 호연이 다독거렸다.
“집 밖에 감시가 심하니 어쩌겠어요? 하지만, 방법을 찾아 보겠어요.”
재준은 자신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한 호연에게 미안하여 손을 잡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날 밤 재준은 아버지의 유품상자를 열어 아버지를 추억했다. 아버지가 쓰시던 붓과 벼루에서 아버지의 손길이 느껴졌다. 연적에 물을 담아 서탁에 앉았다. 벼루를 갈려고 하니 먹(墨)이 보이지 않았다.
“의지는 하늘을 찌르건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내 처지와 같군.”
답답한 재준은 마당으로 나갔다.
잠시 후 호연이 연적을 들고나왔다.
“이것 보세요. 연적에 씨앗이 들어있었나 봐요.”
하고 내미는 연적에서 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물을 부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싹이 틀까요? 박 씨앗이네요.”
“그래요? 이것을 심으면 흥부네 박처럼 보석이 나올까요?”
재준이 싱거운 농담을 하며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호연은 싹이 튼 씨앗을 화단에 묻어주고 물을 주었다.
다음날 아침 호연이 재준을 흔들어 깨웠다.
마당에 자욱한 안개 속에서 박덩굴이 지붕 위로 뻗어 있었다. 재준이 튕기듯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니 박덩굴은 지붕을 지나 안개를 뚫고 하늘로 뻗어 있는 것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호연이 박덩굴을 만지며 대답을 했다.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가 있지요. 총명부인의 아들 대별과 소별이 아버지를 만나게 해 달라고 보채자 총명부인은 박씨 두 개를 내어 주었지요. 대별과 소별이 박씨를 심어 박덩굴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지요. 형제가 하늘에 닿으니 박덩굴은 천지왕의 용상 뿔에 휘감겨 있더랍니다.”
“되었어요. 이곳을 빠져나갈 길이 열렸어요.”
재준은 채비를 하여 박덩굴을 타고 올랐다.
얼마나 올랐을까. 박덩굴이 바위 끝을 휘감고 있었다. 바위는 절벽과 연결이 되어있었는데 커다란 문이 나 있었다. 문에는 ‘731’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재준은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넓은 동굴 안에는 침상이 줄지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병원인 것 같은데 한쪽에는 짐승 우리 같은 철창이 있었다.
구릉구릉 소리가 나더니 천장이 열리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거인의 손이 들어와 철창 안의 것을 집어 올렸다. 손아귀 밖으로 발버둥 치는 것은 사람의 발이었다.
재준은 입으로 터지려는 비명을 틀어막았다.
거인은 발버둥 치는 사람에게 주사를 놓고 침상에 내려놓았다. 주사를 맞은 사람이 고통스러워 몸을 뒤틀었지만, 거인은 무언가 기록할 뿐이었다. 그리고 거인은 얼음통에서 사람을 꺼내더니 바닥에 떨어뜨렸다. 꽁꽁 언 사람의 몸이 여러 조각으로 깨어졌다. 또 거인은 기록만 할 뿐이었다.
재준은 비명을 참지 못했다.
‘아버지가 이곳에 오셨던 걸까? 그래서 돌아가신 걸까?’
비명을 들은 거인이 이쪽으로 향했다.
재준은 도망쳐 박덩굴을 타고 내려왔다. 거인이 박덩굴을 잡아당기자 고정된 덩굴줄기가 뜯어졌다. 재준은 박덩굴과 함께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한편, 호연은 그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재준이 그대로 떨어지면 목이 부러져 죽고 말 것이다. 호연의 눈에서 불이 켜졌다. 단전에서 기(氣)를 뽑아 올려 정(精)으로 뭉쳤다. 호연의 날숨으로 빠져나온 구슬이 날아 재준의 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날렵한 동작으로 표범 한 마리가 마당에 착지하였다.
담장 너머로 헌병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호연은 재준을 다시 사람으로 되돌릴 시간이 없었다. 헌병들이 대문을 박차고 들어왔을 때, 담장을 넘는 표범 한 마리만 보았을 뿐이었다.
준성이 무시로 호연의 집에 드나들었다.
“아직 재준에게서는 연락이 없소? 순사로부터 재준을 지키려면 그대가 내게 오는 것이 좋을 거요. 재준은 독립군 명단에 올랐기 때문에 돌아올 수 없을 거요.”
호연은 준성의 가증스러운 뺨을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속에서 자꾸만 솟구치는 헛구역질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재준의 아이를 가진 것이오?”
준성은 호연을 노려보고는 대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준성은 주재소 앞에서 한 순사를 보자 반가이 인사했다.
“여~ 최태원, 순사복이 잘 어울리는구나.”
“수흥 일당을 잡는데 공을 세워 순사보에서 이렇게 정식 순사로 특진 되었다. 네가 밀고해 준 덕이다. 그나저나 재준은 언제 독립군이 되었더냐? 너희 집에서 머슴살이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재준의 친필 서명을 보고도 못 믿는 것이냐? 어렸을 때 함께 놀던 동무가 아니다 이제는.”
해방이 되자 최태원은 서류를 위조하였다. 그해에 죽은 독립군 최윤성의 아들로 둔갑하여 반민특위의 고발을 피했다. 그렇게 최태원은 일본순사에서 하루아침에 독립군의 후손이 되었던것이다.
이준성은 반민특위에 고발되어 재판을 받았지만, 최태원의 보증으로 보석된다.
20년 후, 이준성의 아들 여삼이 절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느날 최태원이 찾아왔다.
“나는 네 아버지의 동무다. 네 아버지의 유품 중에 만년필이 있을 것이다. 그 만년필이 주인을 찾아가려 할 것이다. 만년필을 따라가면 한 여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여인에게서 주문서를 빼내고 여우구슬을 빼앗아 삼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