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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낭아 Oct 21. 2024

주문(呪文)을 읽는 자

(옴미버스 판타지 단편소설 6)

            

띨리리야~ 띨리리야~

모처럼 휴일이라 늦잠을 즐기는 의주에게 전화가 왔다. 차기자였다. 의주는 표정부터 일그러졌지만 목소리를 가다듬고 한 음계 올려 잡았다.

“예 선배님, 어쩐 일이에요?”

“어 여기자, 오늘 시간 되지? 사건이 하나 생겼는데 여기자가 좀 가 줄래? 난 오늘 처가에 가야 해서 말이야.”

“무슨 사건인데요?”

“고등학생들이 다쳐서 입원했는데, 뭐 미친 소가 날뛰는 바람에 소발굽에 걷어차였다나 뭐래나....... 아무래도 학교폭력 냄새가 난단 말이야. 취재 갈 수 있지?”

“그럼요, 처가도 시가도 없는 제가 가야죠.”

전화를 끊고 의주는 전화기를 쥐어박을 듯 종주먹을 들이댔다. 그리고는 침대와 합체가 된 몸뚱이를 분리하는 일이 소 한 마리 발골 하는 만큼 고된 일이었다.

원룸빌라 문을 나서 골목길을 꺾어 드는데 승용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길가에 서 있던 폐지 수레에서 종이상자가 쏟아졌다. 폐지 줍던 할머니는 말없이 쏟아진 종이상자를 수레에 주워 담았다. 의주는 그냥 지나치려다가 그놈의 양심에 붙들려 한숨 한 번 내쉬고 돌아섰다.

“할머니 많이 놀라셨죠?”

하고 종이상자를 수레에 주워 담았다. 

“하이고 아가씨가 고맙기도 해라.”

할머니는 뜻밖의 친절에 반색을 했다.

“차 조심 하셔요. 요즘 젊은 애들 중에 어른 공경할 줄 모르는 애들이 있어요.”

의주가 시계를 보며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데 할머니가 손목을 붙들었다.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대접하고 싶은디.......”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사드려야지요. 말씀만도 감사합니다.”

하고 돌아서는데도 할머니는 의주의 손을 놓지 않고 다른 손으로 수레를 뒤져 찾아낸 전단지 한 권을 쥐여준다. 배달음식 주문책자였다.

“여기서 먹고 싶은 거 하나 골라서 먹어요. 요즘 사람 같지 않아 챙겨주는 것이니 부담 갖지 말고.........”

할머니는 자글자글한 주름살을 펼쳐 웃으며 말했다.

의주는 화사하게 웃어야 했다. 전단지의 음식사진이 식권이라도 되는 줄 아는 할머니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웃으며 주문책자를 흔들어 보이고는 다음 모퉁이까지 전속력으로 달렸다.      


의주가 병실 문을 열었더니 남학생 서넛이 후다닥거리며 한 발로 뛰어 제 침대로 돌아가다가 멈추었다. 방문객이 꾀병의 수위를 들켜도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피해 학생 다섯이 병실 하나를 꽉 채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신문사에서 나왔어요. 혹시 도움이 필요 할까 해서요.”

의주는 과일 바구니를 침대 끝에 내려놓았다. 젊은 여자가 들어오니 남학생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날아 와 꽂혔다.

“이게 안녕해 보여요?”

한 아이가 깁스한 팔을 들어 보이며 노려보았다. 일단 기선을 제압하여 주도권을 갖겠다는 투였다. 의주는 기자가 아닌 누나 버전을 택했다.

“어머, 많이 다쳤구나. 아팠어?”

의주가 깁스한 팔에 손을 대니 노려보던 눈을 풀고 창밖으로 돌렸다.

“덕분에 학교도 안가고 좋아요.”

옆 침대의 아이가 장난 섞인 목소리로 말해왔다.

“그나저나 반친구들은 문병 왔다갔니?”

“우리가 학교 안가서 좋아할 놈들이 문병을요?”

아이들은 키득키득 웃으며 한 마디씩 던졌다.

“상처 좀 봐도 되니?”

그랬더니 능글맞게 생긴 학생이 상의를 훌렁 걷어 보였다. 사내다움을 과시하려는 녀석의 행동이 가소로웠다. 녀석의 가슴에 발굽 모양의 멍자국이 있었다. 

“너희들 소 훔치다 걷어차였니?”

“하하핳! 기자 누나가 참 재미있네. 소도둑이란다.”

“너는 소도둑놈처럼 생기긴 했지.”

아이들은 주거니 받거니 장난을 쳤다.

“이게 우스운 상황이냐? 우릴 이 지경으로 만든 한철이 새끼를 어떻게 밟을지나 생각해.”

아까부터 어두운 표정으로 가만히 있던 아이가 이를 갈며 해대자 다른 아이들의 웃음이 뚝 끊겼다.

“친구에게 맞은 거였어?”

의주가 물으니 다들 눈치만 살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의주는 더 이상 취재를 계속할 수 없어 병실을 나왔다. 아이들의 상처는 도저히 친구 한 명에게 맞았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깨어져 있었다. 턱이 빠지고 이빨이 부러지고 갈비뼈가 부러졌고, 가슴에 소발굽 모양의 멍자국이 있었다.

“한철이라는 아이가 소 뒷다리를 들고 휘둘렀나?”     


집으로 돌아온 의주는 배가 고파 냉장고를 열었다. 먹을 만한 것이 없었다. 

“사 가지고 들어올 걸.”

다시 나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까 할머니에게서 받은 주문책이 생각났다. 전단지의 순대국밥 사진을 보며 전화번호를 누르다가 티브이 뉴스에 나오는 기사에 정신이 팔렸다.

“경기도 지역 한우 축사에서 광우병 의심 소가 발견되어 축산 당국이 조사에 착수했다고 합니다.”

“또 바빠지겠네.”

의주는 사건 사고를 반겨야 하는 기자라는 직업에 고개를 흔들며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오니 탁자 위에 순대국밥 한 그릇이 놓여있는 것이었다. 전단지 사진과 똑같은 순대국밥이었다.

“내가 주문전화를 했었나?”

통화기록을 열어보니 통화 내역이 없었다. 띵! 소리와 함께 할머니의 말이 기억났다.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대접하고 싶은디...... 먹고 싶은 거 하나 골라 먹어요.’


다음날, 근처에 사는 대학 동창 다온이 왔다.

“라면 좀 끓여줘.”

다온은 제 집처럼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기다려 봐. 내가 재미있는 거 먹여줄게.”

“재미있는 건 보는 거고, 먹는 건 맛있는 거라고 해야 할 텐데, 기자라면서 목적어와 서술어 조합이 영 안 좋아.”

“시끄럽고, 따라와 봐.”

의주는 탁자에 배달음식 주문책자를 펼쳐놓고 다온의 손을 끌고 욕실로 갔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가 함께 욕실을 쓰는 사이는 아니잖니?”

다온이 몸을 뒤로 빼며 능청을 떨었다.

“손이나 씻어 얼른.”

영문도 모르고 손을 씻은 다온을 끌고 다시 탁자로 갔다.

“어! 이게 웬 국밥이야? 배달원이 소리도 없이 왔다갔나? 너는 나랑 같이 욕실에 있었는데........”

다온이 눈을 비비며 국그릇을 만져보았다. 뜨거운 국물이 김을 퍼 올리고 있었다.

“내가 재미있는 거 먹여준다고 했지?”

“와하하! 전단지 사진에 있는 음식이 소환된 거야? 어떻게 한 거야?”

다온은 국밥을 한 그릇 다 비우고도 허전한지 전단지를 뒤졌다.

“국밥 말고 다른 것도 되나? 치킨 한 마리만 소환해 보자.”

“이제 그만!”     


다음날, 의주가 피해 학생들의 학교로 찾아갔더니 교무실에는 벌써 다른 기자들이 와 있었다. 의주는 한철이라는 학생의 교실로 갔다. 한 아이에게 물으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철이 학교 안 나온 지 일주일 된걸요. 아마 피시방에 숨어 있겠죠.”

“한철이라는 학생은 싸움 잘 하니?”

“싸움이요? 매일 얻어터지는 걸요.”

의주는 아이가 가르쳐 준 피시방에 가보았다. 한 손에 수건을 감고 한 손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아이가 눈에 띄었다.

“이한철?”

혹여나 하고 이름을 불렀더니 아이가 돌아보았다. 의주가 옆자리에 앉아 명함을 한철 앞에 놓았다.

“기자?”

명함을 흘깃 본 한철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조용한데 가서 얘기 좀 할까?”

“할 얘기 없어요.”

한쪽에 라면 먹은 용기랑 과자 껍질이 수북했다. 며칠째 집에도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대여섯 명의 아이들의 뼈를 부수어 놓을 아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혹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렴.”

의주는 그대로 일어섰다.     


며칠 후, 의주는 다온의 원룸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요 며칠 다온이 통 연락이 되지 않았다. 

‘주위에 방황하는 남자들이 이리 많다니.’

의주는 투덜대며 골목으로 접어드니 식당 직원들이 한숨을 내쉬며 얘기 나누고 있었다.

“요새 자꾸 음식이 사라져서 미치겠다.”

“그러게. 주방에서 나온 음식이 순식간에 없어진다니까. 주방에서는 분명 음식 나갔다고 하고......”

“귀신도 울고 나도 울겠다 정말.”

의주는 귀를 의심했다.

‘설마 다온이?’

허름한 빌라 반지하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두드려도 기척이 없었다. 

“김다온, 문 열어!”

옆방의 문이 열리더니 한 사내가 문을 열고 내다본다. 여자 목소리가 나니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었다. 며칠째 안감은 머리를 봐서 별로 외출할 일이 없는 듯한 사내가 말했다.

“그 방에 소리 안 난지 며칠 됐소. 며칠 전엔 도둑이 들었는지 쿵쾅거리며 몸싸움 하더니 그 뒤로 조용하오.”

“경찰에 신고 하셨어요?”

옆방의 사내는 내가 왜? 라는 표정으로 문을 닫고 사라졌다. 

의주는 혹시나 하며 현관문 번호판에 다온의 생일을 입력했다. 문이 열렸다. 현관에는 배달음식 빈 그릇이 쌓여있었다.

“주문책자 훔쳐 간 도둑놈이 여기 있었네.”

의주는 주문책을 잊고 있었는데, 어느새 다온이 가져와 흥청망청 남의 음식을 훔쳐 먹고 있었던 것이다. 방바닥에는 신문지를 깔고 뒹굴었는지 구겨지고 찢어진 신문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신문지 아래에 금괴 하나가 뒹굴고 있었다.

“설마?”

신문에 금괴 사진이 실려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김다온.”

의주는 차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혹시 최근에 금괴도난 사건 신고 된 거 있습니까? ......... 없어요? 예,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아무 일 없어요....... 예에.”      

의주는 주변의 고물상을 뒤져 할머니를 수소문했다. 고물상에서 알려 준 집을 찾아가니 마당 안은 온통 폐지로 뒤덮여 있었다. 거대한 쓰레기 더미 구석에서 할머니가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국밥은 잘 먹었남?”

할머니는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의주를 맞았다.

“할머니는 알고 있었군요. 이게 귀신 들린 전단지라는 것을요.”

“이 전단지를 나누어 준 지 20여 년 만에 너희들을 찾아냈다. 모두들 쓰레기 취급하며 내버리거나 이것을 소환할 능력이 없던 자들이었지. 20년 기다린 보람이 있군.”

“할머니가 주신 이 전단지 때문에 친구가 사라졌다고요.”

“그놈 욕심 때문이야. 신문 사진의 금궤를 훔치다 붙잡힌 것이야.”

할머니는 다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의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아무리 기사를 뒤져도 금궤 도난 기사는 없었어요.”

“그 금궤는 이쪽의 것이 아니야, 왼쪽 땅의 물건이지. 이쪽 오른쪽 땅에서는 아무리 뒤져도 네 친구 못 찾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할머니, 경찰한테 불려 가면 엄청 피곤해 지실 겁니다. 실종신고 들어가기 전에 ........”

의주는 세상 무심한 표정의 할머니를 보며 신문기자의 말투를 멈추었다. 목소리 톤을 낮추어 친절하게 부탁했다.

“할머니, 부탁입니다. 친구를 찾게 도와주세요.”

“조건이 있다. 내가 찾는 물건이 있는데 너희들이 찾아주어야겠다.”

의주는 엄청난 쓰레기 더미를 둘러보았다. 금반지라도 잃어버린 건가?

“찾는 거 도와드릴게요.”

친구들이나 자원봉사 단체의 도움을 빌리면 쓰레기 더미 뒤지는 건 그리 큰일도 아닐 듯하여 의주는 냉큼 대답했다.

“따라오너라.”

할머니는 대문을 나섰다. 의주는 설명도 없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게 아닌가 불안했지만, 다온을 찾으려니 어쩔 수 없었다. 할머니는 고물상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고철과 재활용쓰레기들 사이를 지나 뒷마당의 창고 쪽으로 갔다.

창고 안에서는 백발에 백발수염의 할아버지가 돋보기로 보물인지 고물인지를 감별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잡혀 온 청년을 데리러 왔네.”

할머니의 말에 의주는 의심의 눈초리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이 짜고 다온을 납치한 건가? 

경계가 모호한 백발과 흰 수염 사이로 까만 눈을 반짝이며 노인이 대꾸했다.

“보석금은 가져왔나?”

“얼마를 원하나?”

“네가 가진 주문서(呪文書).”

“주문서라면 여기 있어요.”

의주가 냉큼 전단지를 내놓았다. 백발노인은 눈 끝으로 전단지를 흘겨보았다.

“배달음식 주문책자? 이런 것으로 저 아이들을 꾀어 들인 건가?”

 주문책자를 든 의주의 손이 몹시 부끄럼을 탔다. 할머니는 손에 들고 있던 신문지를 내보였다.

“금괴사진 따위를 신문에 올려놓고 미끼로 써서 그 아이를 데려가 놓고도 나를 비난하니 비겁하기 짝이 없군. 그 아이를 붙잡아 내 주문서를 노리는 것을 모를 줄 아나?”

“아이를 찾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아직 주문서가 완성되지 않았으니 시간을 더 주시오. 마지막 장을 찾아 일을 되돌리면 반드시 주문서를 반환하겠소. 그러려면 그 아이가 필요하오.”

“오른쪽 땅에 흩어져 있는 주술문(呪術文)을 모아들일 시간을 주겠다. 대신 담보를 내어놓아야 한다.”

“맘대로 하게.”

그러자 고물상 노인은 고서적을 펼쳐놓고 무언가 중얼거렸다. 거대한 스캐너에서 쏘는 빛처럼 한 줄기 섬광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갑작스런 섬광에 잠시 시력을 잃었다가 둘러보니 주위가 캄캄한 것이 어느 동굴 속이었다. 

의주는 한기를 느끼며 오소소 떨었다. 

‘두 노인네가 아까부터 전래동화 구연을 하더니, 도대체 무슨 술수를 부리는 거야? 이젠 나를 땅속에 묻으려나? 친구 찾으려다 신문에 실종기사로 실리는 거 아냐?’

별별 생각이 다 드는 의주의 눈에 웅크리고 있는 시커먼 그림자가 보였다.  그림자가 벌떡 일어섰다.

“의주야! 나 구하러 온 거 맞지?”

다온이 눈물 그렁그렁한 얼굴로 의주를 반겼다. 손발에 쇠사슬을 감고 동굴 벽에 묶여 있는 모습이 무협 영화에서 무공을 봉인 당한 무림고수 같았다. 

“김다온,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의주는 쇠사슬을 잡아당겼지만 동굴 벽에 박힌 쇠사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 경찰에 전화를 걸었지만 먹통이었다.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친절한 언니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의주는 전화기를 때리며 수신위치를 찾으려 애를 썼다.

백발노인이 헛기침을 한 번 하니 동굴 벽에서 대게 만 한 거미가 나타나 쇠사슬을 타고 다가왔다. 다온이 놀라 쇠사슬을 마구 흔들었더니 거미가 바닥에 떨어졌다.

“가만!”

백발노인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다온을 제지했다. 다온의 몸이 굳었는지 더 이상 몸부림을 칠 수 없었다. 거미가 다온의 다리를 타고 어깨에 올라서서, 팔 쪽으로 가려다가 고개를 돌려 막대기 같은 뒷다리로 다온의 뺨을 후려쳤다. 그러고는 만족한 듯 손목 쪽으로 기어가 차꼬 구멍에 발을 넣었다.

철커덕 소리와 함께 다온이 풀려났다. 의주는 비틀거리는 다온을 부축하며 등짝을 후려쳤다.

“그러게 작작 좀 처먹지. 너 때문에 배달하시는 분들 손해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 게다가 금괴까지 손을 대? 사탕 깨기 게임이라도 하려고?”

“그만 때려~ 거미한테 맞은 것도 분한데~ 여기 너무 무서워. 변호사 좀 불러 줘어~”

다온은 징징거리기까지 했다. 

백발노인이 할머니를 향해 돌아섰다.

“저 아이를 데려가도 좋다. 다만, 주문서를 완성해서 가져올 때까지 담보로 너를 묶어야겠다.”

헛기침을 한 번 더 하니 거미가 차꼬를 할머니의 발목에 채웠다. 할머니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인을 노려보았다.

연기가 뭉실뭉실 나더니 어느새 고물상 창고였다. 

다온은 주위의 쇠막대기 하나를 주워 들고 의주에게 소리쳤다.

“경찰 불러! 나를 납치 감금한 자들이야.”

그러는 사이 할머니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다온은 배달 오토바이에 쫓겨 골목을 달리고 있었다. 옆 골목에서 튀어나온 오토바이가 다온의 앞길을 막았다. 사방 골목에서 달려 온 오토바이가 다온을 에워싸고 올가미를 던져 목을 걸었다. 다온은 도망치려 몸부림치다가 목에 걸린 올가미에 숨이 막혀왔다.

띨띨아~ 띨띨아~~ 

전화소리에 꿈에서 깨어났다. 잠을 깨운 전화기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

“다온이니? 할머니가 깨어나셨어.”

“응.”

“응급실에서 병실로 옮겼으니까 찾아오기 쉬울 거야.”

“나 바빠.”

“그 동굴 감옥에서 너를 풀려나오게 해준 분이셔. 넌 갚아야 할 빚이 있어. 할머니 쓰러졌을 때 내빼서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병문안도 안 오겠다고? 냉큼 튀어오지 않으면 네가 음식 훔쳐다 먹은 식당에 전화할 거야. 네 손모가지 노리는 사람들 많더라.”

다온은 전화를 끊었다. 그 컴컴한 동굴에서 나온 다음 할머니가 쓰러져 구급차가 다녀가고, 다온은 경찰을 불렀었다. 하지만, 고물상 창고 안에서 동굴을 찾을 수 없었던 경찰은 납치·감금을 주장하는 다온의 신고를 허위신고로 처리했다. 억울해서 환장하겠는 다온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 난 건지 알아는 봐야 했다.

삼십 분 후 다온이 병실문을 두드렸다. 미안한 표정인지 불만한 표정인지 모를 얼굴로 병실에 들어가지도 않고 미적거렸다.

“잠을 잘 수가 없어.”

“병문안 와서 네 아픈 소리를 해? 그 백발할아버지가 한 말 기억 안나? 너 대신 할머니를 묶어놓겠다고 했어. 그래서 할머니가 이 고생이셔.”

“발에 묶었다는 쇠사슬은 보이지도 않는데 뭔 꾀병이시래? 도대체 그 백발 노인네는 정체가 뭐래?”

하고 뻗대는 다온을 끌고 병실로 들였다. 

“잠을 못 잔다고?”

할머니는 다온을 보더니 서랍에서 안경을 꺼내주었다.

“이 안경을 껴 보아라. 테 안쪽에 호랑이 눈썹을 넣었단다.”

다온이 들은 척도 안 하니 의주가 안경을 받아 껴 보았다. 의주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얼른 안경을 벗어 감추었다.

“뭔데?”

“아냐, 모르는 게 나아.”

다온이 안경을 빼앗아 꼈다. 안경 너머로 아까는 안 보이던 쇠사슬이 할머니 발목에 감겨 있었다. 

“안 보는 게 좋다니까.”

의주가 말리는데 할머니는 친절하게도 손거울을 내주었다. 다온은 손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는 경악했다. 다온의 목에 동굴에서 차고 있던 차꼬가 그대로 감겨있었던 것이다.

“그 차꼬는 이 안경을 통해서만 보이는 ‘왼쪽 땅’의 물건이란다. 네 벌은 주문서를 완성해서 반납해야만 풀리게 되어있어. 잠자리가 좀 사나울 게다.”

다온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이러니 잠을 잘 수가 있겠어? 난 이제 어떻게 해? 취직도 해야 하는데.”

“너무 염려 마. 사람들 눈엔 안 보여.”

의주가 위로랍시고 한 말이었다.

“그 노인네가 주문서를 돌려받기 위해 우리를 옭아매어 놓은 것이다만, 언젠가는 너희들이 주문서를 찾아내겠지. 그러면 풀려 날 거란다. 너희는 아직 젊으니까 주문서를 찾을 시간은 많아.”

할머니가 위로랍시고 한 말이었다. 

“대체 주문서라는 게 뭔데 자꾸 찾아내라는 거예요?”

“그렇지, 이제 그것에 대해 궁금해 졌으니 얘기를 해 주어도 되겠군.”

할머니는 자세를 고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황팔도라는 사람이 있었지. 어미가 병이 들어 노루 간 100개를 먹어야 병이 낫는 다는 말에 그 아들이 산신에게 빌었지. 산신에게서 얻은 변신주문책으로 호랑이로 변하여 노루 백 마리를 사냥하다 피맛을 알게 되었고, 결국은 인간으로 돌아오지 못 했다는 얘기는 너무 유명해서 다들 알고 있겠지?”

할머니는 다 큰 사람들 앉혀놓고 전래동화 구연하는 것이 재미있는 건지 놀리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전래동화에 나오는 그 주문서를 우리더러 찾으라는 말씀이신가요?”

다온이 장난으로 물으니 할머니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치매 할머니잖아!”

다온이 화를 내며 일어서는데 티브이 화면에 너무 귀여운 아기곰이 보였다. 킥보드를 타는 아기곰이라니........

“난 동물원이라는 시설이 너무 싫다.”

하고 할머니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의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할머니 소지품에서 동물원 입장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의주는 다른 침상의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채널을 바꾸었다. 할머니가 말을 계속했다.

“짐승과 인간 사이에는 적절한 거리와 견제가 필요해.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짐승들 사는 땅을 침범해 몰아내더니 인간들이 하는 짓을 보아라. 저리 좁은 곳에다 피가 펄펄 끓는 야생의 생명을 가두어두고 냉동고기를 주며 사람들 앞에서 굴욕감을 안겨주고 있지 않니? 인간이 승리감으로 으스대는 포로 전시장이지 않느냐?”

“괴로워하는 인간을 옆에다 두고 짐승에 대한 연민이라니요.”

다온이 으르릉 거렸다.

“우리나라에 맹수들이 멸종한 이유를 아느냐?” 

“그야 일제 강점기에 일본 총독부가 ‘해수구제사업’라는 명목으로 .......”

다온이 아는 척을 하려는데 할머니가 끊고 들어왔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군들이 호랑이나 표범으로 변신하여 국경을 넘나들었다. 그 정보가 밀정에 의해 일본경찰에 넘겨졌다. 내 아버지가 표범으로 변신하여 국경을 넘다가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동물원에 갇혔다.”

다온은 의주에게 곁눈질하며 ‘치매 할머니 맞잖아’라며 소리 없이 말을 했고, 할머니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왼쪽 땅의 ‘신물창고(神物倉庫)’에서 주문서를 훔쳐냈다. 하지만 고대 문자로 씌어 있어 주문을 읽는 게 매우 더뎠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주문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세상의 쓰레기를 뒤져 주문서 낱장을 찾아 모았다. 거의 완성되었지만, 마지막 한 장을 찾지 못 했다....... 미안하지만, 너희들이 그것을 좀 찾아주겠니?”

의주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알아들으려고 애라도 썼지만, 다온은 귓등을 접고 돌아섰다.

“잠을 설쳤더니 피곤하네. 나는 가서 잠 좀 자야겠어.”

“꿈속에서 밤새 쫓겨 다닐 텐데........”

할머니가 혀를 차며 한 마디 던졌다.     



의주가 할머니 집 대문을 여는 동안 다온은 옆에서 뻗대었다.

“치매 걸린 노인네 말을 믿어? 구전설화랑 현실이랑 구별을 못 한다고. 이런 쓰레기장 같은 집엔 안 들어갈래.”

의주는 다온의 귀때기를 꼬집어 끌고 들어가고 싶어 하는 오른손을 힘주어 붙들어야 했다.

“골동품이라도 나올지 알아?”

애써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꼬드겼다. 다온은 골동품이라는 말에 입맛을 다시며 대문으로 들어섰다.

파지가 잔뜩 쌓인 마당을 지나 낡은 한옥의 대청 문을 열었다. 대청마루에도 종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정말 세상의 종이들을 다 뒤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마룻바닥은 군데군데 푹푹 꺼져있고 디딜 때마다 앓는 소리를 냈다. 

안방 안 서류더미를 헤치니 오동나무 전통장이 나타났다. 서랍에는 동물원 입장권이 한 다발이나 나왔다. 

“이것 좀 봐. 창경궁이 동물원으로 쓰이던 때의 입장권도 있어. 호랑이와 표범을 보면서 아버지를 추억했나 봐.”

“너 정말 그 말을 믿어? 그 머시냐? ‘애정결핍증 동물애호가’ 일 뿐이야. 표범을 아버지라고 믿는 망상자라고.”

여태 뚱한 표정의 다온이 혀를 걷어차더니 돈상자를 발견하고는 호들갑을 떨었다.

“오호! 이 지폐 좀 봐. 은행에 넣지도 않고 여기다 모아놨어. 구권화폐도 있는데.”

의주는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다온의 손목을 지그시 잡고 전단지를 내주었다.

“할머니가 네가 땡겨 먹은 밥값은 내주신다고 했으니........”

다온의 흥분지수가 한 칸 내려갔다. 다온은 그동안 몰래 먹은 음식값을 계산해서 전단지 사이사이에 넣고 닫았다. 잠시 후 빛이 한 번 반짝이더니 돈이 사라지고 없었다.

“정말 할머니 말씀대로 음식값이 지불 되네. 배달 앱보다 간편한걸.”

의주는 신기해서 어쩔 줄 모르고, 다온은 돈상자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의주가 소리 나게 상자를 닫았다. 

“할머니께 감사 인사 꼭 드려라.”

의주는 나머지 돈을 은행에 가져가 환전하여 병원비를 지불하고, 할머니를 퇴원시켰다. 그동안에도 다온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며칠 후, 의주는 과천 동물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육사 사무실에 가서 표범 담장자 중에 제일 오래 근무한 사육사를 만나고 싶다고 하니 나이 지긋한 여자사육사에게 안내 되었다. 사육사는 작은방에서 아기표범에게 젖병을 물리고 있었다.

“어미가 밀쳐 낸 막내인데, 오래 못 살 것 같아요.”

손을 씻으며 사육사가 인사를 대신했다.

“제일 오래 일한 사람을 찾는다고? 궁금한 게 뭔가요?”

의주의 명함을 받아 든 사육사가 친절하게 물었다.

“이곳에 장수 표범이 있지요? 창경궁이 동물원으로 쓰이던 시절부터 있던 표범 말이에요.”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사육사는 살짝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아는 할머니 부탁을 받았어요. 못 오시게 되어 장수표범이 잘 있는지 보아달라고 해서요.”

하고 의주는 할머니의 동물원 출입증을 보여주었다.

“아, 호임 할머니, 요즘 뜸하시더니 편찮으신가요?”

“다리가 불편하셔서 예전만큼의 기동성이 없을 뿐 나쁜 상태는 아니에요.”

사육사는 한동안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비공개로 보호하는 표범이 있긴 합니다. 제가 입사했을 때도 있었으니 제가 본 세월만 해도 35년이 되네요. 남자를 극도로 두려워해서 남자 사육사는 근처에도 못 가고 내가 전담해야 했어요. 덕분에 나는 산후조리도 못 해봤다오. 내 아들과 함께 한 시간보다 표범과 함께 한 시간이 더 많다고, 아들이 종종 투정을 했지요. 좀 있으면 정년인데, 할배표범 때문에 걱정이에요........ 호임 할머니는 한 달에 한 번은 찾아왔어요. 장수 표범 앞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듯 정답게 앉아있다 가곤 했지요. 84년에 이곳 과천으로 동물원을 이전하면서 도움을 받았어요. 장수 표범이 이동용 우리에 들어가기를 거부를 해서 애를 먹었는데, 호임 할머니가 달래주었거든요. 그 뒤로도 주사를 맞히거나 치료해야 할 때마다 할머니의 도움을 받고 있어요.”

의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물었다.

“장수 표범이 남자 사육자를 꺼리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그러니까........ 일제강점기 말에 전쟁 상황이 심상치 않게 되자 맹수들을 독살시키기로 결정 했다고 하더군요. 고기에 독을 넣었더니 다른 동물들은 먹고 죽었는데, 그 표범은 먹지를 않더랍니다. 급기야 일본인 사육사를 공격해서 헌병경찰이 장도로 찔렀는데, 등에 칼이 박힌 채로 공격해서 헌병경찰도 도망갔다고 합니다. 내실로 들어간 표범의 생사를 사육사조차 확인하지 못 했는데, 2주 후에 표범이 내실 밖으로 나왔더랍니다. 장도는 녹이 슨 채로 내실에서 뒹굴고 있었고요.”

사육사의 이야기에 의주의 눈이 커져 갔다. 사육사가 일어섰다.

“장수 표범이 요즘 기력이 많이 쇠하여졌어요. 놀랄까 봐 노출을 제한하고 있으니 양해 바랍니다.”

“이해합니다. 말씀 들은 것만으로 많은 도움 되었습니다.”

동물원을 나서는 의주는, 동물원 정문이 마치 동화책 표지 같기도 하고 호임 할머니 사연이 전래동화 같기도 한 것이 정신이 없었다.     

띨띠리야~ 띨띠리야~

“이 빌어먹을 전화음을 바꿔야 하는데, 매번 욕먹는 기분이라니.”

제 게으름을 탓하며 모르는 번호가 뜨는 전화를 받았더니 한철이었다.

의주는 한철이 있다는 장소로 달려갔다. 재개발 지역의 철거예정 건물에 숨어 있다고 했다. 

한철은 담요로 온몸을 휘감고 떨고 있다가 소리가 나자 몸을 일으키려 했다.

“괜찮아, 기자 누나야, 네가 전화했었지?”

의주는 핫초코 잔을 내밀었다. 한철은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한 손을 담요에서 꺼내어 컵을 받았다.

“조심해, 뜨거워.”

한철이 따뜻한 음료를 몇 모금 마시자 이내 떠는 것이 멈추었다. 의주는 한철이 음료를 다 마시도록 아무 말 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한참 후, 한철은 입을 열어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했다.  

   

고등학생 한철은 신발장에서 아버지의 구두를 꺼내 가방에 넣었다. 한철이 어둠을 뚫고 도착한 곳은 아파트 공사장이었다. 드럼통에 불을 피우고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이 있었다.

“이제 오면 어떡해? 술은 가져왔어?”

한철은 위스키병을 모래더미에 던졌다. 한 아이가 노려보다가 술병을 집었다.

“네 아버지 비싼 술만 드시는구나.”

위스키 병을 열어 한ㅍ모금 들이킨 아이가 그대로 뱉어낸다.

“뭐야! 물이잖아.”

“내가 다 마셨다. 이 새끼들아.”

대답하는 한철의 눈이 벌겋다.

“이 새끼가 오늘 하루 안 맞았다고 간뎅이가 부어오르네.”

아이의 발이 한철의 복부에 날아들었다. 뒤로 넘어진 한철은 가방에서 아버지 구두를 꺼내 신는다.

“이게 소가죽 구두거든.”

“그래서 아버지 구두 자랑이라도 하게?”

아이들은 일어서서 한철을 에워쌌다.

“그리고 여기 아주 재미있는 음성파일이 있는데 들어볼래?”

“야한 소설이라도 들려주려고?”

아이들이 팔짱을 끼고 한철의 하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한철이 휴대폰의 파일을 재생시켰다. 이상한 중얼거림이 들리더니 땅에서 연기가 풀풀 피어났다. 연기 속에서 퍽퍽 소리가 나며 아이들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한철은 이야기를 마치고 울었다. 의주는 고개를 갸웃해야 했다.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들을 한 방에 때려눕힌 사내아이답지 않게 눈물이라니, 미안해서 그러나?

“내 손발이........ 돌아오질 않아요.”

하고 담요를 걷어 내보인 한철의 왼손과 두 발이 소발굽으로 변해 있었다.  


        

다온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손에는 치킨 봉지가 들려있다. 

상가건물 사이에 꾀죄죄한 강아지 한 마리가 다온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다온은 강아지가 따라붙을까 봐 못 본 척 집으로 왔다.

맥주와 치킨을 먹고 알딸딸해진 다온은 책상에 흩어져 있던 고문서를 집어 들었다. 호임 할머니 집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빼돌렸는데, 그 안에 들어있던 문서였다. 고서적 사이에서 서울대학교 합격증서가 나왔다. 합격자의 이름은 유호임, 1966년도가 찍혀있었다. 

“오호, 할머니 고학력자시네. 의왼데.”

호임 할머니의 일기장도 있었다. 일기장에는 이여삼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이여삼이라면, 학부 때 민속학 교재로 쓰였던 책의 저자였는데.........”

3학년 때던가? 민속학 교수님이 수업 중에 해주던 얘기가 떠올랐다. 

“내가 이 논문의 저자 이여삼 교수님 수업을 직접 들었거든. 수업시간에 졸리다 싶으면 가끔 우스갯소리를 해 주셨는데, 대학원 때 논문이 진전이 없어 답답해하다가 한 여인을 만나셨대. 여인과 입맞춤하다가 여인의 입에 있던 구슬을 삼켰는데, 눈이 밝아지고 머리가 맑아져 논문이 저절로 써졌다고 하셨어. 그 얘기를 하시면 학생들의 눈빛이 반짝거렸거든. 그리곤 말씀 하셨지. ‘나는 여우구슬을 삼켜 눈이 밝아졌기 때문에 너희들 속을 다 꿰뚫어 볼 수 있다’ 하고.”

그런 사람의 이름이 폐지 줍는 할머니의 일기장에 적혀 있다니 다온은 적잖이 놀랐다.

“설화로만 여겼는데, 할머니와 관련된 이야기인가?”

다온은 흥미를 느껴 읽어보았다.   

       

1968년 4월 1일.

주술문 해독에 대한 단서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연구에 진전이 없어 힘들어하던 내게 여삼이 다가왔다. 여삼은 내가 쩔쩔매는 구절을 쉽게 해석해 주었다.    

  

1968년 4월 6일

여삼의 해석 능력은 탁월했다. 여삼이 해석 한 문서의 내용을 주제별로 분류하여 조합 하면, 해제주문이 완성될 것이다. 여삼은 참 고마운 사람이다.     


1968년 4월 11일

여삼에게 다른 문서를 넘겨주었다. 그동안 해석한 내용을 보여 달라고 했더니 여삼은 다 완성되면 보여주겠다고 했다. 깜빡이지도 않고 바라보는 여삼의 눈빛에 신뢰감을 느껴 나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1968년 4월 30일

여삼에게 마지막 문서를 건네준 것 같은데, 그 장면이 꿈속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가물가물하다. 어제였던가? 나는 왜 여삼의 가슴을 떠밀어내고 뺨을 때렸을까? 내 입술은 왜 이리 터져 있는 것일까? 무언가가 내 머릿속을 지워낸 것 같아 고통스럽다.          



그 뒷장부터는 뜯어낸 흔적이 있었다.

“이게 그 고문서인가?”

낡은 서책에는 중세 한글이 적혀 있었다. 다온은 더듬거리며 한 글자 한 글자 소리내어 읽어보았다. 

그 소리를 반지하 창문 밖에서 꾀죄죄한 강아지가 듣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뜬 다온은 목에 채워진 차꼬의 무게를 절감하며 몸을 일으켰다. 대충 물을 묻혀 씻고 지옥문 같은 현관문을 열고 출근을 한다. 

종일 두세 개의 아르바이트를 뛰고 녹초가 된 다온은 세상의 유일한 피난처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이 제일 행복했다. 어제 남긴 치킨을 먹을 생각에 신이 나서 자취방의 문을 열었다. 

맙소사, 이게 웬일인가? 자취방이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바닥에는 물이 뚝뚝 떨어져 있고 수건은 걸레처럼 나뒹굴었다. 옷장 서랍은 칸칸이 계단처럼 열려 있고 치킨 뼈가 바닥에 뒹굴었다. 

“이 고양이 시키!”

다온은 덫을 만들었다. 뚜껑이 빙글 도는 휴지통 꼭대기에 소시지를 올려놓고 출근하는 척했다. 도둑고양이가 소시지를 먹으려다 미끄러져 쓰레기통에 갇히는 상상을 하며 골목을 두어 바퀴 돌았다.

그리고 벌컥 현관문을 열었다. 휴지통 뚜껑의 소시지가 보이지 않았다. 승리감에 취한 다온은 휴지통 뚜껑을 살짝 열어보았다. 미확인 생명체가 쪼그려 앉아 소시지를 먹고 있었다. 그 생명체가 고개를 들어 다온과 눈이 마주쳤다.

다온은 눈을 비볐다. 바비인형이 움직이다니. 맙소사! 그것은 바비인형 만 한 인간이었다. 

“넌 뭐냐?”

“나 기억 안 나? 길에서 만났잖아.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더라. 뒤따라와서 창밖에서 떨고 있는데, 네가 변신 주문을 읊더라.”

“변신 주문?”

다온은 며칠 전 밤에 고문서 읽은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꾀죄죄한 강아지도 기억났다.

“그럼 네가 구미호라도 된다는 거야?”

“네 주문이 신통찮아서 크기가 요모양이다만, 오백 년 묵은 여우인 건 맞다.”

하며 휴지통에서 풀쩍 뛰어올라 체조선수처럼 재주를 넘으며 착지했다. 

“난 엄마를 찾으러 왔다. 엄마를 찾으면 돌아갈 거니까 그때까지만 신세 좀 지자.”

“누구 맘대로. 당장 나가시지.”

“쫓아내 보던가.”

다온이 팔뚝 만 한 구미호를 붙잡으려 했지만 어찌나 빠른지 옷자락도 건들지 못했다.

“어? 그 옷은........”

의주가 다온에게 선물해 준 곰인형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이었다. 곰인형은 옷을 빼앗긴 채 널브러져 있었다.

“의주한테 또 등짝 맞게 생겼다.”

“내 이름은 보라야.”

“네 이름 따위 관심 없거든.”

다온은 불편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청객이라 주장하는 반의 반토막짜리 여자 불청객과 함께 한 공간에서 지내려니 옷을 마음대로 갈아입을 수가 있나, 먹성은 얼마나 좋은지 다온의 밥까지 먹어 치웠다. 

“구미호 퇴치에는 강아지가 약이지!”

다온은 사납다는 친구네 강아지를 데려와 구미호와 함께 두고 출근했다. 그리고 구미호가 도망쳤겠지 하는 기대로 현관문을 열었다. 

웬걸? 그 여우 인간은 강아지를 말처럼 타고 있었다. 강아지에게 명령도 내렸다.

“앉아!.......... 기다려!”

강아지의 등에서 내려선 보라가 다온의 간식을 다 빼앗아 먹는 동안 강아지는 그 옆에 얌전히도 앉아있었다.

“도대체 강아지한테 어떻게 한 거야? 저놈은 주인도 문다던데.”

“여자친구 한테 환심 사는 법을 알려줬더니 얌전해지더구먼.”

“너, 강아지랑 말도 통해?”

“내가 여우인 거 잊었어?”

“넌 뭐가 제일 무섭니?”

“글쎄 이 땅에 뭐가 있는지 몰라서....... 내가 아는 이름 중에는 ‘어린이’가 제일 무서운 것 같아. 약통마다 ‘어린이 손에 닿지 않게 보관하세요’ 라고 쓰여 있는 게 영 수상하단 말이야.”

다온은 손뼉을 쳤다. 선배네 집에 9개월짜리 아들이 있다. 마침 선배 아내가 외출해서 혼자 아기를 보고 있단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하고 보라를 가방에 넣어 선배네 집으로 갔다. 아기가 작은방에서 빽빽 울고 있었다.

“내가 아기 달래 줄게요.”

하며 아기방으로 들어가 보라를 방출했다.

빽빽 울던 아기는 보라를 보더니 앙금앙금 기어 왔다.

“앉아, 기다려!”

보라가 손바닥을 내보이며 명령을 했지만, 아기는 히죽거리며 달려들었다. 보라의 눈에는 코뿔소가 달려오는 것 같았다. 아기는 보라의 머리채를 잡아 입으로 가져갔다. 천하의 망나니 보라도 9개월짜리 아기의 손아귀는 벗어나지 못했다. 얼굴이며 머리카락이 온통 침범벅이 된 보라가 다온에게 백기를 들었다.

“네 간식 안 뺏어 먹을게. 어질지도 않고 얌전히 있을 게에~~”

“진즉에 그럴 것이지.”

다온은 야비한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젖병을 내밀었다. 보라는 젖병을 안아 들고 아기의 입에다 대어주었다. 아기가 벌렁 누워 젖병을 빠는 동안, 보라는 한 아름이나 되는 젖병을 안고 각도를 맞추어 주어야 했다.

다온은 세상 편한 자세로 기대어 앉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 참에 애 보는 아르바이트나 할까? 쪼끄만 유모가 애를 참 잘 보네.”      


    

의주는 취재 중이었다. 

떠오르는 젊은 기업가들의 성공비결과 경영이념 등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기획특집으로 이번 회는 삼대기업 편이었다. 삼대산업은 모피산업을 기반으로 하여 의류산업의 대표기업으로 성장한 회사였다. 이치수 사장은 삼대산업의 대표이사였다.

“그러니까 우리 삼대산업은 인간을 위한, 인간의 만족을 위한, 인간의 행복을 위한다는 경영이념을 지향하며, 절대 우리의 자연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모피제품을 만드는 밍크를 남획한다거나 철창에 가두어 사육하지 않습니다. 인간계와 자연계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는 방법으로 모피를 공급하고 가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인터넷에 여우농장과 담비농장의 열악한 사육환경에 대해 말이 많던데, 삼대산업은 어떻게 모피를 공급받고 있습니까?”

“그건 회사비밀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삼대모피 의류회사는 가혹한 사육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기 삼대산업이 기부한 내용을 기록한 것입니다. 기부 내용을 부곽시켜 다뤄주시죠.”

의주가 서류를 받아 들고 일어서다가 장식장에 세워져 있는 작은 액자를 발견하였다. 이치수 사장과 함께 사냥총을 들고 있는 건장한 노인의 사진이었다. 

비서가 문을 열어주며 덧붙였다.

“기사 초고는 이메일로 먼저 보내주십시오.”

“그러죠.”

그리고 기사 초고를 보냈는데 다음날 아침에 기사 거절 의사를 보내왔다.

의주는 다시 찾아가 애걸이든 복걸이든 해서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이치수 사장은 출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의주는 꽃바구니 하나를 들고 이치수의 집 앞에 섰다. 심호흡을 하고 초인종 단추를 눌렀다.

“약속도 없이 무슨 일이십니까?”

“죄송합니다. 이치수 사장님을 직접 찾아뵙고 기사내용을 수정하고 싶습니다. 사장님께 여쭈어 봐 주시겠습니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의주는 꽃바구니 안에서 시든 잎 하나를 발견하고 떼어냈다. 바닥에 떨어지는 이파리처럼 초라한 기분이 들려는데, 쾡! 소리를 내며 대문이 열렸다.

마당을 지나 현관으로 들어서니 비서가 응접실로 안내해 주었다.

“앉아 계시면 사장님께서 나오실 겁니다. 차는 뭘로 하겠습니까?”

“녹차 부탁합니다.”

비서가 안쪽으로 들어가고 의주는 꽃바구니를 내려놓으며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벽에는 가족사진이 걸려있었는데 사진 속 남학생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잠시 후, 이치수가 응접실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쉬시는 데 방해를 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아닐세, 아니야. 젊은 사람들이 패기가 있어 좋구먼.”

이치수가 소파에 앉자마자 도우미 아주머니가 차를 내왔다. 도우미 아주머니는 굳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이치수 앞에 찻잔을 내려놓는데 손이 바르르 떨렸다.

“고맙습니다.”

의주가 인사를 하니 도우미 아주머니는 놀라운 듯 의주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기사내용 중에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요? 저희가 사장님의 기업이념과 경영철학 등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 듯 합니다만.”

“뭐 거창하게 기업이념이라고 까지는 할 것 없고........ 우리 회사 생산직 노동자들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라는 내용은 뺐으면 싶구먼. 인터뷰 내용에는 없던 거라 말이야.”

“알겠습니다.”

“원단 공급의 투명성을 강조하고 기부내용도 좀 크게....... 거, 알지 않나?”

이치수는 고용주 특유의 거드름과 허세를 감추지 않았다.

“잘 알겠습니다.”

집 안쪽 어딘가에서 접시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앙칼진 중년여성의 고함도 들렸다.

“생초 아줌마아~~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어? 이것도 제대로 못 해? 아버님은 어디서 저런 촌것을 도우미로 들였는지 ........... 이게 얼마짜린지 알기나 해?”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사과하는 도우미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주 있는 일인 것 같았다.

의주는 찻잔을 내려놓고 서둘러 일어섰다.

“기사는 잘 수정해서 다시 보내겠습니다.”

대문을 나서는 의주는 몹시도 불편했다. 도우미 아주머니를 쥐 잡듯 잡는 중년여성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속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다온은 강아지를 돌려주려 친구의 자취방 문을 두드렸다.

“창훈아 나야. 안에 있어?”

대꾸가 없다. 손잡이를 돌려보니 문이 열렸다.

“문도 안 잠그고.......”

방 안에 창훈이 누워 끙끙 앓고 있었다.

“창훈아 왜 그래?”

몸이 불덩이였다. 다온은 택시를 부르고 창훈을 들쳐업었다. 응급실에서 겨우 열을 내리고 병실로 옮겼다.

“어떻게 된 거야? 이렇게 아팠으면 진작 전화를 하지.”

겨우 정신을 차린 창훈에게 잔소리를 했다. 

“모르겠어. 공장에서 직원들 모임에 참여하고 집에 돌아오면서 목이 간질간질 하더니 기침이 나고....... 기억이 안 나.”

“암튼, 며칠 입원 치료해야 한다니 밥 잘 먹고 조리하고 있어. 강아지는 내가 돌보고 있을게.”     


집으로 돌아온 다온의 빈손을 보자 보라는 실망한 표정이었다. 다온은 팔뚝만한 먹돼지를 어찌 먹여야 할지 한숨이 절로 났다. 마침 의주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야, 너는 현관문 비번도 안 바꾸고....... 어? 바비인형이네.”

의주는 바비인형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 물컹거리는 촉감에 깜짝 놀라 손을 털었다. 보라는 공중제비를 돌면서 착지했다.

의주는 동그란 눈을 뜨고 다온을 향해 눈으로 물었다.

“재? 구미호래. 내가 변신주문을 읽었더니 미성숙 인간으로 변한 거래.”

다온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의주는 상황을 이해하려 애를 썼다.

“그러니까, 호임 할머니의 사연과 장수표범과 주문서 등등을 묶을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거지?”

하며 보라를 다시 살펴보았다.

“나는 보라야. 너도 우리 세계를 좀 알고 있는 듯하구나. 보다시피 난 오백 년 묵은 여우인데 인간계에 잡혀 온 엄마를 찾으러 왔어.”

“반.... 가워~ 난 의주야. 표범의 몸에 갇힌 호임 할머니의 아버지를 위해 주문서를 찾고 있었어. 다온이 드디어 찾았나 보구나.”

둘은 동지를 만난 듯 악수를 나누며 안도했다. 

“보라 네가 사는 곳은 어떤 곳이니? 동굴 같은 데니?”

“동굴? 거긴 천기누설자들 가두는 지하감옥인데....... 가 봤어?”

“응, 친구 잘 둔 덕에 지하감옥에도 가보고, 대단한 인생 아니니?”

의주는 눈으로 못질이라도 하듯 다온을 째려보며 대꾸했다.

보라는 말 안 해도 알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내가 살던 곳은 요정들의 땅이야. 천계의 선인들이 죄를 지으면 유배되는 곳이기도 하지.”

“정말 구미호처럼 요정이 인간들 사이에 섞여 살 수 있어?”

“요정이 이쪽 땅으로 건너오면 짐승의 모습이 되기 때문에 함부로 건너오지 않아. 인간의 모습으로 바뀌려면 제대로 된 주문이 필요하지.”

“보라 네 어머니는 왜 이쪽으로 건너오셨니?”

“언젠가부터 인간계에서 사냥꾼들이 쳐들어와서 요정들을 잡아갔어.”

“인간들이 요정계를 마음대로 드나든다고? 큰일이네. 어서 그 주문서를 호임 할머니께 보여드리자.”     



우루루 몰려 호임 할머니 집에 갔더니, 호임 할머니는 경이로운 눈으로 보라를 들여다보았다.

“이 아이는 ........ 저쪽의 아이구나.”

“안녕하세요? 보라라고 합니다.”

“맙소사, 반갑구나. 너희들이 주문서를 찾았구나.”

호임 할머니는 희망에 부풀었다.

“마지막 문장이 없어서 이렇게 불완전 변신을 해요.”

“마지막 문장이라.......”

호임 할머니는 아쉬운 표정이 되었다.

“할머니, 혹시 그 마지막 장을 이여삼이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을까요?”

다온의 물음에 호임 할머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여삼?”

“네, 주문서 사이에 할머니가 예전에 쓴 일기장이 있더라고요. 이여삼이라는 사람이 주문서 읽는 것을 도와주는 척 하면서 주문서를 가져갔다고 쓰여 있던데요.”

“이여삼?”

호임 할머니는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그 작자가 할머니 구슬도 빼앗아 갔다는데, 기억 안 나세요?”

“구슬이라고?”

가만히 듣고 있던 보라가 끼어들었다.

“구슬을 빼앗겼다면, 할머니는 여삼이라는 작자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은 거야.”

“이여삼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고? 그래서 할머니는 이여삼만 빼놓고 세상 모든 종이를 뒤지느라 일생을 보낸 거야.”

의주는 마당의 종이탑을 보며 다음 말을 잇지 못하였다. 

다온이 분위기를 깨며 물었다.

“이여삼에 대해 아는 거 있어?”

의주는 휴대폰으로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이여삼은 인력회사를 운영한대. 그 아들은 이치수, 모피 산업을 ....... 어?”

의주는 휴대폰의 사진 폴더를 열었다. 

“이치수의 집에서 찍어온 사진이야. 어? 이여삼이 한철의 할아버지네?”

“한철이 누군데?”

“한철이가 아버지 서랍에서 빼낸 이상한 문자를 읽었더니 손발이 소발굽으로 변했다고 했어. 그렇다면 이여삼이 주문서와 구슬을 훔쳐 간 것과 모피산업이 연관이 있을까? 사냥총 들고 있는 사진을 봤거든.”

“그렇다면 주문서의 마지막 문장은 이여삼의 집에 있어. 분명 금고 안에 넣어두었을 텐데....... 어떻게 꺼내 온다?”

“한철의 집에 들어갈 때 보니, 3층 건물 옆쪽에 단층짜리 한옥이 한 채 붙어 있었어. 이여삼의 거처가 분명해. 하지만 높은 담장에다 보안 설비가 짱짱해서 고양이 한 마리 드나들 수 없겠어.”

보라가 말을 받았다.

“금고의 위치만 정확히 안다면야 내가 고양이보다 작으니......”

“금고 위치라........ 

다온이 휴대폰을 열었다.

“한철의 sns를 타고 한철 누나의 계정으로 건너가면......... 누나는 명품 자랑에 난리 났네. 할아버지 서재에서 찍은 사진이 있군. 서재 창밖 풍경을 찾으면 ........ 한옥의 끝에서 두 번째 창문이 서재야.”

“우와~ 쫌 하네?”

의주는 다온의 현란한 손가락 신공을 보며 감탄했다.

“그럼 보안장비 뚫는 방법만 찾으면 되네.”

“헬륨 풍선이 있잖아.”

“그거 좋은 방법이야.”

“내가 사 올 테니 돈 줘.”

다온은 의주에게서 돈을 받아 신이 나서 달려 나갔다. 햄버거 가게에서 어린이세트를 먹고 헬륨풍선을 받아 들고는 휘파람을 불며 돌아왔다.   

  

그날 밤, 한철의 집 뒤쪽 언덕에 선 다온과 보라. 헬륨 풍선에 바구니를 달아놓으니 영락없는 열기구였다. 보라를 태운 헬륨 풍선이 두둥 떠올랐다. 보라는 부채질로 방향을 잡아 한옥의 지붕 위에 날아갔다. 바구니에서 뛰어내렸는데, 기와지붕에서 미끄러져 처마 끝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도베르만이 달려와 으르릉 거렸다.

“쉿! 소리 내지 말고 얌전히 있어.”

보라의 속삭임에 도베르만이 긴가민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맴돌았다.

그때 보라가 도베르만의 등으로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개가 펄쩍뛰며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가마안~ 괜찮아, 쉬이~~”

보라가 놀란 도베르만을 진정시켰다.

“저쪽 창문으로 가자.”

도베르만은 뒤탈이 걱정되면서도 보라의 기에 제압당하여 끙끙 소리를 내며 서재 창문으로 갔다. 게다가 보라가 시키는 대로 앞발을 창턱에 걸치기까지 했다.

보라는 도베르만의 등을 타고 앞발을 지나 창문으로 올라갔다. 창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작전이 어긋나고 있는 상황에 서재의 불이 켜졌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창문을 열더니 청소를 시작했다. 그 틈에 보라는 창문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 도우미 아주머니의 물걸레는 보라가 숨은 곳을 구석구석을 훑었다. 보라는 요리조리 피하다가 그만 구슬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머니가 요정사냥꾼에게 붙잡혀 가면서 보라에게 준 까만 구슬 이었다. 보라가 구슬을 집으려 했지만, 걸레가 먼저 지나갔다. 이윽고 도우미 아주머니는 창문을 닫고 불을 끄고 나갔다. 

보라는 바닥에 내려 금고에 다가갔다. 금고에 귀를 대고 다이얼을 돌렸다. 오백 년 요정의 감각은 금속 바퀴의 미세한 소리를 잡아냈다. 짤깍! 잠금 고리가 해제되는 소리가 아름답게 들렸다. 보라는 금고 손잡이에 매달렸다. 하지만 육중한 금고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벽난로 옆에 세워진 쇠꼬챙이를 끌어와 금고 문을 벌려야 했다.

한편, 걸레를 빨던 생초댁은 대야에 가라앉은 구슬을 발견하였다. 진열장을 닦을 때 무언가 움직이는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이여삼의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라는 책상 위의 만년필을 심지로 삼아 서류뭉치를 돌돌 말아 우산주머니에 넣었다. 의주가 제 우산에서 벗겨 챙겨준 것이었다. 우산주머니를 어깨에 둘러메고 창틀로 건너뛰었다. 창문의 잠금고리를 열려고 폴짝폴짝 뛰는데, 서재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있었다.

벌컥, 서재 문이 열리자 보라는 바람처럼 뛰어 진열장 위로 올라가 엎드렸다. 

이여삼이 수상한 소리를 듣고 불독을 데려왔던 것이다. 불독이 진열장 위쪽을 향하여 으르릉거리자 이여삼은 벽난로용 쇠꼬챙이를 집어 들었다. 책장 쪽으로 한걸음 한걸음 발자국 소리가 보라에게는 천둥소리 같았다.

그때 서재 문이 벌컥 열리며 생초댁이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아까 창문을 열어놓고 청소하는 틈에 고양이가 들어 온 모양입니다. 제가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생초댁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의자를 끌어 진열장 앞에 놓고 올라섰다. 진열장 위의 보라와 눈이 마주친 생초댁의 동공이 확 열렸다. 의자에서 떨어질 듯 휘청하여 이여삼의 시선을 흩은 순간에 품속에 있던 고양이를 진열장 위로 올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고양이의 배에 매달린 보라. 

“여기 고양이가 있네요.”

생초댁이 고양이를 안고 방을 나가려고 하자,

“잠깐!”

이여삼이 저지하며 고양이에게 손을 뻗는다. 

보라가 고양이의 배를 걷어찼다. 놀란 고양이가 생초댁의 손을 할퀴며 책상 위로 뛰더니 창틀로 건너갔다. 고양이가 창틀에서 뛰어오르는 순간 보라가 잠금고리를 열었고, 고양이는 창문 밖으로 도망쳤다.

고양이의 배에 붙어 도망쳐 나온 보라는 이여삼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괴로워했다.

“그것도 제대로 못 해? 이 형편없는 것아!”

이여삼의 쇠꼬챙이가 무언가 내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모두가 호임 할머니 집에 모였다.

보라가 내놓은 문서들을 살펴보던 호임 할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다. 어느 것이 주문서의 마지막 장인지 모르겠다. 내가 이 주문서를 본 적이 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이여삼이 다른 곳에 숨겨둔 거군요. 그래서 한철의 주문이 풀리지 않는 거였어요.”

하고 의주가 대꾸했다.

“여기 이건 할머니 일기장 낱장 같은데요. 이여삼이 할머니 일기장을 찢어 간 것일까요?”

호임 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들었다.        

  

1968년 4월 29일

주문서의 마지막 장을 해독하기 위해 여삼을 만났다.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여삼은 그 많은 여학생들 중에 내게 말을 걸었지?”

하고 물었더니 여삼은 만년필을 보여 주었다.

“글쎄, 믿을지 모르겠지만, 강의실에서나 도서관에서나 

복도에서나 네가 지나갈 때마다 이 만년필의 글자가 빛이 났어. 

이건 아버지 유품이야. 여기 글자가 보이지? ‘준’. 

내 아버지 함자가 ‘준’ 자 ‘성’ 자야.”

여삼은 뿌듯함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만년필을 만져보았다. 

‘준’이라는 글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눈을 찔렀다. 그리고 생각났다.

“이건 내 어머니 호연아씨가 내 아버지께 주신 선물이야. 여기 이 글자 ‘준’은 내 아버지 유재준의 이름 끝 자야. 이 만년필을 어찌 여삼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지?”

하고 물으니 여삼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내게 달려들어 입을 맞추었다. 

나는 몸에서 강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쓰러졌다.         


 

“그때 내 여우구슬을 빼간 것이군.”

호임 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목재로 된 몸통과 상아 뚜껑에 금빛 클립으로 된 만년필에는 ‘준’자가 금빛으로 새겨져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의 유품을 이제야 다시 보는구나.”

호임 할머니의 눈 밑이 촉촉해졌다.

의주가 놀라 서류를 살펴보았다.

“이여삼의 아버지가 이준성이라는 말이에요? 친일밀고자 이준성? ......... 맙소사! 이건 뇌물 장부에요. 이치수 사장이 기부를 했다더니 정계에 뇌물을 썼나 봐요. 나 지금 신문사 들어가 봐야겠어요.”     



의주가 서둘러 출근하고 다온의 친구 창훈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 어떻게 하냐? 회사에서 해고문자가 왔다.”

“기다려, 내가 지금 병원으로 갈게.”

“아니야 올 것 없어. 회사에 들어가 봐야겠어. 분명 병가를 냈는데, 무단결근이라고 해고장을 문자 한 통으로 날리는 경우가 어딨어?”

“창훈아, 그 몸으로 어딜 가려고? 가더라도 건강해진 몸으로 가야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것 아니야? 지금 그 몸으로 가는 건 무리야.”

“오늘 모임이 있어. 비정규직 파견 직원들의 정규직 전환 요구를 준비하는 모임 날이야......... 맙소사! 그거였어. 지난번 모임에서 기침을 심하게 하는 직원들이 있었어. 나도 그날 밤부터 으슬으슬 춥더니 열이 나기 시작했어. 함께 있던 직원들도 이 증상을 호소했었어.”

하고는 창훈의 전화가 끊겼다.

다온은 창훈이 걱정이 되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택시를 타고 창훈의 회사로 달려갔지만, 공장의 정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경비원은 명단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주창훈씨? 입원 중이라던데.......... 전염의 위험성이 있어 출입이 금지되어 있네요. 이곳에 오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회사에서 일방적인 해고통보를 받고 확인하러 간다고 했어요. 창훈이 잘 있는지 확인해야겠어요.”

“일방적인 해고통보라니요. 우리 회사는 그런 회사가 아닙니다. 외부인은 허가 없이는 들어갈 수 없으니 돌아가 주세요.”

다온과 경비원이 실랑이하는 동안 119구급차가 달려왔다.

“공장 안에서 구급신고 전화가 왔습니다. 문 열어 주세요.”

하지만 경비원은 문을 열려다 말고 급하게 울려대는 내선전화를 먼저 받았다.

“예, 예.”

경비원은 눈치를 살피며 전화를 받더니 구급차 옆으로 다가왔다.

“수고 하십니다.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는데 회사 안 양호실에서 응급처치를 해서 상황종료 되었답니다. 그냥 돌아가셔도 됩니다.”

“그래도 신고자를 직접 보고 확인 해야겠습니다.”

“글쎄, 회사에서 책임진다니까요. 그냥 돌아가세요.”        

하고 기어이 구급차를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이치수의 집, 여삼의 한옥채로 통하는 복도에 엎드려 있는 불독은 생초댁이 지나갈 때마다 으르렁 거렸다. 생초댁은 잔뜩 움츠린 자세로 복도를 지나다녀야 했다. 

생초댁은 세탁실에 들어가 걸레를 빨았다. 이곳이 생초댁에게는 제일 마음 편한 곳이었다. 고용주들에게 시달릴 때마다 이곳에 들어와 잠시라도 앉아있으면 숨이 좀 쉬어졌다. 걸레를 빨다가 지난밤의 일이 떠올라 주머니에서 구슬을 꺼내보았다. 팥알보다 작은 진주알 반쪽이 손바닥 위에서 반짝거렸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걸이 빈 구멍에 진주알에 가져다 대었다. 구슬이 쏙 들어가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이치수의 집 주차장이 열리고 검정색 승용차가 빠져나갔다. 주차장 문이 닫히기 전에 깜장 비닐봉지 하나가 바람에 펄럭거리며 주차장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바람도 없는데 깜장 비닐봉지는 주차장에서 마당 쪽으로 펄럭거렸다. 

마당에 엎드려 있던 도베르만이 쪼르르 달려와 킁킁거리더니 어디론가 달려갔다. 잠시 후, 여삼의 한옥채에서 불독을 데리고 나왔다. 불독은 귀찮다는 듯이 어슬렁거리며 걸어왔다.

깜장 비닐봉지 안에서 보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독을 노려보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너 이리 캄 온”

보라가 눈을 부라리니 불독이 뻗대며 도베르만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도베르만은 불독의 눈길을 외면하고 안채를 살피는 척했다.

“데꺽 안 와? 말로 부를 때 얼른 와야지?”

보라의 마지막 경고에 불독은 낑낑거리며 걸어왔다. 보라는 이 녀석을 어떻게 손볼까 생각하다가 회유책으로 결정했다.

“너 이시키, 여기서 일하시는 아주머니한테 엄청 엉기더라. 주인 영감 믿고 예의 없이 굴다가는........ 확~ 쥐떼를 불러다 줄 수 있어.”

보라가 최대한 친절하게 한다고 한 말이었다.

불독은 신음소리도 낼 수 없었다. 보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오백 년 요정의 기운은 불독의 털 한 올 한 올 휘감아 전율케 했다.

“그래, 착하구나. 누나는 함부로 협박하고 때리고 그런 구미호가 아니야.”

보라가 불독의 턱을 쓰다듬으려 하자 불독은 다리에 힘이 빠져 그대로 엎어졌다.

“이제 됐으니 들어가 봐라.”

하고 보라는 깜장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모습을 감추었다.


그날 밤에는 생초댁이 아주 편안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불독은 생초댁이 지나가면 몸을 일으켜 어찌할 바를 몰라 낑낑 거렸다. 생초댁은 그런 불독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편, 밤이 되자 다온은 창훈의 공장 뒤쪽으로 숨어들었다. 담장의 깨어진 구멍을 통해 공장 안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창고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창고 안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하실 출구 같은 곳에서 소들이 걸어 나왔다. 직원들이 소를 컨테이너 안으로 몰아넣었다. 그런데 컨테이너 반대쪽으로 사람이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다온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리고 보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요정사냥꾼들이 들어와 인간계로 데려가 일자리도 마련해 주겠다고 선전하여 지원자들을 모았어. 어머니도 속아서 그들을 따라 갔는데........’

다온은 좀 더 자세히 보려 몸을 일으키다가 힘없이 쓰러졌다. 이번에는 진짜 후두부를 가격당한 것이었다. 축 늘어진 다온의 몸은 옆 건물 안으로 던져졌다. 

“다온아! 네가 여기 끌려오다니, 무슨 일이야?”

창훈이 달려와 다온을 깨웠다. 정신을 차린 다온은 창훈이 무사 한 것을 보고 안심하였다.

“창훈아, 너를 찾으러 왔는데, 네가 공장으로 들어온 적 없다고 했어.”

“부당해고에 대해 항의하러 왔다가 여기에 갇혔어. 우리들은 정규직 전환과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교섭을 시도했지만, 회사 측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단체행동을 인정하지 않고 응하지도 않아. 결국 이렇게 공장 건물에 갇히고 말았어. 밖에서 문을 걸어 잠갔거든.”

“경비원들이 구급차를 그냥 돌려보내는 것을 보고 네가 걱정되어 뒷담을 넘었는데, 창고에서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

“이곳은 모든 일이 다 수상한 곳이야. 작업장이 화학약품을 다루는 곳이라 사고가 많지만, 철저히 은폐되고 있어. 기침을 하는 직원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회사측은 작업환경 따위 거들떠보지도 않아.”

다온은 조금 전 창고에서 보았던 소들에 대해 물어보려 했다.

그때 공장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동료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두리번거렸다.

“바깥에서 채광창을 막고 못 질 하는 소리다!”

누군가 소리 지르자 공장 안이 술렁거렸다. 

스피커에서 변신 주문 소리가 나더니 그들의 몸에 누런색 털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한편, 늦은 밤에 여삼은 전화를 걸고 있었다.

“여보세요, 허가를 요청한 60명분의 주민번호를 반토막 내서 보내다니요. 이러면 인력공급에 차질을 생깁니다.”

“그런 푼돈으로 60 개의 주민번호를 만들어 달라니 염치도 없군.”

“30억이 푼돈이라니요?”

“자네가 칠칠치 못해서 뇌물 건을 막느라 비용이 이만저만 드는 게 아니네. 당분간 연락하지 말게.”

하며 상대가 전화를 끊었다.

“이노옴~ 네가 누구 덕분에 그 자리까지 올라간 줄을 잊었더냐?”

여삼은 으르렁 거리며 전화기를 내던졌다.

그때 서재 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여삼의 고함에도 서재 문이 열렸다. 한철이 몸에 담요를 감고 덜덜 떨면서 서 있었다.

“할아버지, 저 좀 도와주세요.”

불독이 한철에게서 나는 짐승의 냄새에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릉거렸다.

“조용히 못 해?”

여삼은 대리석 감사패를 집어던졌다. 불독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한철은 그대로 돌아섰다.

“이놈들이 누구 덕에 저 자리에 앉아있는지 잊었구나!”

여삼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서재 밖으로 들려왔다.

한철은 비틀거리며 복도를 지나고 거실을 힘겹게 통과하여 안방으로 향했다. 문틈으로 이치수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또 백화점 다녀왔어? 지난달 카드 명세서가 석 장이야, 영수증 석 장이 아니라 명세서가 석장이라고.”

“입고 나갈 옷이 없는 걸 어떡해? 보석은 유행 지난 것 투성이고....... 당신은 아내가 넝마 쪼가리 걸치고 생초네처럼 구질구질한 꼴로 모임에 나갔으면 좋겠어?”

치수의 아내는 새로 사 온 옷과 보석을 몸에 대어보고 거울에 비추어 보느라 방문이 열리는 것도 몰랐다.

“요즘 회사 사정이 얼마나 안 좋은지 알기나 해?”

치수는 신경질적으로 시계를 벗고 정장을 벗었다. 몸을 지탱해 주고 있던 명품을 하나씩 벗겨내자 치수의 몸은 허수아비의 모습이었다. 치수의 눈이 문밖의 한철과 마주쳤다.

“넌 고등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밤마다 어딜 그리 싸돌아다니는 거야? 어서 가서 자.”

하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보석을 벗겨내고 화장을 지우던 치수의 아내 역시 한철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가렸다.

“화장 안 한 모습은 비공개란다. 할 말 있으면 내일 하렴.”

하고 방문을 닫았다. 명품 옷과 보석을 떼어 낸 치수의 아내는 말린 북어처럼 물기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한철은 힘겹게 계단을 올라갔다. 떨리는 손으로 누나의 방문을 열었더니 누나는 안 보이고 테블릿 화면 앞에 나방 한 마리가 붙어 있었다. 한철이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누나가 앉아있었다. 한철의 누나는 명품 가방과 옷을 늘어놓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일이 생활이었다. 누군가 부러워해 주지 않으면 견디지 못했다. 누나의 방에는 쓰지도 않는 가방과 구두가 늘어갔다. 그렇게 누나는 모니터 앞에 붙어 나방의 삶을 살고 있었다.

한철은 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쓰러졌다.      

생초댁이 꿀물을 들고 한철의 방으로 들어왔다. 아까부터 한철의 뒤를 따르며 지켜보고 있던 생초댁 이었다. 거친 숨을 쉬며 이불을 뒤집어 쓴 한철의 몸이 들썩였다. 이불 밖으로 나온 한철의 다리는 누런 털로 뒤덮여 있었다. 생초댁은 조심스레 이불을 들추었다. 오한에 떠는 한철의 몸은 고열로 펄펄 끓었다. 생초댁은 서늘한 손을 한철의 이마에 얹고 눈을 감았다. 차츰 열이 내리고 한철의 호흡이 진정되며 잠이 들었다. 생초댁은 방을 나와 안쓰러운 눈으로 한철을 바라보며 문을 닫았다.

생초댁이 계단을 내려와 거실을 지나는데 신음이 들렸다. 거실 구석에 불독이 엎드려 앓고 있는 것이었다.

“저런~ 다리가 부러졌구나.”

생초댁이 다가가니 불독은 이빨을 드러냈다가 끙끙 앓았다가 안절부절못했다.

“괜찮다. 너도 네 주인의 명에 묶여 있어 그동안 내게 그리 대한 것이니 나는 개의치 않는다.” 

하고 불독의 다리에 손을 얹었다. 요정의 강한 기운이 상처를 어루만졌다. 인간에게서 받은 상처는 치유가 어렵긴 하지만, 체온을 나누는 것으로 위안이 될 때가 있다. 차츰 불독의 부기가 내리더니 헐떡이던 입이 다물어졌다.

그날 밤 불독은 생초댁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잠이 들었다. 여삼의 집에 들어온 후로 처음으로 편안한 잠을 자보는 불독이었다. 생초댁은 그동안 불독이 얼마나 여삼의 눈치를 살피며 전전긍긍 해 왔는지를 알고 있었다. 

생초댁은 어둠에 잠긴 집을 둘러보았다. 분명 인간의 집인데 인간의 온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집이라니........ 인간의 집에서 요정과 짐승만이 체온을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호임 할머니는 티브이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아나운서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다음 기사를 보도했다. 

“농림축산부는 구제역 확진 판정을 받은 감염 소 수백 마리의 살처분을 결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결국 이리 되는구나.”

호임 할머니는 한숨과 함께 탄식했다.

보라는 티브이 앞에 붙어 앉아 화면 속의 소들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었다. 보라의 키가 어느 새 네다섯 살짜리 아이만큼 커져 있었다. 재활용 상자에서 유아용 옷을 주워 입은 모양인데, 워낙 가녀린 몸이라 옷이 헐렁했다.

“의주도 취재하느라 바쁜지 발길이 뜸하고, 다온은 아직도 연락이 안 되니?”

호임 할머니가 물어도 들리지 않는지 보라는 화면 안으로 들어갈 기세였다. 아까부터 눈에 띄는 황소가 있기 때문이었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황소라니........ 소는 주인과도 눈을 잘 안 맞추는데.”    


      

삼대모피 기획전창고 대방출 

대형 현수막이 걸린 실내경기장 밖에서는 춤과 음악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자금 사정이 어려워진 회사의 응급처방이었다.

한철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서서 현수막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결심한 듯 모피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1층 경기장에는 모피코트가 줄지어 걸려있다. 바이올린 선율이 우아하게 흐르며 모피코트가 무척 고급이라고 떠드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서로 좋은 모피코트를 고르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다.

한철은 직원들의 눈을 피해 방송실로 들어가 usb 디스켓을 음향시설에 꽂았다. 바이올린 선율은 곧 웅장한 교향곡으로 바뀌고 쇳소리가 섞여 나왔지만, 사람들은 모피를 입어보느라 개의치 않았다. 

한철은 자신이 기획한 쇼를 구경하기 위해 2층 관람석에 앉았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쇳소리에 모피들이 움찔움찔 반응을 하더니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한 장의 모피코트가 만들어지려면 다섯 마리의 여우와 담비가 죽는다고 했다. 한철은 그 여우와 담비들을 부활시켜 준 것에 뿌듯해했다.

“아악~~~~”

고음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코트가 살아 움직이더니 사람들을 할퀴고 물어댄 것이었다. 코트를 걸친 사람이 서둘러 옷을 벗으려 하지만 이미 담비의 발톱에 머리채가 잡힌 다음이었다. 명품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있던 사람은 새끼 악어로 변한 가방에 손을 물렸다.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코트와 가방과 구두와 씨름을 하며 뒹굴었다. 

그 와중에 자신의 가방만 멀쩡한 것에 화가 난 한 여성은 남자 친구에게 가방을 집어던졌다.

“이 짝퉁 자식아! 너한테 나라는 존재의 가치가 이것 밖에 안 되니? 내가 사 준 구두 내놔!”

하고 남자친구의 발을 보니 소가죽 구두는 소발굽으로 변하고 있었다. 남자친구는 구두를 벗어던지려 발버둥 쳤다.

한철은 교향곡에 맞추어 지휘를 하며 신나게 경기를 관람했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생초댁은 여삼의 서재에 차를 들여갔다. 여삼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 돌아서다 기침을 했다. 눈길 한번 안 주던 여삼이 기침소리에 생초댁을 돌아본다. 얼굴이 붉고 열에 들떠 있는 것을 보자 몸을 사리며 어서 나가라고 손짓을 했다.

“감염이 되었군. 처리 하게.”

비서에게 한마디 하고는 찻잔을 피해 자리를 옮겼다.

비서가 전화를 걸어 무언가 지시했다. 

서재 문을 닫으며 생초댁은 올 것이 왔구나하는 표정으로 깊은 숨을 내쉬었다. 앞치마 주머니에 속에서 만지작거리던 휴대폰을 꺼냈다. 한철의 휴대폰이었다. 오늘 아침에 한철은 죽음을 앞둔 짐승 같은 눈으로 생초댁의 손에 휴대폰을 쥐여주었다. 말 없는 한철의 그 행동은 어쩌면 살려달라는 절규였는지 모른다. 

현관으로 사내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생초댁을 데리러 온 사람들이었다.

생초댁은 서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비서가 놀라 밀어내려 하자 생초댁은 여삼을 향해 한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당신은 나를 사람 취급 안 했지만, 나는 스스로 사람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면 손자를 살릴 수 있어요.”

여삼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생초댁은 비서의 손에 휴대폰을 쥐여주고 돌아섰다.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사내들이 생초댁을 데리고 나갔다. 복도에서 불독이 불안하게 서성거렸다. 생초댁은 목걸이를 벗어 불독의 목에 걸어주고 귀에다 무언가 속삭였다. 불독은 결연한 표정으로 생초댁과 눈을 맞추었다.

생초댁을 차에 태워 어디론가 데려간 사내들은 대형 탑차 옆에 차를 세웠다. 생초댁은 트럭에 태워졌다. 

탑차 안에는 소들이 가득했다. 소들은 몹시 슬픈 눈빛으로 생초댁을 바라보았다.

트럭은 살처분장에 도착했다. 탑차의 문이 열리고 소가 한 마리씩 비틀거리며 내려왔다.

“아니 이 소들은 어디에서 왔기에 귀에 번호표가 없소?”

서류철을 들고 소의 번호를 확인하던 담당자가 물었지만, 트럭 운전수는 못 들은척 자리를 떴다.      

    

여삼은 책상 위에 놓인 한철의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평소 눈도 제대로 못 맞추던 생초댁이 여삼의 눈을 보며 또박또박 말을 하였다. 

‘손자를 살릴 수 있다’ 

한철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말인가? 며칠 전 한철이 서재로 찾아온 것 같은데........

여삼은 휴대폰을 열어 사진첩을 펼쳤다. 사진첩에는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를 기괴한 모습의 사진들이 있었다. 동영상 파일을 재생시켰더니 화면이 심하게 흔들렸다. 한철이 달리면서 찍은 영상이었다. 카메라가 승용차의 창문에 다가섰는데 차창에 비친 것은 한철의 얼굴이 아니었다. 

여삼은 놀라 다른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피로와 불안감에 찌든 한철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눈물을 닦았다.

“할아버지, 너무 무서워요. 저 자신조차 제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래도 이 모습을 손자로 생각하신다면 저를 데리러 와 주세요. 예전에 우리가 함께 사진 찍었던 느티나무 아래 정자에서 기다릴게요.”

한철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며 호흡이 가빠졌다. 한철의 얼굴과 팔과 다리에서 누런 털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여삼은 폰을 놓치고 휘청거렸다.

“임비서! 임비서! 차 대기 시켜.”

“어디로 모실까요?”

“........”

여삼은 손자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는 정자가 어디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예전에 어느 정자에 간 적이 있던가?”

임비서 또한 기억하지 못 하였다. 여삼의 비위를 맞추며 오래 버티는 비서가 없었다. 임비서는 느티나무가 있는 정자를 검색하여 사진을 보여 주었다. 한철과 함께 찍은 사진과 비교 하여 한 곳을 찾아냈다.

“철아, 한철아~ 내 새끼 조금만 기다려라, 철아 한철아~ 내 새끼.”

평소의 냉혹한 이여삼 답지 않은 울먹임이었다. 지난밤 도움을 청하러 온 손자를 내쳤던 자신을 탓하고 탓하였다.

여삼의 차는 신호를 무시하고 역주행까지 감행하여 정자에 도착하였지만, 한철은 없었다. 정자 주변을 뛰어다니며 한철을 찾았지만, 한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삼은 주위에 세워져 있는 차로 달려가 팔꿈치로 창문을 쳤다. 놀란 비서가 화단의 벽돌을 뽑아 차창을 내리쳤다. 차 유리를 깨뜨려 블랙박스 파일을 꺼내 자신의 휴대폰으로 재생시켰다. 영상에는 정자에 앉아있는 한철이 있었다. 한철은 몹시 괴로워하더니 소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쓰러져 숨을 헐떡거렸다. 대형 탑차가 지나다가 정자 앞에 멈추었다. 탑차가 떠난 자리에는 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삼의 눈이 뒤집혔다.

“트럭 수배하고 살처분 중지시켜.”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여삼은 아는 연줄을 다 동원하여 살처분 중지 요청을 했다.   


   

호임의 집 대문 밖에서 불독이 짖었다.

“불독아, 네가 여기 어쩐 일이니?”

보라가 내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불독의 목걸이에서 구슬이 반짝이고 있었다. 보라가 잃어버린 구슬 반쪽이 나머지 반쪽을 만나 온전한 구슬 한 알이 되어 있었다.

“고맙다 불독아.”

보라는 떨리는 손으로 구슬을 받아들었다.

그때 자동차의 급정거 소리가 났다. 불독이 놀라 마당 깊숙이 숨어버렸다. 이 동네에서 보기 드문 고가의 승용차 한 대가 대문 앞에 나타나다니.

“도착 했습니다.”

임비서가 차 문을 열어주었다. 여삼은 눈을 감고 한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긴 호흡과 함께 눈을 뜬 여삼은 결심한 듯 차에서 내려섰다. 고령에도 건강한 몸이었다.

“혼자 가겠네.”

여삼의 말투가 명령체에서 하게체로 바뀐 것에 임비서는 잠시 놀랐다. 

여삼은 대문 틈으로 마당을 들여다보았다. 폐지 더미 한쪽에 작은 화단을 가꾸고 있는 호임을 발견하고는 머뭇거렸다. 

호임이 돌아보고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여삼이 대문을 밀고 들어갔다. 호임에게 걸어가는 여삼은 발걸음을 흩트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손자를 살려 주시오.”

“너무 늦게 왔구려.”

호임은 거칠게 호미질을 할 뿐이었다.

여삼은 무릎을 꿇었다.

“내가 다 잘못 하였소. 죄는 내가 다 받겠소. 손자를 살려주시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릎을 꿇는군요. 그런 가벼운 무릎은 땅만 오염 시킬 뿐이오. 가서 뿌린 대로 달게 거두어들이시오.”

그러자 여삼이 칼을 꺼내 들었다. 호임은 그의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아직도 내게서 빼앗을 것이 남았소?”

여삼은 하얀 손수건을 꺼내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칼을 올려놓았다.

“어설픈 사무라이 흉내 내는 건 부전자전이군.”

 호임은 여삼이 하려는 짓을 알고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여삼은 셔츠 단추를 열어 칼을 아랫배에 가져다 댔다. 손수건을 칼 아래에 대고 배를 갈랐다. 여삼의 깨문 입술 사이로 신음이 삐져나왔다.

칼자국이 난 아랫배에서 붉은 연기가 새어 나왔다. 붉은 연기가 스멀스멀 엉기어 휘돌더니 환(環)을 이루었다. 

호임은 떨리는 손을 들어 손바닥을 폈다. 환은 호임의 손바닥 위로 날아 왔다. 붉은 환이 하얀 빛으로 변하더니 빠른 속도로 회전하였다. 하얗게 빛나는 기응환(氣凝環), 호임의 어머니 호연아씨가 자신의 기를 응축시켜 물려주신 여우구슬. 호임은 감격스러운 눈으로 구슬을 바라보았다. 

구슬이 빠져나간 여삼의 몸은 급격히 노화하여 갔다. 숨을 헐떡이며 엎드린 여삼 앞에 호임은 낡은 뿔테 안경 하나를 던져주었다.

“평생 다른 이의 목숨 따위 안중에도 없이 살더니, 그래도 제 목숨 내어 줄 존재가 단 하나라도 있었구려.”

“고맙소.”

여삼은 안경을 집어 비틀거리는 몸으로 대문을 나섰다. 임비서가 놀라 부축하여 차에 태웠다.

“다치셨습니까? 병원으로 모실까요?”

“아닐세, 살처분장으로 가세.”

여삼이 힘겹게 대답 하는데 반대쪽 차 문이 벌컥 열렸다.

“같이 좀 갑시다.”

어느새 초등학생만큼 자란 보라가 옆자리에 앉았다. 비서가 반대쪽으로 달려가 보라를 끌어내리려 했지만 여삼이 손을 들어 말렸다.

“괜찮네, 그냥 두게.”

여삼의 부드러운 말투에 비서는 어리둥절하여 보라를 놓아주었다. 옆자리에 앉은 보라의 눈을 여삼은 애써 피했다. 호임이 준 안경을 통해 보이는 보라의 모습은 요정사냥꾼이었던 여삼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보라는 보기도 싫은 여삼의 얼굴을 쏘아보며 한마디 했다.

“내 어머니가 살아계시길 빌어야 할 거요.”     


여삼의 차는 매몰처리장으로 향했다. 현장 주위에는 공무원들과 기자들과 동물보호단체 회원들과 환경단체 회원들이 몰려와 있었다.

“살아있는 동물을 생매장하는 야만 행위 중지하라!”

“감염체를 생으로 매장하면 지하수 오염문제는 어떻게 하는가?”

여삼의 차가 통제되자 여삼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현장요원에게 바꿔주었다. 전화를 받은 현장요원은 한숨을 내쉬며 여삼의 차를 통과시켰다.

소와 트럭이 뒤섞여 아수라장 같은 매몰장에 도착한 여삼은 미친 듯이 소들 사이를 비집고 다녔다. 

매몰중지 명령이 내려온 살처분장에는 공무원들과 트럭기사들이 실랑이를 하고 중장비 기사들은 담배만 피워 댈 뿐이었다.

“빨리 소를 내리고 다른 축사로 가야 하는데, 왜 작업을 중지한 거요?”

“상부의 지시가 있었을 뿐, 나도 그 이유를 몰라 답답하오.”

“소들이 흥분하여 발작이라도 하면 우리 전부 밟혀 죽을 거요. 빨리 상부에 연락해 봐요.”

게다가 기자들 몇이 여삼의 차를 따라 들어 왔는지 촬영을 하고 있었다.

“카메라 막아!”

현장 소장의 고함이 소떼의 울음소리에 묻혔다.

여삼은 이 모든 상황에 아랑곳 하지 않고 소 떼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한철을 찾아다녔다.

현장요원들이 기자들을 몰아내려 했지만 벌써 현장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 급기야 상부에서 매몰재개 명령이 내려왔다. 

“기계 가동시켜!”

중장비가 움직이자 여삼이 현장감독의 멱살을 잡았다.

“당장 매물 중지시켜! 이 안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있다고.”

“뭐해! 이 노인네 끌어내지 않고.”

여삼은 현장요원들에게 끌려 나갔다. 보라와 눈이 마주친 여삼은 주문서를 꺼내 흔들었다. 주문서를 본 보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 몇 마리를 불렀다. 소들이 길을 막고 날뛰자 현장요원들의 손에서 여삼이 빠져나왔다.

매몰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소들이 보라를 보며 움무움무 울었다. 중장비에 매달려 구덩이 안으로 소 한 마리가 떨어지자 소들은 흥분하여 거친 숨을 푸푸 내뿜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 바람에 황소 한 마리가 구덩이 쪽으로 떠밀렸다. 목에 보이지 않는 차꼬를 찬 소였다.

“다온!”

보라가 소리치자 그 황소가 보라와 눈이 마주쳤다. 주먹 만 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보라를 바라보았다. 

그때 옆에 있던 암소가 다온의 몸을 막아내며 구덩이 먼 쪽으로 밀어내고 자신은 다른 소에게 떠밀려 구덩이 안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보라는 떨어지는 소를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머니!”

소로 변한 생초댁이 보라와 눈이 마주친 채로 구덩이 아래로 떨어졌다. 보라는 그대로 달려 구덩이 안으로 뛰어내렸다.

“사람이 빠졌다!”

누군가 뛰어내리는 보라를 보고 소리쳤다. 외침 소리가 나고도 몇 마리 소가 구덩이 안으로 떨어졌다. 

“사람이 빠졌다. 작업 중지!

“작업 중지!”

“작업 중지!”

작업 중지 소리가 징검다리처럼 건너가 중장비가 멈추었다.


그 틈에 허둥허둥 헤매던 여삼은 소 한 마리를 껴안았다. 안경을 통해서만 보이는 손자를 보자 눈에 핏발이 섰다. 수십 년간 눈물이 나지 않던 여삼의 눈은 슬플 때 더욱 따갑고 쓰렸다. 소들이 요정사냥꾼 여삼을 알아보는지 뿔을 들이댔다. 여삼은 등을 찔리며 서둘러 변신주문을 읽었다. 

마른번개가 쩍쩍 하늘을 가르며 땅을 훑고 지나갔다. 주먹 만 한 소의 눈에 섬광이 비쳤다.

섬광이 지나가자 왼쪽 땅의 집행자들이 여삼 앞에 나타났다. 

여삼은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손자를 무릎에 안아들고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손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행자들이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이제야 잡는구나, 요정사냥꾼 이여삼! 너를 왼쪽 땅 요정 무단 납치·감금 및 노동력 착취. 그리고 신물 무단사용 등등의 죄로 구속한다. 너는 수십 가지의 왼쪽 땅 법을 어긴 죄로 고소되어 있다. 너에게는 묵비권이나 변호사 선임 등의 권리 따위는 없다.”

여삼의 손목과 발목에 차꼬가 철겅 감겼다.

“그동안 여우구슬의 힘으로 잘도 숨어 있었구나. 그나마 손자를 아끼는 마음 한 가닥은 남아 있었던 게로군.”

여삼은 정신을 잃은 한철을 고이 내려놓고 집행자들에게 끌려갔다. 절겅절겅 차꼬소리가 긴 여운을 남기며 멀어져갔다.          


뒷이야기     

한창 취재 중인 의주에게 전화가 왔다.

“여의주 기자님? 여기 동물원이에요. 장수 표범이 동물원 밖으로 나갔어요. 아무래도 호임 할머니에게 가는 것 같아요.”

의주는 전화를 끊고 차기자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선배님, 취재차량 지원 좀 부탁합니다.”

“지금 여기도 바쁜데 어딜 가려고?”

“급합니다. 빨리요.”

의주는 취재차량을 타고 호임의 동네 도로변에서 택시를 잡는 호임 할머니를 발견하였다. 차를 세우고 호임을 차에 태웠다.

“여기자, 도대체 무슨 일이야?”

“선배님, 나중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동물원으로 가 주세요.”

의주는 웃음기를 뺀 표정으로 차문을 닫았다. 

차기자는 ‘선배님 선배님’ 하며 설설 기어도 모자랄 상황에 심각한 표정을 짓는 후배의 태도에 적잖이 당황스러워졌다.

“이 자식이 빠져갖고 한가하게 동물원 나들이나 하려고 불렀어?”

차기자는 투덜거리며 운전했다. 하지만 거울을 통해 할머니의 진지한 눈빛과 마주치자 입을 다물었다. 아무것도 보지 않는 듯한 눈을 하고 있지만,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한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차가 2차선 도로로 접어드니 차들이 멈춰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반대편 차선으로 나오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나를 내려주게.”

호임은 차에서 내려 차로를 걸었다. 

촉이 발동한 차기자는 재빨리 카메라에 망원렌즈를 부착하고 앞서 달려갔다. 정체차량의 맨 앞 쪽에 경찰 차단벽이 서 있고 총을 든 경찰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무장 간첩이라도 떴나?”

차기자는 망원렌즈를 통해 저쪽 상황을 줌으로 당겼다. 차단벽 안쪽에 표범 한 마리가 숨을 헐떡이며 앉아 불안한 표정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기자, 너 미리 알고 이쪽으로 온 거야? 단독취재 한 건 땄어.”

차기자는 신이 나서 촬영했다.

호임을 발견한 표범이 벌떡 일어나 이쪽을 향해 걷기 시작하였다. 경찰이 총을 겨누었다.

“쏘지 마시오! 쏘지 마시오!”

호임이 소리치며 걸어갔다. 

표범은 마지막 힘을 모아 차단벽을 뛰어넘었다. 

탕!

한 발의 총성에 표범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안 돼~”

호임의 비명이 메아리 쳤다. 

“사살 명령이 내려진 겁니까? 수면제인가요? 실탄인가요?”

카메라를 든 차기자가 경찰을 향해 질문을 퍼부었지만, 호임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동물원 탈출 네 시간 만에 경찰이 쏜 총에 맞은 표범, 한 할머니의 품에서 숨을 거두다.’

의주는 차기자의 단독 기사가 실린 신문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사진에는 죽어가는 표범 머리를 무릎으로 받쳐 안은 호임 할머니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잘된 일일까 잘 못 된 일일까? 채점해 주는 선생님도 없는 시험을 친 기분이었다. 호임 할머니가 눈을 감기 전에 한순간 훑고 간 빛줄기를 아무도 못 봤지만, 의주는 보았다. 

불빛 틈새로 어린 호임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왼쪽 땅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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