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버스 판타지 단편소설 8)
사냥꾼들에게 잡혀 온 춘영이 정신을 차린 곳은 어두운 방이었다.
사내 하나가 희죽거리며 옷을 벗고 있었다.
춘영이 놀라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한 사내가 춘영의 팔에 주사를 놓던 장면이 떠올랐다.
옆방에서는 여자들의 울음소리와 비명, 사내들의 고함과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춘영은 매춘굴로 끌려온 것이었다. 춘영은 다가오는 사내의 목을 물어 기절시켰다. 사내의 옷을 입고 방을 나서는데 포주가 불렀다. 춘영의 미간이 일그러지며 손톱이 칼처럼 돋았다.
포주가 방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보쇼. 신발은 신고 가쇼.”
춘영은 비틀거리는 척을 하며 고개를 숙인 채 사내의 신발을 신었다. 신발이 커서 덜덜거리자 포주가 어깨를 붙잡았다.
춘영은 뒤통수를 맞고 쓰러졌다.
포주는 춘영의 목에 목줄을 채웠다. 그러자 춘영의 몸이 여우로 변했다.
“사냥터에서 총맞아 죽을 것을 꺼내와서 인간 만들어놨더니, 지가 진짜 인간인 줄 알고 까불어?”
그렇게 끌려간 춘영이 정신을 차린 곳은 짐승 우리였다. 던져 주는 먹이가 생닭이었다.
어느 날 밤, 김승룡이 들어와 여우의 목줄을 풀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춘영의 몸을 김승룡이 덮쳤다.
잠시 후 김승룡은 다시 목줄을 채우고 여우 우리를 나갔다.
이 일은 여러 달 반복되었다.
어느 날 춘영을 욕보인 김승룡이 목줄을 채우려는데. 춘영이 거부의 손짓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배를 만지게 한다.
김승룡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수태했다고?”
놀라서 뺨을 때리고 목줄을 채웠다.
다음날 사내들이 여우를 자루에 담았다.
산에 묻으려하자 여우는 손목을 물고 도망친다.
**********
김회장의 아들들이 병실에 모여 있다.
각종 기기들에 연결된 김회장이 누워있고 아들들은 심각한 표정이다.
장남이 입을 뗐다.
“언제까지 아버지를 이렇게 모셔 둘 거야?”
그러자 둘째 아들이 대꾸했다.
“아버지 사망 선고 내려서 회장 자리 꿰차려고 그러시오?”
그 사이에 막내아들 완섭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아버지도 이제 편히 쉬셔야지 언제까지 붙들어 놓겠어요? 힘들어 하시는 것 좀 보세요. 자식 된 도리는 해야지요.”
그러자 두 형제가 한편이 되어 경멸의 눈빛으로 소리쳤다.
“호흡기 떼어내고 아버지 사망선고 내려 유언장 공개되면, 첩 자식인 네게 회장직을 맡겼을 까봐?”
장남의 일갈에 막내아들 완섭은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병실 문을 나섰다.
병원을 나왔지만 집에는 들어가기가 싫었다.
완섭에게 ‘첩자식’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준 노모가 며칠 전에 갑자기 대문을 두드렸었다.
“시골집에 자꾸 여우가 보인다. 무서워서......”
하며 밭일하던 옷차림으로 집에 들이닥치니 아내의 얼굴 색깔이 분 단위로 변했다.
아이들은 자꾸 간섭하고 잔소리하는 할머니 때문에 집에 늦게 들어왔고, 아내는 완섭에게 바가지만 긁어댔다.
“당신 어머니 오고부터 기분이 이상해. 자고 나면 애들이고 내 몸에 손톱자국이 나 있어. 가죽소파에 이빨자국 같은 것도 나 있다니까.”
“집에 개를 키우는 것도 아닌데 무슨 이빨자국?”
완섭은 노모를 대놓고 싫어하는 아내의 바가지를 무시하려 애썼다.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으니 노모는 퇴근한 완섭을 붙잡고 자꾸 말을 걸어 성가시게 했다.
그런데 오늘은 새벽에 화장실 가던 완섭은 주저앉을 뻔했다. 막내 아이 방문이 열려있어 들여다보니 노모가 아이 머리맡에 앉아 있는 모습이 어찌나 기괴하던지.
완섭은 집에 들어가기 싫었지만, 노모를 위해 들어가야 했다.
무거운 마음을 끌고 집에 들어서니 못 보던 개가 현관 앞에 서서 그르릉 거렸다.
“뭐야?”
아내가 개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애들도 집에 잘 안 들어오고 적적해서 한 마리 들였어요. 우리 메리골드 귀엽지요?”
“어머니는?”
“글쎄요 메리골드 오고부턴 보이지 않네요.”
완섭은 무책임한 아내의 말에 화가 치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들이 공경하지 않는 어머니를 어느 며느리가 어른 대접할까?
아내는 변명하듯 한마디 했다.
“걱정 말아요. 전쟁터에 떨어져도 끄떡없는 분이셔요. 시골집에 내려가셨겠죠.”
속을 뒤집는 아내의 말투에도 화를 참아야 하는 완섭이었다. 사위가 김회장의 혼외자라는 것을 아직 처가에서는 알지 못하는 것 하나로 아내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완섭은 밤새 여우고개를 헤매는 꿈에 시달리다 새벽 일찍 집을 나섰다. 기사도 없이 손수 운전하여 시골집으로 향했다.
완섭이 어릴 때 떠나온 길이 차창으로 휙휙 지나갔다.
완섭이 중학교 갈 나이가 되자 김회장 비서가 완섭을 데리러 왔다.
낯선 생부의 집에서 완섭은 이복형들의 장난감으로 지내야 했다. 온갖 멸시를 견디며 살아남느라, 자식을 빼앗긴 생모의 살점 뜯기는 고통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가끔 말없이 끊기는 전화를 통해 생모가 아들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만 했었다.
고등학교 때던가 이복형과 그 친구들이 완섭을 산으로 끌고 가서 몰매를 때릴 때가 있었다. 몇 대만 더 맞으면 죽지 싶은 순간, 어디선가 번개처럼 달려들어 그들을 때려눕히고 사라진 이가 있었다.
그때 완섭은 설핏 생모의 땀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밭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던 어머니의 땀냄새에는 산짐승의 비릿함이 배어 있었다. 종일 혼자 있던 어린 완섭은 어머니의 땀냄새를 맡으면 안심이 되었었다.
날이 저물 무렵 완섭은 시골집에 도착했다.
날씨가 꽤 쌀쌀한데 굴뚝이 조용했다. 마당에 풀들이 마구 자구 자라고 바람이 흩어놓은 집기가 그대로 널려 있었다. 섬돌 아래 신발에는 가랑잎이 쌓여 있었다.
완섭이 떨리는 손으로 방문을 열었더니 방 안에 시신이 반듯하게 뉘어있었다.
놀란 완섭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때 웬 노인이 완섭을 제치며 방으로 들어섰다.
“춘영아 내가 왔다. 청설이 왔다.”
청설이라는 노인은 시신에 엎드려 오열했다.
“춘영아, 너를 찾느라 이 세상을 다 뒤졌건만, 이 모습이더냐? 춘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