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버스 판타지 단편소설 10)
다온은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누군가 뒷옆구리를 가격하는 통증을 느꼈다. 돌아보며 뒤에 선 사내를 냅따 떠밀었다.
“뭐야?”
난데없이 밀침을 당한 사내는 다온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런데 다온은 통증을 못느꼈다. 맞고도 반응이 없는 다온을 보자 사내가 더 화를 냈다.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밀쳐?”
“당신이 내 옆구리 먼저 쳤잖아요.”
“내가 언제 당신 옆구리를 쳤다고 그래? 본 사람 있어요?”
사내가 주위에 물었더니 다들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다만 싸우는 장면이 재미있으니 계속하라는 표정이었다.
두 사람은 한데 엉겨 붙어 싸웠고 지구대로 연행되었다. 서로 상대가 먼저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cctv 확인결과 다온의 선제공격이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다온은 의주에게 연락했다. 의주가 도착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사이에 다온은 또 얻어맞는지 아프다고 난리쳤다.
“아무래도 술이 안 깨서 괴로운 모양인데, 제가 병원에 데리고 가도 되겠습니까?”
하여 겨우 꺼내왔다.
의주의 차에 앉아서도 아프다고 끙끙 앓았다. 보다 못한 의주가 버럭했다.
“여긴 아무도 없으니까 그만 좀 해.”
“이게 꾀병으로 보이냐? 귀신인지 뭔가가 자꾸 때린단 말이야.”
하며 윗옷을 걷어 보였다.
의주가 보기에도 몸에 자꾸 벌겋게 타박의 흔적이 남으니 의아했다.
“일단 병원부터 가 보자.”
내과 외과 정신과 다 들러봤지만, 별다른 증세는 없고 스트레스 때문이라며 잘 먹고 푹 쉬면 괜찮다고만 한다.
아프고 분해서 한숨도 못 잔 다온은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사람들과 부딪칠까 조심조심 걷던 다온의 눈에 ‘날개 잃은 선녀’라는 간판이 띄었다. 다온은 저도 모르게 가게 문을 열었다.
입구에 택배상자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가게 안쪽에는 옷가게인가 싶을 정도로 긴 옷걸이가 늘어서 있다. 옷걸이에는 택도 떼지 않은 옷들이 걸려있었는데 색깔과 모양이 똑같은 옷도 있었다.
‘오른 손이 산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
라고 벽에 붙어있는 글귀도 심상치 않았다. 홈쇼핑 중독에다 무얼 샀는지 기억을 못 해 샀던 옷을 또 주문한 모양이었다. 안쪽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새나왔다.
“그래, 우리 사장님은 필요한 게 뭘까?”
남자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요새 아내가 애교부리는 게 좀 귀찮아 져서.........”
다온은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날개 잃은 선녀인지 하는 여자가 부채를 흔들며 상담을 해주고 있었다. 남자 목소리가 이어졌다.
“선녀보살님, 요새 야근이다 출장이다 오죽 바쁜가요? 몸이 천근만근이라 좀 쉬려고 하면 아내가 속이 비치는 잠옷을 입고서....... ”
하소연 하는 남자의 표정이 몹시 지쳐보였다.
“신혼도 끝났다 이거군요. 그런 거라면 염려 마요. 여기 딱 맞는 약이 있지.”
여인은 진열장을 열어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준다.
“이걸 먹이면 사장님이 원할 때만 애교를 부리게 해 줄 테니 걱정 끝.”
“이 가루를 먹이면 내가 원할 때만 애교를 부린다고?”
남자는 벙싯거리며 복대를 두둑이 내놓았다.
다온이 보기에는 집 밖에서 써먹을 것 같은 남자의 표정이었다.
“다음 오빠는 뭐가 필요할까?”
하고 동행의 남자에게 물었다.
“그게 말이지........ 내가 묻어 놓은 비자금이 감쪽같이 사라졌지 뭐요?”
선녀보살은 태블릿을 열어 화면 위에다 쌀을 뿌렸다.
“으흠, 이번 비자금은 액수가 좀 크네요. 여깄네요. 마나님 속옷 서랍 바닥에 묻혀 있긴 한데........ 그 비자금 봉투를 다시 회수하기는 쉽지만, 근본 해결책은 아니에요. 사장 오빠가 비자금을 어디다 숨기든 마나님은 기가 막히게 찾아낼 테니. 주식이나 펀드까지 다 찾아낼 걸요.”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소?”
“오늘 꽃 한 다발과 예쁜 속옷 한 벌 사들고 들어 가셔요. 아껴 쓰느라 당신 속옷이 낡았더군, 이러면서 말이에요. 그럼 마나님이 감동받아서 ....... 내일 저녁이면 비자금이 제 자리에 돌아와 있을 테니........”
“그게 무슨 처방이야? 나도 약 한 병 줘요. 사람 마음 조종하는 약.”
“그런 약은 불법이에요. 마나님한테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하면 마나님은 당신한테 간도 신장도 떼어 줄 텐데, 그걸 못 하겠다고?”
선녀보살은 부채로 훠이훠이 남자들을 내쫓았다.
“뭐 이런 데가 다 있어?”
한 남자는 화를 내고 한 남자는 벙싯거리며 점집을 나갔다.
다온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별것 아닌 고민도 있다며 실소했다.
“어이 거기! 지 코가 석자인지도 모르는 청년.”
선녀보살이 다온을 향해 접은 부채를 가리켰다.
다온이 두리번거리자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 놈 너, 냉큼 들어오지 않고 뭐해?”
다온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선녀보살이 대뜸 반말로 다온을 불렀다.
다온이 혼내주려다 뭔가 아는 점쟁이다 싶어 일단 기선을 내주어야 했다. 다소곳이 선녀보살 앞에 앉았다.
“귀신이 자꾸 때려. 꿈속에서도 때리고 현실에서도 때리고. 누군가 때려서 돌아보면 아무도 없어. 그리고 정작 사람한테 직접 맞을 때는 통증을 못 느껴.”
다온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선녀보살은 혀를 찼다.
“다른 사람의 통증을 대신 느끼는구먼.”
“뭔 소리야?”
선녀보살은 sns를 뒤져 ‘#매 맞는 여자’ 영상을 찾아낸다.
“통증을 느낀 시간이 어젯밤 여덟시 쯤?”
다온이 어떻게 아냐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이 여자야, 당신이 대신 통증을 느껴주는 사람.”
하고 보여준 영상에는 길에서 남편에게 옆구리를 걷어차이는 여자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주위사람들이 말렸지만 ‘내 마누라 내가 패는데 누가 지랄이야?’ 하며 소리쳤다. 행인들이 찍어 올린 영상이 여러 개 있었다.
다온은 영상 속의 여자를 찾으러 다녔다. 모퉁이를 돌다 무언가에 부딪쳐 쓰러졌다.
“학생! 정신 차려요!”
명혜는 놀란 가슴으로 달려가 다온을 흔들었다.
“괜찮아요. 먹을 것 좀 주세요.”
다온은 모기소리 만 하게 대답했다.
명혜는 카트에서 우유를 꺼내주고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사다 주었다.
“천천히 먹어요.”
다온은 찐계란까지 다 먹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다온의 눈빛이 제법 생기가 돌았다.
“병원에 안 가 봐도 되겠어요?”
“부딪힌 게 아니고 피하다가 넘어진걸요. 귀신에게 시달리느라 며칠 굶었더니 어지러워서요. 저는 여기서 소화 좀 시킬 테니 아주머니는 이제 가셔도 됩니다.”
“그냥 갔다가 나중에 문제 되면 더 곤란해질 텐데.”
명혜는 어쩌지도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때 명혜의 휴대폰이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그러자 남자 하나가 나타나 머리채를 잡는다.
“이젠, 남편 전화를 씹어?”
하며 명혜의 전대에 손을 댄다.
“이 돈은 안 돼요.”
남편의 손찌검이 시작된다.
다온은 다급히 남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뭐야? 내 마누라 내가 훈육하는데 웬 놈이 끼어들어?”
“내가 아파서 그래.”
“이 새끼가 남의 마누라 맞는 걸 아파해? 너희 둘 무슨 관계야?”
사내의 주먹이 다온의 턱에 꽂혔지만 다온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아무래 때려도 꿈쩍 않는 다온에게 질린 사내가 욕을 하며 떠나갔다.
“너희 연놈들, 두고 봐!”
그때 명혜가 전화를 받더니 소리쳤다.
“뭐라고요? 우리 아들이.........”
전화를 끊은 명혜가 다급하게 부탁했다.
“저기...... 정말 미안한데,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러니 카트 좀 봐 줄래요? 부탁이에요.”
명혜의 울 듯한 표정에 다온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명혜는 넋이 나간 채로 택시를 잡아타고 가버렸다.
다온은 딱히 갈 곳이 정해 진 것이 아니라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난감하긴 했다. 그래도 열심히 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채주스 하나 주세요.”
지나던 아주머니가 이천 원짜리 하나를 내밀었다. 다온은 얼결에 카트의 냉장고를 열었다. 아주머니는 익숙한 듯 주스 하나를 꺼내어 가져갔다.
그랬더니 편의점 주인이 나와서 항의했다.
“이 봐요! 여기서 장사하면 어떡합니까?”
다온은 카트를 밀었다. 운전을 할 줄 몰라 낑낑대는데 여자아이 하나가 다가왔다.
“이거 우리 엄마 카트인데. 아저씬 누구에요?....... 어? 지난번에 우리집에 베개 팔러 왔던 아저씨네?
과연 다온이 베개를 바꾸었던 집의 아이였다.
“어~ 네 엄마가 급한 일이 생겨서 우유 수레를 맡기셨어.”
“그래요?”
여자아이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더니 울먹였다.
“오빠가 일하다가 사고를 당했대요. 지금 중환자실에 ....... 언제 깨어날 지도 모른대요. 우리 오빠 어떡해요? 잠을 못 자서 눈이 벌겋더니 엉엉........”
다온은 점집의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들이닥쳤다.
“내가 통증을 대신 느끼는 사람을 찾았어.”
택배상자를 열어 새 옷을 꺼내던 선녀보살이 깜짝 놀랐다.
“영업 끝났어. 내일 와.”
선녀보살은 다온을 본체만체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몸에 대보며 거울에 비춰보았다.
다온이 정곡을 찔러주었다.
“왼쪽땅 얘기를 하던데, 너도 저쪽에서 건너왔어? 옷을 계속 사들이는 걸 보면, 이쪽으로 건너 와서 뭔가 잃어버린 것 같은데........”
선녀보살은 옷을 내던졌다.
“너 때문에 김샜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보아하니 너는 왼쪽땅 출신은 아닌 것 같고......”
“내 이름은 다온이야. 얼마 전에 호임이라는 할머니랑 엮이게 되면서 알게 된 백발노인의 사주를 받아, 아니 주문을 받아서 낡은 베개 하나를 찾아다 줬거든. 그런데 베개를 잃은 청년이 잠을 못 자서 사고를 당했대. 내가 대신 느끼는 이 통증은 그 청년 엄마의 것이었어. 뭐 이런 꽈배기 같은 인연이 있다니?”
“흐음.”
가만히 듣고 있던 선녀보살은 붓을 들더니 붉은 물감으로 그림인지 글씨인지를 그렸다.
“일단 이 부적을 지니고 다녀 봐. 50만 원.”
“이런 종이 쪼가리가 50만 원이라고?”
“싫음 말든가.”
선져보살이 부적을 찢으려는데 다온의 몸에 또 통증이 느껴졌다. 그놈이 또 제 아내를 때리는 모양이었다. 다온은 부적을 빼앗듯이 낚아채고는 달려나갔다.
“네가 잃어버린 날개옷을 찾아 줄게. 퉁?”
다온은 가야할 방향을 몸의 통증으로 알아냈다. 명혜가 가까워질수록 통증이 또렷했다.
과연 명혜는 집 앞에서 남편 신득에게 맞고 있었다.
다온이 달려들어 몸으로 막았다. 다온의 등에 신득의 구둣발이 내려찍는데도 아프지가 않았다.
화가 더 솟구친 신득은 화단의 보도블럭을 뽑아들었다. 죽일 듯이 달려들던 신득이 다온 앞에서 엎어졌다.
웬 검은 정장의 사내가 신득의 뒷목을 가격한 것이었다. 사내는 검정 세단 옆으로 신득을 끌고 갔다. 차창이 열리니 중년의 남자가 괴로운 표정으로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이놈이야? 텔레파시로 나를 두들겨 패는 놈이?”
“그렇습니다.”
경호원이 대답하자 신득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언제 사장님을 .......”
“네가 저 친구를 때리면 내가 통증을 느껴. 도대체 무슨 술수를 쓰는 거야?”
“잘못 했습니다. 다시는 저 친구를 때리지 않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신득은 머리를 땅에 박고 빌었다.
경호원이 신득을 차에 태우려하자 명혜가 붙들었다.
“이러지 마세요, 제발.”
그러자 차창이 스르르 닫혔다.
경호원은 신득을 놓아주며 말했다.
“저 친구 근처에도 가지 마라. 지켜보고 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다온만 신이 났다.
“뭐지? 김승룡 회장의 맏아들이 내 수호천사야? 나 인생 피는 거야? 그런데 왜 나를 모셔가지 않지?”
하며 깡통을 걷어찼는데 신득의 머리로 날아갔다.
신득이 돌아보자 다온은 앞에 가서 까불었다.
“왜? 뭐? 또 때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