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버스 판타지 단편소설 11)
신득은 인사동 뒷골목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운이 없어도 정도가 있어야지.
바닥에 뒹구는 낙엽이 마치 신득이 코인에 퍼부은 전재산 같았다. 집을 팔아 작은 전셋집으로 옮기고 남은 돈으로 주식을 했지만 빚만 생겼다. 조기퇴직을 하고 받은 퇴직금을 코인시장에 야심 차게 쾌척하였건만, 백원짜리 동전 몇 개가 튕겨 나왔을 뿐이었다. 급하게 당겨쓴 사채 때문에 신용등급이 낮아 취업도 되지 않았다.
“먼지 쌓인 요강단지도 인사동에서는 저리도 몸값이 좋은데, 인간 골동품은 마누라나 패는 쓰레기구나.”
신득 답지 않게 꽤 정직한 푸념을 쏟아냈다.
“좋겠다. 마누라는 편 들어주는 외간남자도 있고, 나는 그놈한테 손도 못 대고.”
구시렁거리며 좁은 모퉁이로 꺾어 드니 허름한 가게 간판이 눈길을 붙잡는다.
‘꿈속의 고향 흑첨향’
신득은 꿈속의 고향이라는 이름에 끌렸다. 가끔 꿈속에서 호젓한 시골집을 향해 걸어가곤 했었는데, 항상 그 시골집에 닿기 전에 꿈에서 깼다.
신득은 호기심이 동하여 들어가 보았다.
주인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무도 집어가지 않을 잡동사니만 그득하니 지키고 있을 필요도 없어 보였다. 사기요강이니 촛대니 놋그릇이니...... 시골 빈집이나 털어왔을 듯한 물건들 끝에 족자 하나가 둘둘 말려 있었다.
신득은 생각 없이 족자를 펼쳐보았다. 민속촌에서 보았던 한옥의 뒷문이 한지 전체를 떡하니 채우고 있었다. 문이 닫혀있어 세상 답답한 그림을 내려놓고 가게를 나섰다.
갈 곳이 없는 신득은 피시방에서 밤을 지새우기로 했다. 라면을 먹으며 웹서핑을 하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발견했다.
<<동야휘집>>이라는 고문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흑첨향’ 이야기였다. 골동품 가게 이름도 흑첨향이더니, 게다가 주인공 이름이 석신득이라니........ 신득은 흥미를 갖고 읽어 내려갔다.
석신득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유모 집에 의탁해 살았다.
약관의 나이가 되었지만 혼인도 못하고 유모네 가족의 눈치만 보며 지냈다.
어느 날 꿈에 부친의 친구가 와서 부친이 남긴 재산이 있다며 자기집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부친이 예전에 마련해 놓은 집과 재산이 있었다.
남자 혼자 재산을 관리할 수 없어 그 집의 딸과 혼인하기로 했다. 혼인 준비를 다 하고 돌아눕는 바람에 그만 잠에서 깨고 말았다.
유모 집의 낡은 행랑방에서 꿈을 깨니 허탈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종일 탄식하다가 밤에 다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혼인을 하고 장인이 뒷돈을 써서 관직에도 넣어주었다.
그의 아내는 옷감과 곡식을 사 두었다가 비싸지면 팔아서 석신득은 흑첨향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잠에서 깬 신득은 더 이상 과거시험 준비도 하지 않았다.
“내 삶은 깨어 있는 지금이 꿈이요, 꿈속이 내 현실이니, 평생 먹고살 걱정이 없도다.”
그 꼴을 보며 유모가 혀를 찼다.
“그곳이 꿈속 이상향이라 안타깝구나.”
이야기를 다 읽은 신득은 아련해 오는 가슴을 어찌할 줄 몰랐다.
자신도 꿈속에서 보던 그 시골집에서 홀로 살고 싶었다. 이제는 돈도 싫고 가족도 귀찮아졌다. 나이 마흔에 자식이 둘이라니...... 딴에는 잘해 보려고 벌인 일들이 헛발질이 되고, 되려 담장이 넘어지고 사나운 개가 달려 나오는 꼴이 되어버렸다.
깝북 잠이 든 신득은 꿈을 꾸었다.
낮에 보았던 그림 속 중문이 안갯속에서 나타났다.
뒷문 너머로 보이는 산에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안개에 묻혀 보일락 말락 하고 있었다.
신득은 문을 열고 바위를 향해 걸었다. 어느새 바위에 올라선 신득의 머리카락이 안개에 젖어 촉촉했다. 둘러보니 산 아래에는 마을이 안개에 잠겨 마치 수중도시 같았다. 멀리 보이는 용궁 같은 기와집이 낯설지가 않았다. 그 기와집을 향해 걷다가 담장 기와에 어깨를 부딪쳤다.
어깨 통증에 눈을 떴더니 사채 수금원이 신득의 어깨를 쥐어박고 있었다.
“여기 숨어있으면 못 찾을 줄 알았냐?”
하며 신득을 끌고 나갔다.
이대로 끌려가면 신체포기각서를 써야 할 판이다.
신득은 계단을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딘 척 대굴대굴 굴러 그대로 도망쳤다. 그러나 뛰어봤자 차량으로 뒤따라오는 그들을 벗어날 수 없었다.
신득은 인사동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제 갔던 골동품 가게로 들어갔다.
돌절구 뒤에 엎드리니 수금원들이 가게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신득이 바짝 엎드려 기어가니 족자가 앞을 막았다. 어제 보았던 그림 족자가 펼쳐져 걸려있었는데, 그림 속 문이 활짝 열려있는 것이 아닌가?
신득이 의아해하는데 가게 문이 버럭 열렸다.
“잘도 숨는구나 쥐새끼 같은 놈!”
수금원이 다가오자 신득은 저도 모르게 그림 속 문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리고 잽싸게 문을 닫아걸었다. 다행히 녀석들은 문을 두들기지 않았다.
세상 조용한 아침을 맞은 신득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순간 등 뒤에서 날카로운 일갈이 날아들었다.
“문을 닫아버린 거야?”
웬 할멈이 놋화로를 들고서 화를 내는 것이었다. 할멈은 문을 열어 내다보더니 화로를 패대기쳤다.
“이제 돈줄이 막혔으니 어찌 먹고살까? 집기들도 죄다 거기다 뒀는데.......”
하며 신득을 죽일 듯이 바라보는 것이었다.
신득이 자세히 보니 그 할멈은 골동품 가게에서 꾸벅꾸벅 졸던 노인이었다.
신득이 의아하여 문밖을 내다보니 골동품 가게가 아니라 민속촌 거리였다.
그런데 지나는 사람들 옷차림이 죄다 낡은 무명 한복에 지게를 진 남자, 머리에 물동이를 인 아낙들이었다. 가마꾼들, 노새에 봇짐을 얹은 짐꾼까지. 이 정도면 민속촌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 출연자 수준이 아니었다.
신득은 고개를 흔들었다.
인사동 가게에서 그림 속으로 뛰어들었는데 조선시대라니. 이 무슨 조화인가?
할멈이 거칠게 마당을 쓸며 잔소리를 해댔다.
“흑첨향 제일 부자가 되었다면서 왜 다시 돌아온 것이야? 왜 문을 닫아서 더 이상 건너가지도 못하게 하느냔 말이야? 요강단지 하나를 내다 팔아도 거기에서 팔면 열 배 스무 배를 받을 수 있는데, 이제는 무얼 팔아서 먹고산단 말인가? 젖어미 노릇 한 번 한 죄로 고아가 된 상전 아들 거두어 먹이고 입혔으면, 은혜를 갚아도 모자랄 판에 쪽박을 깨?”
신득은 고개를 갸웃했다.
“젖어미라고? 내 유모라고?”
그제야 신득은 오래 전의 일들이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보던 시골집이 이 집이었어? 고문서에서 읽은 석신득 이야기가 나였어? 여기가 내 현실인 거야?”
신득의 허탈한 웃음이 마당에 그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