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은 일기 비슷한 그 어떤 것도 쓸 수 없었다.
하얀 백지를 변기 삼아 배설해 내던 묵힌 감정들조차 변비에 걸린 것 마냥.
무언가 '탁'하고 막혀 나오지 않고 한 곳에 자꾸만 쌓이는 기분이 들었다.
책상은 치우지 않은 채 물건들로 여기저기 어지럽혀져 있고.
눈뜨면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살아갔다.
나가야 하는 날은 부랴부랴 준비해서 외출을 했고.
집에 돌아오면 생각하지 않고 핸드폰을 하며 시간을 죽였다.
아마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끝까지 외면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 안으로 들어가서 가라앉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밖으로 나가서 걷고 오는 게 더 나은 날들이 많았다.
걸으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저 걷는 동안 내 옆을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봤다.
어떤 날은 산딸기가 가득 열린 걸 보며 신기해했고,
또 어느 날은 맨발로 흙의 감각을 느끼며 걷는 어르신도 봤다.
엄마 따라 산책 나온 제 몸도 못 가누는 아가들, 귀여운 동물들.
작고 귀여운 존재들을 바라보며 웃기도 했다.
현재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 몸을 숨겼다.
무더위가 찾아왔고 초록색 풀은 더더욱 무성해졌다.
내 감정과 상황에 상관없이 여전히 자연의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제 할 일들을 해내고 있었다. 제 갈 길들을 걸어갔다.
그런 기분으로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들을 보며 한 달 정도가 지났다.
굳이 애써서 이겨내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날 내버려 두고 싶었다.
때로는 이겨내지 않고 가만히 두어야 하는 감정들도 있구나.
그래야 천천히 나의 속도로 내 안에서 나올 힘이 생기는구나.
그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나는 다시 극복하는 중이다.
산책을 하고, 카페에 가고, 가고 싶었던 도서전도 다녀오고.
책상을 치우고, 조금 채워진 마음으로 오랜만에 글을 쓴다.
지금의 생각과 감정들을 외면하지 않고 온전히 적어 내려 간다.
원래 삶이란 이런저런 일이 있는 법이다.
크고 작은 일, 기쁘고 슬픈 일. 모든 것들이 모여 '나'라는 일기(一期)가 완성된다.
몇 번의 휘청임은 나를 한 단계 성장하게 만들어 줄 테고.
그래왔듯 나는 잘 살아갈 것이다.
우리 가족은 다시 잘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