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사람의 혼이 추구하는 세 가지 근본 가치, 진(眞)·선(善)·미(美)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음악과 미술 같은 감각적 경험 속에서도, 수학과 철학 같은 추상적 개념 속에서도 발견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간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
그리고 혼의 갈망을 이렇게 표현한다.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고 하거든, 그때면 너 나를 사슬에 묶어도 좋다.
그때면 나 기꺼이 멸망하겠노라.”
사람의 혼은 구속과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아름다움을 향해 방황한다. 그러나 신은 이렇게 응답한다.
“언제나 갈망하며 노력하는 자, 우리는 그를 구원할 수 있다.”
괴테가 말한 아름다움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으로 이끄는 길이었다.
사람은 왜 음악, 풍경, 음식, 시에서 즐거움을 느낄까? 사물의 어떤 속성이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할까? 그 핵심은 조화와 균형이다.
1. 조화와 균형
부분이 어울려 전체가 하나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고대 그리스의 조각과 건축, 인체의 황금비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음악의 화음, 색의 조화, 오늘날 디자인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질서와 균형 속에서 편안함과 기쁨을 느끼며,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2. 쾌감과 감응
아름다움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다. 음악이 가슴을 울리고, 누군가의 미소가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을 주는 것도 아름다움의 힘이다. 그때 우리는 쾌감을 넘어 마음의 공명을 느낀다. 아름다움은 나 혼자만의 즐거움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감응의 순간이다.
3. 주관성과 상대성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는 속담처럼,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에 달려 있다. 같은 대상을 두고도 누군가는 감탄하고, 다른 이는 무심히 지나친다. 미의 기준은 개인의 취향뿐 아니라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달라져 왔다. 서양에서는 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건강미로 여겨졌지만, 동양에서는 오랫동안 하얀 피부가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나 장엄한 일출처럼, 시대와 문화를 넘어 모두가 동의하는 우주적 조화의 순간이 있다. 그런 경험 앞에서 사람은 자신을 잊고 경외 속에 잠긴다.
4. 파격과 새로움
조화롭다고 해서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애플 로고의 한 입 베인 사과처럼, 예상치 못한 파격이 신선한 아름다움을 만든다. 예술도 그렇다. 인상주의의 색채 실험, 현대음악의 불협화음은 낯설지만, 그 낯섦 속에서 새로운 감동이 태어난다.
자하 하디드의 “하이더 알리예프 센터”는 이러한 파격의 미학을 보여 준다. 직선과 각을 거부한 거대한 곡선의 흐름이 마치 건축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서울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역시 그러하다. 거대한 금속 곡선이 도시의 직선적 건물들 사이를 흐르듯 자리하며, 전통적인 건축의 경계를 지워 버린다. 낮에는 은빛 외피가 하늘빛을 받아 주변과 조화를 이루고, 밤에는 수천 개의 LED 조명이 별빛처럼 반짝이며 미래 도시의 풍경을 만든다. 관람자는 그 안을 걷는 동안 건물 안을 걷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예술 속을 거니는 듯한 체험을 하게 된다.
서울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역시 이러한 파격의 미학을 보여 준다. 거대한 금속 곡선이 도시의 직선적 건물들 사이를 흐르듯 자리하며, 전통적인 건축의 경계선을 지워 버린다. 낮에는 은빛 외피가 하늘빛을 받아 주변과 조화를 이루고, 밤에는 수천 개의 LED 조명이 별빛처럼 반짝이며 미래 도시의 풍경을 만든다. 내부 공간도 직선 대신 곡선을 따라 이어져, 관람자는 단순히 건물 안을 걷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 속을 거니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아름다움은 결국 자연 속에 있다. 물은 흐르되 한순간도 같지 않고, 구름도 가면서 계속 다른 형상을 그린다. 꽃은 피고 지며, 산은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정해진 틀에 묶이지 않으면서도 자연은 늘 더 큰 질서를 품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 속에서 자유와 평화를 느낀다.
아름다움은 어느 한 기준에만 갇히지 않는다. 자연에서 보듯, 조화와 균형, 쾌감과 감응, 주관성과 상대성, 파격과 새로움, 그리고 자유로움은 서로 얽히며 다양한 모습의 아름다움을 이룬다.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빛의 교회”는 그 좋은 예다. 노출 콘크리트의 차가운 직선 속으로 십자가 모양의 빛이 다가오며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방문자의 감각과 영혼을 일깨우는 강력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단순미 자체가 하나의 파격이 되고, 자연의 빛과 교감하는 순간 자유로움이 드러난다. 이처럼 다양한 요소가 어우러질 때, 아름다움은 단순한 기준을 넘어선 존재 전체의 경험으로 다가온다.
소설 하이디 속 한 의사는 알프스의 풍경 앞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그곳은 아름다운 곳, 몸과 혼이 힘을 얻는 곳, 인생은 다시 살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아름다움은 영혼을 회복시키는 힘이 있다. 나 역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살아가며 자연의 위대함을 경험한다. 도시의 편리함과 더불어 산과 바다, 사막과 협곡이 가까이 있다. 특히 애리조나와 유타주의 세 국립공원, 그랜드 캐년·브라이스 캐년·자이언 캐년은 인간의 언어를 넘어서는 장엄함을 품고 있다. 그곳에서 나는 자유와 평화, 그리고 경외를 느낀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실용적 기능이 아니라, 마음에 직접 닿는 영적 감동이다.
괴테는 파우스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일체의 무상한 것은
한낱 비유일 뿐,
미칠 수 없는 것,
여기에서 실현되고,
형언할 수 없는 것,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아름다움)이 우리를 (천상으로) 이끌어 올리도다.
여기서 ‘여성적인 것’은 곧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아름다움은 단순한 감각적 즐거움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고양하여 천상으로 이끄는 힘이다.
사람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 삶은 방향을 잃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혼을 일깨우고, 우리를 더 높은 세계로 이끌어 올린다. 그것이 혼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유이며, 인간이 결코 완전히 절망할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