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상황이 안 좋으니 시험관을 중단하는 게 어떠냐는 조심스러운 남편의 제안에 고민하던 나는 며칠 뒤 병원에 방문했다.
"선생님 정말 죄송한데.... 집에 안 좋은 일이 생겨서 혹시 지금 시험관을 중단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네? 지금 18개 과배란을 잘 시켜놔서 중단하게 되면 몸의 사이클이 다 무너져요. 정말 위급한 일이 아니라면 채취만이라도 해놓으시는 게 어떨까요? 지금까지 지원받은 지원금도 모두 뱉어내셔야 해서...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난임병원선생님에게 남편이 소송을 진행 중이라는 이야기를 차마 할 수 없었고 하루이틀 만에 소송이 끝나는 일도 아니기에 남편의 힘든 상황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지만 선생님의 현실적인 조언도 이해가 되었다. 결국 나의 생각에도 지금 중단하는 것보다야 채취만 해놓고 조금 쉬었다가 이식하더라도 일단은 지금은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며칠 고민 후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의견을 물었고 남편도 중단할 수 없다면 채취만 해놓자는 답변을 주었다. 물론 시험관을 한다고 한 번에 덜컥 임신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악조건 속에서 이식을 진행한다면 남편에게도 나에게도 한별이에게도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며칠 뒤 남편과 같이 방문한 난임병원에서 남편은 정자만 채취하고 바로 출근을 하였고 나는 혼자서 수면마취 후 난자채취를 했다. 마취가 깬 후 정신이 없었고 불편한 아랫배와 힘든 몸을 이끌고 혼자서 집으로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채취를 하고 몇 개가 나올지 몇 개나 수정이 될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나는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남편의 상황을 알지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울적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는데 안방문을 보고 짖어대는 한별이가 보였다.
불편한 몸이라도 한별이를 산책시켜 주고 약을 먹이고 야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한별이와 함께 하루종일 누워 있었다. 이럴 때 한별이라도 곁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5일 뒤 나는 5일 배양 수정란을 하나 이식할 수 있었고 동결개수는 4개가 나왔다. 채취한 양보다 현저히 작은 동결개수에 힘이 빠졌지만 이런 상황에서 꾸역꾸역 진행한 시험관이었기에 그나마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도 몰랐다. 보통 5일 배양은 이식 후 빠르면 5일 차부터 임테기로 두줄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나는 임테기를 해볼 기대감조차 없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고 한별이를 보살폈다.
그런데 퇴근 후 돌아와 한별이를 화장실에서 꺼내주었는데 갑자기 한별이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나를 바라보지 못했다. 마치 시력과 청력이 한꺼번에 소진되어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두려운 마음에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어 한별이를 만져보았지만 한별이는 아무것도 안 보여서 무서운 듯이 뒷걸음질 쳤다.
스테로이드를 줄이지 않고 오래 먹어서일까. 아니면 뇌수막염이 점점 더 커져 모든 감각이 안 좋아진 것일까. 둘 중 어떤 것이 원인이든지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퇴근 후 돌아온 남편도 한별이의 상태를 보고 더 좌절했다. 다음날 우리는 다시 동물병원으로 향했고 한별이의 상태를 진찰 후 냉정한 진단을 들을 수 있었다. 한별이는 시력을 모두 잃었다고. 이제는 정말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한다고.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이 없고 모든 기능이 퇴화되고 있다고.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 좋아졌다는 희망이 생긴 지 5개월 만에 한별이는 천천히 다시 안 좋아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약을 끊을 수도 약을 계속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임테기로 정확한 한 줄을 확인했다. 우리는 안 좋아진 한별이의 건강. 진행할 수 없는 시험관. 그 어느 것 하나 좋은 소식이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