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동화책에서 많이 보았던 이야기다. 백일동안 꽃 피는 나무라고 하여 목백일홍이라고 불리는 배롱나무 이야기다.(화초인 백일홍과는 다른 꽃이다.)
어느 바닷가 마을에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다. 그런데 섬에 사는 이무기가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한다. 청년은 이무기와 싸우기로 한다. 결전의 날, 청년은 처녀에게 이런 말을 하고 떠난다.
“내가 이무기와 싸워지면 뱃전에 붉은 깃발을 걸고, 이기면 흰 깃발을 걸고 오겠소”
처녀는 바닷가 절벽에서 매일 청년의 귀환을 기도한다. 며칠 후 돌아오는 청년의 배가 보였다. 그런데 뱃전에는 붉은 깃발이 매달려 있었다. 처녀는 이무기와의 싸움에서 청년이 졌다고 생각하고 바다로 몸을 던진다.
그런데 웬걸. 죽은 줄 알았던 청년이 살아서 돌아온다. 청년이 단 흰 깃발은 이무기의 피가 튀어 붉은색으로 물 든 것이었다. 이듬해 처녀가 죽은 무덤에는 여름이 되면 붉은 꽃이 피었다.
7월 초 학교 화단에 배롱나무
여름으로 가는 길목 어느 날 산책하다 아파트 주위의 공원에서 화사하게 피어난 꽃을 보았다. 백일홍이라고도 불리는 배롱나무였다. 한번 관심을 갖기 시작하니 주변에 배롱나무가 꽤 많다는 것을 알았다. 공원에도 피고, 아파트 화단에도 있고, 학교 교정에도 배롱나무가 있었다. 나무로 있을 때는 별 관심을 갖지 않다가 붉은 꽃이 피니 자꾸 눈이 갔다. 올해는 유난히 눈에 자주 띈다. 서울 한복판에 이렇게 많은 배롱나무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시골에 방문했을 때 어느 집 조상의 무덤가에도 배롱나무가 피어 있었다.
배롱나무를 언제 처음 보았을까 생각해 보니 꽤 오래되었던 것 같다. 내장산의 어느 산사였는지 그도 아니면 관광차 떠난 어느 절이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절에서 자주 보았던 것 같다. 고즈넉한 서원이나 고택에 방문했을 때도 보았던 것 같다. 아무튼 배롱나무는 동네 어귀에서는 자주 만나는 꽃은 아니었다.
공원, 아파트 화단, 농가 배롱나무
배롱나무는 예로부터 절이나 서원, 사대부가, 무덤가에도 심었다. 다양한 장소에 두루 배롱나무를 심었다. 배롱나무에 사람들이 여러 의미를 부여한 것 같다.
배롱나무를 사찰에 심은 이유는 붉은 나무껍질을 벗고 흰 속살을 드러내는 모습처럼 스님들이 속세의 묵은 때를 벗고 수행에 힘쓰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서원에는 충직과 청렴의 상징으로 심었다. 배롱나무를 심은 사람이 죽으며 3년간 붉은 꽃대신 흰꽃을 3년간 핀다고 한다. 사대부가에는 부귀를 상징하는 꽃으로 집에 많이 심었단다.
배롱나무는 민가에서는 사랑받지 못했다. 나무껍질이 뼈처럼 흰색이고, 꽃이 붉은색이라 죽음을 상징한다고 여겼다고 한다. 배롱나무는 붉은 꽃이 귀신을 쫓는 나무라하여 무덤가에 심는 풍속이 있다고 한다. 시골에 방문했을 때 무덤가에 핀 배롱나무를 보았다.
나무 하나에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가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변화무쌍하다. 배롱나무에 얽힌 전설과 의미가 심박한데 나무와 꽃도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자꾸 마음이 간다.
배롱나무는 나무껍질을 손으로 긁으며 잎이 움직인다고 하여 간즈름나무 또는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
정말 나무껍질을 손으로 긁으니 잎도 꽃잎도 움직인다. 신기하다. 비 오는 날 비와 바람 때문이려나. 흐흐흐.
나무껍질이 어찌나 매끄러운지 원숭이도 못 오를 것 같다. 그래서인지 배롱나무를 원숭이미끄럼나무라고도 한다.
나무껍질은 연한 붉은 갈색이며 얇은 조각으로 떨어지면서 흰 무늬가 생긴다. 나무가 정말 반질반질한 것이 손으로 만져보고 싶다. 비 오는 날 촬영해서인지 사진은 유난히 색이 선명하고 반질거림이 살아있다. 나무가 자라는 모습도 조금 기괴해 보인다. 독특함이 묻어나는 나무다.
붉은갈색 나무껍질을 벗고 하얀 나무껍질로 변신
배롱나무는 약 5~6미터 크기로 자란다. 꽃은 나무 끝에 매달리는 꽃 원추화서로 홍자줏빛(진분홍)을 띤다. 흰색 배롱나무꽃도 있다. 암수가 함께 피는 양성화 꽃으로 손톱만큼 작은 여러 꽃이 한 덩이로 모여 핀다. 꽃잎은 너무 여려서 금방 똑 떨어질 것처럼 얇고 작다. 꽃잎은 구불구불 주름이 많은 치마 같다. 수국처럼 촘촘하지 않고 조금 느슨하게 모여 핀다. 가까이 보면 꽃을 보면 하나하나가 똑똑 떨어진다.
꽃차례는 길이가 6~8cm,지름 3~4cm 꽃이 달린다. 꽃받침은 6개로 갈라지고 꽃잎도 6개이다. 수술은 노란색으로 30~40개(육안상은 이십여개)로 가장자리의 6개가 길다. 암술대는 1개로 밖으로 나와 있다. 가끔은 어느 게 꽃받침이과 꽃잎이고, 수술과 암술이 뭐가 뭔지 모를 때가 있는데 배롱나무꽃은 경계가 분명하여 쉽게 알 수 있다. 꽃을 보고 있으며 희한하고 이상하게 여겨진다.
꽃은 하나하나 뜯어보면 연분홍 치맛자락을 흔드는 것도 같고, 노랑 암술과 수술머리가 어사화를 쓰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멀리서 나무와 함께 전체를 보면 초록 나뭇가지에 적색 꽃물을 들인 것 같다. 가까이 볼 때와 멀리서 볼 때의 느낌이 확연히 다른 꽃이다.
원추화서 배롱나무꽃
나뭇잎은 타원형이거나 달걀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이며 겉면은 윤이 나고 반질반질하다. 반질거림이 사철나무 잎사귀 같다. 잎 길이 2.5~7cm(직접 관찰하니 3~4cm 정도), 너비 2~3cm이다. 잎의 뒷면은 잎맥에 털이 나 있다고 하는데 육안으로는 분명하지 않다. 앞면에 비해 연한 정도다.
열매는 타원형으로 꽃이 지고 나면 연한초록색으로 생긴다. 10월에 익는다. 나중에 열매가 익어가는 모습도 관찰해야겠다. 열매 속이 여러 칸으로(7~8삭) 나뉘는 삭과이다. 열매의 겉표면만 봐도 방이 나뉘어있는 모습이 금방 눈에 띈다. 하나의 꽃이 하나의 삭을 만드는 것 같다.
배롱나무는 추위에 약해 우리나라 중부이남지방에서 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중부지방에서는 겨울에 잘 보살펴야 한다. 요즘은 지구 온난화로 서울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나 보다.
배롱나무잎사귀가 물을 머금고 매꼬롬. 꽃이 진 자리에 열매
배롱나무꽃은 지혈과 종기의 부기를 가라앉히는 효능이 있으며 한방에서 월경과다, 장염, 설사등에 쓴다. 뿌리와 잎은 백일해, 기침, 혈액순환장애, 대하증에 쓴다. 목재는 견고하고 세공하기 좋아 여러 기구로 이용한다고 한다. 우리 집 가구에서 배롱나무 가구로 만든 것은 없는 것 같다. 다음에 가구를 산다면 배롱나무를 원목으로 사용한 가구를 구입해 봐야겠다.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번지 병산서원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배롱나무(높이 6~9m, 둘레 0.8~0.9m)가 있으며, 부산광역시 부산진에 수령 800년이 넘은 배롱나무가 있다고 한다. 나중에 시간 되면 여기도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