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1 그래서, 내가 왜 좋아?
EP.01 그래서, 내가 왜 좋아?
고백 같지 않던 고백
2018.02.28일, 내가 유럽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던 날,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그녀:"오빠, 나 주말에 강남 가서 피부과 갈 건데 오빠 서울 사니까 구경 좀 시켜줘"
나:"그래,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봐"
그렇게 강남에서 만났고, 그녀는 체크무늬 카디건? 두꺼운 외투에 검정 슬랙스를 입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는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평소에 나는 우산이 길면 귀찮아서 짧은 우산을 들고 다니는데, 그날은 장우산을 가지고 나갔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강남역까지는 지하철 타면 10분 남짓한 거리, 버스를 타도 되고, 지하철을 타도 되지만 뭘 타고 갔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나는 건 우산은 하나만 있어도 됐을 거라는 것.
그녀는 당시 피부과와 성형외과를 많이 돌아다녔고, 나는 그저 따라다니는 지인 역할이었다.
한 성형외과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상담실로 들어갔고, 간호사가 나에게 물었다.
간호사:"남자친구 분도 들어가셔도 돼요"
나:"???"
당황했다. 근데 신기하게 남자친구 아니에요.라는 말은 떨어지지 않았다. 당황한 마음과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을 들킬까 봐 잠시 정적이 흐르자, 간호사는 남자친구 아니냐고 그녀에게 물었고,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그녀:"맞을 걸요?"
머리가 멍했다. 내 22년 인생 중에 이런 날이 오다니. 성형외과를 나와서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밥을 먹으러 토끼정이라는 파스타집에 가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문을 닫아서 근처 스테이크 집으로 들어갔다.
스테이크를 먹으면서도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밥을 먹고 나서는 수플레 팬케이크를 먹으러 갔는데, 그녀는 유독 그런 음식을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5년이 지난 지금, 나도 팬케이크가 가끔 생각나곤 한다.
팬 케이크를 먹으면서 연애 얘기가 나왔다. 마음속에서는 지금 당장 고백해!라는 외침이 나왔지만, 나는 자그마치 22년 모솔 경력자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하소연 하듯이 말했다. '나도 연애하고 싶다~'라고.
그러자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그녀:"그래서, 오빠는 내가 왜 좋아?"
마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네가 하는 행동들이 다 너 다워서, 네가 너 그 자체라서 좋아, 좋아해"
진심이 전해진 걸까, 우리는 팬케이크집에서 손을 잡고 나왔다. 아니면 팔짱을 끼고 나왔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강남에서 학교가 있는 춘천으로 같이 버스를 타고 왔다.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고, 나는 자취방에 들어와서 동네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나:"지윤!!! 나 여자친구 생겼어!!!"
지윤:"...???? 야 다시 말해봐 뭐라고?"
나:"여자친구 생겼다고!!!"
지윤:"구라 치지 마 이게 말이 돼?ㅋㅋㅋㅋㅋㅋㅋ"
나:"진짜야, 그래서 바로 너한테 전화했잖아."
동네 친구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고, 나는 카톡창의 맨 위에 그녀를 올려놓고 잘 자라는 말을 남기고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그렇게 2018.02.28일, 내 인생에서 가장 파란만장했던 연애가 시작됐다. 그 사람의 기억에서도 내 실수와 별개로 연애했던 기억들은 좋게 남아주길.
-P.S-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사실 출판이 되고 나서 그녀에게 선물하려고 했었다. 마치 내가 소설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아직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의 반증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진정으로 이별을 받아들였다면 그녀를 잊으려고 노력했을 테니까.
내가 여태까지 방황했던 이유 중 하나는 시작을 못해서였다. 한 발자국을 내딛을 땐, 발자국이 어디에 놓이는지 바닥을 잘 보면 되는데, 나는 저 멀리 산과 언덕, 바다를 바라보며 지레 겁에 질려버렸기 때문에 시작조차 하지 못한 일이 다반사였다.
지금 글을 쓰는 이유는, 없다. 그저 쓰고 싶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장황한 목적을 세워서 글을 쓰기보다는 글을 쓰면서 목적을 찾아가는 글쓰기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