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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드로 Dec 31. 2023

EP.09 우리의 세 번째 여행, 괌(4)

잊지 못할 그날의 레스토랑, 그날의 화이트와인

그녀: 오빠, 영수증 못 봤어?


나:그거 쓰레기통에 있을걸? 뒤져볼까?


숙소에 들어와서 이제 씻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던 도중, 그녀는 갑자기 잠옷차림으로 그날 쇼핑몰에서 산 트렌치코트를 입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사이즈를 잘못 구매한 것 같다며 환불을 해야겠다고 하더니 영수증이 어딨는지 찾기 시작했다.


이곳저곳 뒤지다가 순간 쓰레기통에 흰색 종이들이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뭔가 느낌이 쓰레기통에 영수증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력하게 들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쓰레기통을 한번 뒤져보겠다고 했는데, 그녀는 날 말렸다. 아마 미안해서였거나, 아니면 절대 쓰레기통에 없다는 생각에서 그랬겠지.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고양이처럼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웬 긴 종이쪼가리를 발견했고, 역시나 그건 그녀의 구매내역이 적힌 영수증이었다.


그녀에게 영수증을 보여주며 찾았다고 말하자, 그녀는 고맙다고 말하며 한편으로는 쓰레기통을 뒤지게 해서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글을 쓰는 도중에 구겨진 영수증을 생각하니 마치 내가 생각하는 우리의 관계 같다. 그녀에게는 찢긴 영수증일 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아직 구겨진 영수증이다. 구겨졌지만, 아직 온전히 영수증은 영수증이다. 나 또한 헤어졌지만 아직도 그 끈을 못 놓고 있는 모습이 마치 구겨진 영수증을 보며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여하튼, 영수증을 찾고 우리는 미친 계획을 짜기 시작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바로 쇼핑몰로 달려가서 환불을 5분 만에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셔틀버스는 9:45분에 도착했는데, 바로 9:50분에 쇼핑몰에서 출발하는 셔틀버스가 있었고, 해당 버스를 놓치면 우리는 살 것도 없는데 그곳에서 시간을 때워야 했다.


우리는 의기투합하여 5분 환불 작전을 세웠고, 다음날에 가서 누구보다 빠르게 환불처리를 하고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이때 그녀를 한번 울리는 일이 발생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그때 우리는 정해진 체크아웃시간에 맞춰서 나올 수 없던 걸로 기억한다. 도중에 식사를 해서 아마 그럴 것이다. 그때 먹었던 건 팬케이크였다. 신기하네, 처음 만날 때 먹었던 게 수플레 팬케이크였는데 기억에 남는 식사가 괌에서 먹은 팬케이크라니.


식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땐 도저히 정해진 체크아웃시간에 맞춰서 나올 수 없었고, 나는 데스크에 30분 정도 여유를 달라 부탁한 뒤 서둘러서 호텔방에 올라갔다. 그녀도 빨리 짐을 쌌는데, 그때는 그녀가 짐도 많고 화장도 해야 해서 시간이 좀 더 걸렸었다. 당시의 나는 그녀를 신경질적으로 재촉했고, 그녀는 재촉하는 나에게 재촉하지 말라며 화를(?) 냈다. (만일 이 기억이 왜곡된 기억이라면 미안한 말을 전한다. 네가 이 글을 본다면)


나는 그때는 체크아웃 연장까지 했는데 빨리 나가야 하지 않냐며 화를 냈고, 그녀는 기어이 프런트데스크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미안했고, 지금도 미안하다. 사실 그때에는 우는 모습을 보이는 여자친구가 울음을 빨리 그치기 만을 바랐다. 이제 와서 보니 정말 최악이네.


그녀에게 미안하다며 달래고 우리는 6성급 츠바키 호텔에 체크인을 하러 갔다. 정말 6성급 호텔답게 모든 게 고급스러웠고, 호텔 앞에서도 그녀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오래 사귄 커플의 장점은 바로 갈등이 생기더라도 정말 해결되지 않는 수준의 갈등이 아니라면 금방 풀린다는 점이다.


울었던 기억은 그녀가 묻었던 건지, 아니면 금방 잊었던 건지 그녀는 다시 해맑게 웃으며 호텔에 짐을 풀고 우리는 호텔 근처의 해변으로 달려갔다.


전날 비와 바닷물을 잔뜩 먹은 래시가드를 입었는데 냄새가 정말 지독해서 우리는 바닷가에는 길게 못 머무르지 못했고, 다시 호텔 수영장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정말 행복하게 잘 놀았다. 잠수를 하기도 하고, 그녀를 업고 유사수영을 시켜주기도 하고,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정말 행복했다.


그렇게 수영을 마치고 우리는 호텔의 레스토랑에 갔는데, 거기서 레드와인을 주길래, 나는 색다른 와인이 먹고 싶어 화이트와인을 주문했는데 그녀는 그게 그렇게 맛있다며 그녀도 그 와인을 마시며 우리는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괌에서의 마지막 밤이 저물었고, 나는 소파에서 잠들었고, 그녀는 침대에서 잠들었다. 나는 그때 피부병을 앓고 있었는데, 흰 이불에 핏자국을 묻히기 싫었고, 호텔 측에서 경제적 손해배상을 청구할까 두려워 일부러 소파에서 잠을 청했다. 미안했다. 같이 껴안고 잤다면 더 좋았을 텐데, 미안한 점이 하나 추가됐네.


아침에 일어났을 땐,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장기 커플이었으니 그녀가 자는 모습은 많이 봤지만 그녀는 정말 음... 뭐랄까, 드라마나 영화에서 왕이 자는 것처럼 대자로 누워서 편하게 자고 있었다. 아마 침대사이즈가 커서 그랬나, 이 글을 쓰는 지금에서도 그때의 모습이 떠올라 피식하고 웃음이 나온다.


우리는 그렇게 괌에서의 마지막날을 보내고, 공항에 들르기 전에 그녀의 회사동료들의 선물을 간단하게 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 글은 2023.12.31일에 쓴다. 원래는 글을 금요일에 맞춰서 연재하려고 했는데, 손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논문발표 ppt를 만들다가 생각난 김에 적어보는 중이다.


항상 맨 정신에 적기 힘들어서 그해 우리는 ost나 유튜브 편집본을 보면서 적고 있다.


2020,2021,2022,2023년, 우리가 이별과 다툼을 반복한 시간들.


2020년에는 내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해서, 헤어졌고


2021년, 2022년에는 나의 꿈을 찾아서 도망갔고


2023년에는 내가 이 관계를 놓았다.


연애와 결혼은 항상 둘이서 손을 꼭 잡고 있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잠시 놓았다가 다시 잡아도 되는 걸까.


나는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놓은 사람이니까.


네가 이 글을 본다고 생각하고 말하면 


나는 잘 못 지냈고, 아직도 잘 못 지낸다.


종종 나도 약속한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네가 내 운명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너는 내 성장의 영양분이 될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을 했다.


근데, 아니더라. 지금은 아니다.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직도 아프다.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 네 이야기가 나오면 내가 먼저 나는 괜찮고, 전 여자 친구는 괜찮은 사람이었으나 내가 준비가 되지 않아 헤어졌다고 한다.


이제는 좀 감정절제가 돼서 친구들을 만나서 네 이야기가 나오는 횟수도 줄었지만, 항상 집에 걸어오는 길에는 네 생각을 하지 않으려 음악을 듣는다. 그러다 이별 발라드가 나오면 그때는 정말 말 다 한 거지.


이제 새해가 되어가고 있고, 이 이야기의 끝이 해피엔딩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게, 아니 어쩌면 이미 이야기는 결말이 났을 수도 있다는 게 날 정말 미쳐버리게 한다.


가끔 네 생각이 날 때마다 지금 내가 미친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글도 끝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어떤 말로 끝맺음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치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히드라의 머리를 자르는 것 같다. 너와의 기억을 마주하고, 마주하며 정리하고, 그 과정에서 내가 더 성숙해지기 위해서 이 글을 썼다. 그런데 글을 쓰고 집에 가는 길에 달을 보면 항상 네가 있더라.


다른 사람들도 이런 사랑을 할까 아니면 유독 나만 이런 걸까.


많이 좋아했고, 아직도 좋아하며, 나의 부족함이 우리의 완벽함을 망가뜨렸지만, 우리는 순간순간 완벽했음을 말해주고 싶다.


또한, 미안하다. 아직도 나는 네가 이별의 순간과 그 전후로 느꼈을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며, 네 소식을 알기가 싫어 주위 친구가 인스타를 켜면 시선을 돌리는 비겁한 사람이다.


내년에 내가 바라는 것은 염치없지만 재회이며, 그것이 안된다면 그저 내 감정을 그대로 느끼며 좀 더 나에 대해서 잘 알게 되는 해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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