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이 존중 받는다는 것
디자이너로 일해 본 사람들은 대부분 이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디자인 존중'
나의 디자인 스타일과 결과물을 클라이언트가 존중해주는 것. 기획, 스토리 보드는 주되 디자인은 디자이너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결과물을 수정은 하되 디자이너의 스타일과 의견은 존중은 해주는 것. 그걸 나와 디자이너 친구들은 '디자인이 존중 받다' 라고 표현했다.
이전 회사에서는 또라이 같은 대표와 경영진의 파탄 난 인성을 감당하지 못해 그만뒀다면 사실 이곳은 대표의 인성도 인성이지만 업무적인 스트레스가 가장 큰 퇴사의 원인이었다.
가장 큰 예를 들어보자면 이런 것이다. 대표는 처음 내가 이력서를 제출했을 때 나의 포트폴리오 사이트와 기타 만들었던 제품들을 보고 '와 이사람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본인 브랜드의 전체적 디자인을 전부 '나의 스타일'로 바꾸고 싶다고 했다. 이건 면접 때 꽤 길게 나눴던 이야기고 컬러나 톤은 물론 일러스트의 느낌. 나의 손글씨마져 전부 도입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나 역시 이런 프로젝트에 흥미를 느껴 입사를 결정 했던 것도 크다. 그런데 그가 정말 내 디자인을 수용해줬을까? 눈치챘겠지만 아니다. 그는 나를 그저 그의 '툴러'로 쓰고 싶어했다. 입사 후 처음 일주일간은 정말로 내 스타일대로 작업을 했다. 이것도 만들고 저것도 만들고 공홈도 바꾸고 일러스트도 전부 변경해보고.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반복됐다. 하루는 배너를 만들어 컨펌을 받으면 대표는 그날 저녁 단톡방에 띡 자기가 다시 만든 배너를 보냈다. 자기가 만든 것이 훨씬 낫지 않냐며.
또 하루는 열심히 상세페이지를 만들어 변경해놓고 퇴근하면 다음날 출근 후에는 다시 원래의 상세페이지로 돌아와있었다. 왜 바꾸었냐고 물어보면
"와이프가 별로래" 혹은 "친구들이 별로래"
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자려고 누웠는데 또 대표가 직접 만든 상세페이지의 초안을 띡 사진만 보내왔다.
이쯤되면 '대표가 디자이너야?' 라고 물어보겠지만 아니다. 그는 자칭 마케터였다. 포토샵을 배운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초짜였다. '에이. 그래도 감각이 있으니까 그런거 아니야?' 라고 물어본다면 감각도 없다. 그가 만든 상세페이지나 사이트를 누군가에게 물어봤더니 '스크롤을 내리기 싫다.' 라고 표현했다. 오죽하면 유치하고 찌질하지만 단톡방에 누구의 디자인이 더 낫냐며 물어보고 다니기까지 했다. 내가 디자인을 잘한다는 게 아니고 '이럴거면 굳이 디자이너를 왜 쓰지?' 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열심히 회의를 하고 기획안을 짜고 컬러도 정해놓고 막상 다 만들어놓으면 자꾸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그때마다 대표는 'XX씨가 잘 모르나본데 대기업 다니는 내 친구들은 이게 더 낫대.' '우리 와이프는 이게 더 낫대' 라며 자꾸 남 핑계를 대고 자신이 만든 것을 옹호했다.
'그냥 그러면 마음 편하게 대충하고 대표가 만들라고 해' 라고 말할 수도 있겟지만 대표는 자꾸 나를 불러다 앉혀놓고 '한 게 없다.' '손이 느리다.' (기껏 만들어 놓으면 엎어버리는데?) 또 '인스타 광고 효율이 나오질 않는다. 인스타가 별로인가보다.' (내가 열심히 피드 톤앤무드 맞춰놓으면 뭐하나. 이상하다고 지가 만든거 올리라는데) '내가 한 디자인이 훨씬 낫다고 말하더라' (도대체 누가?) 라는 식으로 타박을 줬다. 그리고 뒤에는 꼭 이런말을 덧붙혔다.
"나는 착한 사람이라 남에게 싫은 소리 잘못해. 상처주는 것도 싫고. 그런데 XX씨에겐 계속 이런 말이 나오네"
계속 이런 일이 반복되니 자존감도 낮아지고 '정말 내가 디자인에 소질이 없나? 그만 둬야하나. 내 디자인이 그렇게 별로인가?' 매일 이런 생각들로 잠들지 못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회사는 메인 캐릭터가 있었는데 '전 디자이너'가 애니메이션 과를 나온 사람이라 꽤 잘 만들어 놓았었다. 사실 나는 동글동글하고 감성적인 일러스트를 그리는 사람이고 그 캐릭터는 미국 카툰 스타일의 힙?한 캐릭터였는데 나의 그림체로 따라 그리기에 사실 많이 벅찼다. 그릴 수는 있었다. 면접때도 그려갔고, 그런데 그 사람이 그린 '그 느낌' 그대로 그리는게 버거웠다. 그런데 대표는 계속 내게 '그림 연습을 해라.' '똑같이 그려라.' '이 느낌이 아니다.' 라며 면박을 줬다.
그러던 입사 2주일 쯤, 출근 후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대표가 커피를 먹자며 카페에 데려갔다. 테라스에 앉자마자 대표는 내게 말했다.
"XX씨. 내가 생각해봤는데 XX씨가 해놓은 게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그 순간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푹 내쉬며
"대표님. 제가 그만둘게요. 그게 맞는 것 같네요."
라고 첫번째 퇴사 의사를 밝혔다.
(왜 첫번째인지 투비컨티뉴...)
+ 그가 디자이너를 '툴러' 라고 여긴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내 옆자리에 앉아서 '여기엔 이 그림을 넣고, 폰트는 이걸로 하고, 컬러는 이거를 쓰고' 라며 지휘를 시작했을 때 였다. 결과물이 어땠냐고? 완전 구렸음.
+ 혹시 회사가 디자인 회사냐고? 아니 그냥 제조업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