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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살아야 100년인 것을 (61) 못 견디 지루함

목적 없는 스크롤의 중력

by seungbum lee

목적 없는 스크롤
Q: 왜 SNS를 목적 없이 스크롤할까요?
A: 지루함을 못 견디기 때문입니다. 해법은 SNS 앱을 삭제하고 웹으로만 접속하는 것입니다. 마찰을 만들면 중독이 줄어듭니다.



목적 없는 스크롤의 중력
​1초의 공백도 허용되지 않는 삶
​스물아홉의 회사원 지훈에게 ‘공백의 시간’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지하철이 도착하기까지 남은 30초, 커피 머신 앞에서 대기하는 15초, 심지어 화장실에 앉아 있는 2분까지도,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찾아 헤맸다.


그의 엄지는 일정한 속도로 화면을 긁어 올렸다.
​오늘도 점심시간, 회사 구내식당에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짧은 찰나, 지훈은 습관처럼 SNS를 열었다. 어제의 연예 가십, 얼굴도 모르는 동창의 화려한 해외여행 사진, 그리고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던져주는 흥미롭거나 혹은 무의미한 영상들. 그는 그것들을 쫓아가며 10분이라는 시간을 통째로 증발시켰다. 밥이 나왔을 때도, 그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허겁지겁 숟가락질을 했다. 지훈은 자신이 이 거대한 정보의 흐름에 표류하는 작은 잎사귀 같다고 느꼈다. 스크롤을 멈추는 순간, 지루함이라는 차가운 물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1.5억의 실수와 지루함의 민낯
​중독은 결국 현실에서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날 오후, 지훈이 작성한 신규 사업 투자 보고서에 심각한 오류가 발견되었다. 단순한 계산 착오였는데, 그 금액이 무려 1억 5천만 원에 달했다.
​"지훈 씨, 내가 어제 보고서 최종 검토하랬잖아! 이 큰 숫자를 왜 그냥 넘겨요?" 상사의 노성이 회의실을 울렸다.
​지훈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최종 검토 시간 30분. 그 시간을 그는 무엇을 했을까? 떠올려보니, 점심 식사 직후 찾아온 나른함과 공백을 견디지 못하고, 그는 책상에 앉아 습관적으로 SNS 피드를 돌려보고 있었다. '5분만, 10분만'이 결국 30분이 되었고, 보고서는 검토되지 않은 채 상사에게 넘어갔다.
​퇴근 후, 지훈은 심각하게 자신의 문제를 직시했다. 왜 그랬을까? 왜 중요한 일을 놔두고 그 무의미한 화면을 봐야 했을까? 그는 인터넷 검색창에 'SNS 중독 해결'을 검색했다. 수많은 기사와 조언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한 문장이 그의 눈을 꿰뚫었다.
​"당신이 SNS를 목적 없이 스크롤하는 이유는, 단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의 생각과 함께 홀로 있기를 두려워한다."
​맞는 말이었다. 그는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했다. 잠시의 정적도, 깊은 생각도, 그에게는 고통이었다. 뇌가 습관적으로 도파민을 요구했고, 앱은 가장 쉽고 빠르게 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달콤한 마약이었다.

불편함이라는 마찰력
​지훈은 다음날 아침, 단호하게 실행에 옮겼다. 전문가의 조언대로 해법은 '마찰(Friction)'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가장 먼저 스마트폰 홈 화면의 모든 SNS 앱 아이콘을 찾아 삭제 버튼을 눌렀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X, 유튜브까지. 깔끔하게 정리된 홈 화면은 마치 고요한 새벽안갯속의 마을처럼 낯설고 평온했다.
​며칠 후, 몸은 여전히 반응했다. 대기 시간이 생길 때마다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앱 아이콘이 있던 자리를 더듬었다. 앱이 없자, 그는 웹 브라우저를 켜야 했다. 웹 주소를 치고, 로딩되는 시간을 기다리고, 매번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불편함. 이 사소한 '마찰'이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다.
​"아, 귀찮아."
​비밀번호를 입력하기 위해 키보드를 누르려던 손이 멈칫했다. 불과 30초면 접속할 수 있었던 앱과 달리, 이 과정은 최소 1분 이상을 요구했다. 그는 그 1분을 소비하는 것보다 그냥 그 순간의 지루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찰이 그의 중독적 행동을 성공적으로 저지한 것이다.

주도권을 되찾은 15초
​지훈의 일상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1초의 공백도 허용하지 않던 중독자 민호가 아니었다.
​커피를 기다리는 15초, 그는 그저 창밖을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햇살,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 탕비실 구석의 작은 화분.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지하철 대기 시간 30분 동안, 그는 작은 주머니 사이즈의 책을 꺼내 읽거나, 머릿속으로 어제 놓쳤던 보고서의 논리 구조를 다시 짜보았다.
​'지루함'은 더 이상 그의 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내부 목소리를 듣게 해주는 조용한 안내자였다. 그의 뇌는 도파민을 갈망하는 대신, 고요함 속에서 깊은 사고와 집중력을 되찾아갔다.
​어느 날 오후, 상사가 던져준 서류를 검토하기 전,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공백이 주는 불안 대신 평온함이 찾아왔다. 1억 5천만 원의 실수는 다시는 없었다. 지훈은 깨달았다. 자신의 시간을 통제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다는 의미임을. 그의 스마트폰 화면은 여전히 깔끔했고, 그의 삶은 더 이상 SNS의 목적 없는 스크롤에 의해 흘러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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