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남은 돌보고 나는 안 돌볼까요?
자기 돌봄 포기
Q: 왜 남은 돌보고 나는 안 돌볼까요?
A: 이기적으로 보일까 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해법은 "빈 그릇은 아무것도 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자기 돌봄은 이기심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텅 빈 잔: 은주의 이야기
은주에게 세상은 항상 그녀의 손을 필요로 하는 거대한 유기체와 같았다. 그녀의 삶은 타인을 돌보는 촘촘한 그물망으로 짜여 있었다. 아픈 동생의 병간호, 늘 바쁜 부모님을 위한 집안일, 직장에서는 항상 동료들의 짐을 덜어주는 '착한 은주 씨'였다. 그녀는 언제나 활짝 웃는 얼굴로 주변을 환하게 밝혔지만, 그 미소 뒤에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은주 씨, 미안한데 오늘 이 서류 좀 급하게 처리해 줄 수 있을까? 내가 지금 너무 바빠서..." 동료 지영 씨는 늘 그랬듯 간절한 눈빛으로 은주를 바라봤다.
"네, 그럼요. 제가 할게요." 은주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미 자신의 퇴근 시간은 훌쩍 넘긴 터였지만, 지영 씨의 난처한 얼굴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타인의 요구에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내가 거절하면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들이 은주의 마음속을 끊임없이 맴돌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필요는 늘 뒷전으로 미뤄두었다.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시간도, 조용히 책을 읽는 시간도,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며 쉬는 시간도 그녀에게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텅 비어 가는 자신의 잔을 애써 외면한 채, 은주는 주변의 잔을 채우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은주는 심한 감기 몸살로 쓰러지고 말았다. 며칠 밤낮없이 이어진 야근과 돌봄 노동은 그녀의 몸과 마음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열에 들떠 침대에 누워있는 은주에게 찾아온 것은 아무도 없었다.
동생은 친구들과의 약속에 나갔고, 부모님은 지방에 내려가 계셨다. 직장 동료들은 그녀의 부재를 업무 공백으로만 느낄 뿐이었다.
"아무도... 아무도 나를 돌봐주지 않잖아."
고열로 흐려진 시야 속에서 은주는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그토록 많은 이들을 돌봐왔는데, 정작 자신은 홀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서글펐다. 그녀의 마음속에 쌓여있던 오랜 서운함과 공허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텅 비어버린 자신의 잔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열이 내리고 몸이 조금씩 회복되면서 은주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왜 나는 나를 돌보지 않았을까?' 그녀는 거울 속 초췌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자문했다. 그 질문의 답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이기적으로 보일까 봐.'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갇혀, 그녀는 가장 소중한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오후, 그녀는 우연히 오래된 책 한 권을 펼쳤다. 그 책 속에서 그녀는 짧지만 강렬한 문장을 발견했다. "빈 그릇은 아무것도 줄 수 없다." 은주의 눈앞이 번쩍 뜨이는 듯했다. 맞다, 텅 비어있는 자신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온전히 무언가를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자신이 타인을 돕는다는 명목 아래, 사실은 자신을 소진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자기 돌봄은 이기심이 아니라, 타인을 진정으로 돕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그날 이후, 은주의 삶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점심시간에 혼자 산책을 나섰고, 퇴근 후에는 서점에 들러 좋아하는 그림책을 샀다. 주말에는 예전부터 배우고 싶었던 그림 강좌를 신청했다. 처음에는 '이렇게 나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이 괜찮을까?' 하는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붓을 들고 물감을 섞는 순간만큼은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녀의 그림 속에는 다채로운 색깔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은주 씨, 이 서류 좀 부탁해도 될까?" 지영 씨의 물음에 은주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영 씨, 오늘은 제가 선약이 있어서 어려울 것 같아요. 내일 아침에 제가 출근하면 바로 도와드릴게요." 처음으로 '아니요'라고 말해본 은주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신기하게도 후련했다.
지영 씨는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
은주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않았다. 피곤할 때는 피곤하다고 말했고, 도움이 필요할 때는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의 내면은 조금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텅 비었던 그녀의 잔은 이제 따뜻한 물로 가득 차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넘치는 물은 그녀 주변의 잔들에게도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어느 날, 은주는 동생의 병원에 함께 갔다. 그녀는 예전처럼 무작정 모든 것을 해주려 하지 않았다. 대신 동생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주고, 필요한 것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지지해 주었다. 은주가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자신을 돌보는 것을 보면서, 동생도 자신의 삶을 더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의지를 보였다.
"누나, 요즘 표정이 참 밝아졌어. 보기 좋다." 동생의 진심 어린 말에 은주는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이제 알고 있었다. 자신을 돌보는 것은 결코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고, 타인을 더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었다. 텅 빈 잔으로는 아무것도 줄 수 없지만, 스스로를 채운 잔은 흘러넘쳐 모두를 이롭게 한다는 것을. 은주는 이제 자신만의 빛으로 주변을 환하게 비추는 진정한 '착한 은주 씨'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