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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살아야 100년인 것을 (63) 의미 없는 회의

무의미의 만성 피로: 회의실의 앨리스

by seungbum lee

의미 없는 회의

Q: 왜 불필요한 회의에 시간을 쓸까요?

A: 거절할 용기가 없어서입니다. 해법은 "이 회의의 목적이 뭔가요? 제가 꼭 필요한가요?"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쳇바퀴 위에서
​혜진은 매일 아침 9시 5분, 사무실에 도착해 텀블러에 커피를 채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고 9시 30분, 그녀는 어김없이 '주간 업무 진척도 공유 회의'라는 이름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갔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3층 대회의실. 길게 늘어선 테이블 주위로 열두 명의 팀원이 앉아 있었다. 회의는 항상 똑같았다. 팀장인 민 상무의 넋두리로 시작해, 각자가 지난주에 했던 일들을 굳이 다시 설명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모두의 노트북 화면에는 이미 어제 오후에 공유된 주간 보고서가 띄워져 있었다.




​혜진은 시계에 시선을 고정했다. 9시 52분. 영업팀 김 대리가 '핵심 목표 시장'에 대한 거창한 분석을 하고 있었다. 혜진은 디자인팀 소속이었고, 그녀가 맡은 프로젝트는 이미 지난주에 최종 시안이 통과된 상태였다. 그녀의 업무와 김 대리의 분석 사이에는 태평양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왜 여기에 앉아 있는 걸까? 이 시간에 디자인 수정 작업만 해도 두 시간은 벌겠는데.
​회의실의 공기는 습기와 미지근한 커피 냄새로 무거웠다. 모두가 끄덕이거나, 혹은 무표정하게 화면을 응시했다. 그들의 눈빛에는 **'이 회의가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거절할 용기가 없다'**는 만성적인 피로감이 서려 있었다. 혜진은 그 분위기가 마치 무거운 방패처럼 자신을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10시 40분. 회의는 끝났고, 팀원들은 마치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들처럼 힘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혜진은 의자에 앉자마자 곧바로 다음 회의 알림을 확인했다. 오후 2시, '신규 마케팅 캠페인 아이데이션 회의'. 혜진은 이 캠페인의 보조 디자이너로 참여할 예정이었다. 메인 디자이너는 옆자리의 준영 씨였다. 그녀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깨진 유리창
​며칠 후, 혜진은 새로운 프로젝트의 마감일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광고 시안 세 개를 오늘 오후 6시까지 넘겨야 했다. 그때, 준영 씨가 다가와 속삭였다.
​"혜진 씨, 미안한데, 지금 마케팅팀 '신규 캠페인 브리핑 회의'에 나 대신 좀 들어가 줄 수 있을까? 내가 지금 긴급 오류 수정 때문에 도저히 자리를 못 비우겠어."



​혜진은 시안 작업에 완전히 몰두해 있었다. 시간은 금이었다. 그러나 준영 씨는 항상 혜진에게 친절했고, 부탁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았다. '브리핑 회의'라니, 아마 한 시간 내내 자료만 읽어줄 것이다.
​"하지만 저 지금 마감…"
​"딱 30분만. 가서 회의록만 좀 정리해 줘. 고마워, 혜진 씨!" 준영 씨는 이미 회의실 쪽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혜진은 한숨을 쉬며 노트북을 챙겼다. 회의실에 들어가자마자, 마케팅팀장은 브리핑 자료를 펼치며 말했다. "자, 그럼 이 캠페인의 핵심은…"
​30분 후, 혜진은 분노에 가까운 허탈감에 휩싸인 채 자리로 돌아왔다. 브리핑 내용은 이미 어제 준영 씨에게 이메일로 공유된 PPT 자료를 그대로 읽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혜진이 직접 참가해야 할 정보는 단 1초도 없었다. 이 '30분' 때문에 그녀는 작업 흐름이 완전히 끊겼고, 마감 시간은 한 시간 더 지연될 위기에 처했다.
​그날 밤, 혜진은 늦게까지 야근을 했다. 텅 빈 사무실에서, 그녀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화가 났다. 왜 남의 불필요한 일에 내 소중한 시간을 낭비했을까? 단순히 '거절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불필요한 회의라는 이 거대한 시스템에 자신이 자발적으로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은 저항의 시작
​다음날 아침, 혜진은 평소처럼 9시 5분에 출근했다. 하지만 마음속은 전날 밤의 깨달음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오전 10시 30분, 그녀에게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제목은 '인쇄물 재질 최종 검토 회의 (필수 참석)'. 발신자는 옆팀의 박 차장이었다. 혜진은 이 인쇄물 디자인을 처음부터 맡긴 했지만, 재질 검토는 이미 그녀와 준영 씨가 충분히 결정하고 자료를 넘겼던 사안이었다. 이 회의에 디자인팀에서 두 명이나 참석할 필요가 있을까?
​혜진은 평소 같으면 아무 말 없이 참석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던 답장을 보냈다. 손가락이 떨렸지만, 엔터 키를 눌렀다.
​수신: 박 차장님
참조: 준영 씨
제목: Re: 인쇄물 재질 최종 검토 회의 (필수 참석)
​박 차장님, 안녕하세요. 디자인팀 이혜진입니다.
​문의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 회의의 가장 핵심적인 목적은 무엇인가요?
​재질 관련해서는 제가 어제 시안 C와 D의 최종 재질 샘플 사진 및 스펙을 모두 정리해서 준영 씨에게 공유드렸습니다.
​혹시 제가 직접 현장에 가서 답변해야 할 특수한 질문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만약 박 차장님과 준영 씨가 최종 결정을 내리실 수 있다면, 저는 현재 마감일이 촉박한 작업이 있어 해당 시간에 회의록만 수신하는 형태로 진행해도 될까요?
​메일을 보낸 후, 혜진은 긴장 속에서 답장을 기다렸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거절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올까 봐 걱정되었다.
​5분 뒤, 답장이 도착했다. 박 차장이었다.
​수신: 이혜진
참조: 준영 씨
제목: Re: Re: 인쇄물 재질 최종 검토 회의 (필수 참석)
​혜진 씨, 안녕하세요.
​아, 그렇군요. 준영 씨가 관련 자료를 이미 받았군요. 이 회의는 인쇄소 측에서 최종 오더 전에 재질을 '눈으로 확인'하는 절차라서, 사실 디자인팀이 두 분씩이나 올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준영 씨만 참석하셔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혜진 씨는 중요한 업무에 집중하세요.
​혜진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성공이었다. 그녀는 불필요한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한 시간을 벌었다. 그녀의 작은 질문, **"이 회의의 목적이 뭔가요? 제가 꼭 필요한가요?"**라는 용기 있는 질문이, 그녀의 시간을 지켜낸 것이다.





시간의 주인
​이후, 혜진의 업무 방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는 모든 회의 초대장을 수락하기 전에 잠시 멈췄다. 그리고 자신에게 물었다. 이 회의에서 내가 기여하거나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이 시간을 쓰는 비용보다 큰가?
​회의 초대 메일이 올 때마다, 그녀는 조용히 메일의 제목과 내용을 되씹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의문이 들면, 주저하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제가 미리 준비해 가야 할 부분이 있을까요? 없다면 회의록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요?"
​"이 회의에서 저의 역할이 무엇인가요?"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까다로운 사람'으로 볼까 두려웠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녀가 회의에 불참하는 대신 집중한 결과, 그녀의 작업물 마감 기한 준수율과 품질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상사들은 그녀의 업무 효율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불필요한 회의를 줄인 덕분에 그녀는 예전처럼 잦은 야근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가장 놀라운 변화는 다른 팀원들에게서 나타났다. 점심시간, 동료들은 혜진에게 "혜진 씨처럼 질문하고 빠져나오는 법 좀 알려줘요"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어왔다. 혜진의 작은 용기가 사무실의 만성적인 '회의 피로'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 혜진은 오후 4시의 한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는 정말로 그녀의 디자인 결정이 필요한 중요한 회의였다. 회의는 짧았고, 명확했으며, 모두가 필요한 논의만 하고 30분 만에 끝났다.
​회의실을 나오며, 혜진은 창밖을 바라봤다.



오후의 햇살이 사무실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거절할 용기가 없어 무의미의 쳇바퀴를 도는 직장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시간의 주인이었고, 그 시간은 가치 있는 일로 채워져 있었다. 회의실의 앨리스였던 그녀는 마침내 그 지루한 토끼굴에서 빠져나와, 현실의 효율적인 직장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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