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804호의 전기 가족 이야기
프롤로그. 평화로운 아침
2025년 12월 5일 목요일 오전 10시. 서울 강동구 한 아파트 804호의 배전반 안.
"아, 오늘도 평화롭구만."
전압씨(220V)가 느긋하게 기지개를 켰다. 중년의 신사 같은 그의 모습은 언제나 안정적이고 품위가 있었다. 그는 이 집의 전기 시스템을 30년간 책임져온 베테랑이었다.
"전압 형님, 오늘 날씨 좋네요!"
젊고 활기찬 전류군이 배전반 한쪽에서 팔짝팔짝 뛰며 말했다. 그는 항상 바쁘게 움직이는 성격으로, 집 안 곳곳을 누비며 에너지를 전달하는 일을 담당했다.
"그래, 전류야. 오늘은 목요일이고 주인 김씨 부부가 출근했으니 우리도 한가하겠어. 냉장고 형님과 김치냉장고 누나만 돌보면 되지."
배전반 구석에서 저항씨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과묵하지만 든든한 중년 남성의 이미지였다. 그의 역할은 전류군이 너무 과하게 흐르지 않도록 적절히 제어하는 것이었다.
"저항 아저씨는 오늘도 조용하시네요."
"말을 아끼는 게 미덕이지. 난 그저 내 일만 하면 돼."
바로 그때, 거실에 있는 냉장고가 윙윙거리는 소리를 냈다.
"여러분! 저 좀 도와주세요. 컴프레서 돌리는 데 전류 좀 더 보내주실 수 있나요?"
냉장고는 이 집의 큰형님 같은 존재였다. 24시간 쉬지 않고 일하는 성실한 가전제품이었다.
"알겠습니다, 형님!"
전류군이 씽씽 달려가며 냉장고에게 에너지를 전달했다. 전압씨는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봤다.
"우리 팀워크 정말 좋지 않나? 하하하!"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 작은 전기 세계에서는 각자의 역할이 명확했고, 서로 조화롭게 일했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지금 이 순간, 아파트 지하 전기실에서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위기의 시작
오전 10시 37분.
"어? 뭔가 이상한데..."
전압씨가 갑자기 몸에 이상한 기운을 느끼며 얼굴을 찌푸렸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몸을 억지로 끌어올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형님, 무슨 일이세요?"
전류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잘 모르겠어. 뭔가... 힘이 자꾸 세지는 것 같아. 이건 내 의지가 아닌데..."
저항씨가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 긴장감이 역력했다.
"안 돼. 이건... 외부에서 뭔가 들어오고 있어."
"외부요?"
전류군이 눈을 크게 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크아아아악!"
전압씨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몸이 갑자기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220볼트였던 그의 체격이 순식간에 250볼트, 280볼트로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형님! 무슨 일이에요?!"
"으악! 몸이... 몸이 제어가 안 돼! 누가 나를 키우고 있어!"
전압씨의 몸은 계속 부풀어 올랐다. 300볼트, 320볼트, 350볼트...
"저항씨!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해요!"
전류군이 패닉 상태로 소리쳤다.
저항씨는 침착하게 배전반 계기판을 확인했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런... 지하 전기실에서 문제가 생긴 것 같아. 3상 전원의 중성선이 단선됐어. 그래서 380볼트 고전압이 우리 집으로 직접 들어오고 있어!"
"3...380볼트요?!"
냉장고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220볼트 전용 제품이었다. 380볼트는 그에게 독약과도 같았다.
"안 돼... 우리 모두 죽는 거야?"
주방 한쪽에 있던 김치냉장고 누나가 울먹이며 말했다.
"아직... 아직 희망은 있어."
저항씨가 이를 악물었다.
"내가... 내가 최대한 막아볼게. 전류야, 너는 지금 당장 모든 가전제품들에게 경고해. 최대한 전력 사용을 줄이라고!"
"알겠습니다!"
전류군이 집 안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압씨의 몸은 이미 360볼트를 넘어서고 있었다.
"크으으... 안 돼... 이러다간..."
전압씨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아니었다. 380볼트라는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