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물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by 문 내열

다이어리 365쪽을 넘기고나니 새해다. 한 페이지씩 거꾸로 넘기니 가슴을 먹먹케 했던 슬픈 사고, 가슴을 쓸어내렸던 충격적인 사건, 사랑하는 이를 수술실에 들여보내놓고 기도했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더듬어진다. 우울하하고 답답한 한 해였다. 지난 것들을 다 잊어버릴 수는 없지만 마음을 다잡고 새해를 맞이해야겠다고 책상에 앉아있다. 새로운 계획을 세우느니 보다는 새해에는 물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라 적어본다.




나는 물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인류는 달나라로, 화성으로 달려가 맨 먼저 물을 찾고 있다. 물만 찾는다면 우리는 그곳에서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물은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다.


우리는 이처럼 소중한 물을 너무나 당연시하고 별것 아닌 것 마냥 살고 있다. 단수가 몇 시간만 지속되어도 얼마나 불편한지, 얼마나 필요로 한지 우리에게 쉽게 다가온다. 옛날에는 가뭄이 심하여 농작물이 말라죽어가면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기우재를 지내면서 소원도 했었다. 이처럼 없어서는 안 될 그런 소중한 물처럼 나도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다.


아내가 목마를 때 목을 축여줄 수 있는 물,

자식들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몸을 녹여주는 따뜻한 물.

더위에 지쳐 쓰러져 가는 이웃들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아이스워터 같은 물이 되고 싶다.


물은 질서가 있다. 항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지도 않는다. 만약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역류한다면 대 재앙이다. 세상살이도 물의 이치와 같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치고 올라가면 어떻게 된가? 반란이고 반역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물의 질서를 지키야 하는지도 모른다.


물은 순종할 줄 안다. 그러나 한계점을 넘으면 무서운 악마로 변하기도 한다. 흐르는 물을 잡아두면 웅덩이를 만들고, 저수지를 만들고, 호수를 만들고, 바다가 된다. 저수지에 가두어둔 물은 저항하지 않고 수문을 열어줄 때까지 순종하고 기다려준다. 그렇다고 마냥 순종하는 것만은 아니다. 저수지에 물의 양이 한계점을 넘으면 뚝을 무너뜨리고 마을과 들판을 집어삼키는 수마로 돌변한다. 강물도 마찬가지다. 한계점을 넘으면 둑을 무너뜨려 버린다. 사회조직도 우리가 만들어 놓은 규율에 물과 같이 순종하기 때문에 질서가 유지된다. 그러나 권력의 남용이, 회사 경영의 횡포가 지나쳐 백성과 종업원들의 인내가 한계점에 이르면 저항한다. 회사노조는 기계를 멈춰 세우고 파업을 한다. 때로는 회사 존패의 위기까지 치명적인 상처를 준다. 순종은 결코 복종이 아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더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자제와 타협이 녹아있는 완결체다.


물은 무색이다. 그러나 푸른색도 만들 줄 안다. 찻잔에 담겨있는 물 그리고 호수, 강물은 모두 무색이다. 그러나 바닷물은 푸른색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물과 같은 이치다. 나라는 개인은 아무런 색깔이 없다. 그러나 한국에 살고 있으면 민주주의 시민으로 포장되고 러시아나 중국에 있으면 사회주의 색깔을 지니고 있는 시민이 된다. 푸른빛의 바다와 같이 커다란 집단을 이루면 무색이 아니다. 민주주의 와 사회주의로 내 색깔을 만들기도 한다.


물은 매우 순하고 부드럽지만 엄청난 파괴력도 갖고 있다. 부부싸움을 칼로 물배기라고 했던가? 부부싸움은 상처도 흔적도 없는 싸움이라는 뜻 일게다. 그러나 이처럼 부드럽고 순해 보이지만 물망울이 바위도 뚫는 이 저력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는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다이아몬드 가공도 물로 한다 하니 정말 역설적이다. 나는 물이 되고 싶다. 남들에게는 매우 부드럽고 유연 하지만 내면은 다이아몬드를 가공할 수 있는 물, 외유내강의 인간 말이다.


물은 자기 모양과 자기만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아 천(개)의 이름으로 존재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면 내 이름은 빗방울, 굵기가 작으면 보슬비, 더 작아지면 안개비라 불러준다. 위치에 따라 나를 불러주는 이름 또한 다양하다. 컵 속에 들어가 있으면 컵물, 밥솥에 앉아 있으면 밥물, 변기에 있으면 똥물, 높은 벼랑에서 내려오면 폭포수, 시냇가를 달리면 시냇물, 땅속에 숨어 있으면 지하수라 부른다. 나도 누구의 남편, 아빠로만 불리기보다는 다재다능하여 물처럼 천(개)의 이름으로 살고 싶다. 골프를 잘 치는 골퍼, 피아노를 연주할 줄 아는 피아니스트, 글을 잘 써서 감수성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잔잔한 감동을 주고,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사이다 같은 활력을 주고, 길을 헤매고 방황하는 젊은이에게는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글을 쓸 줄 아는 작가로 말이다.


물은 감정의 표현이다. 사랑싸움 끝에 헤어지자는 남자 친구의 독설에 여자 친구는 아무런 말이 없이 볼위로 (눈) 물을 흘리고 있다. 그 눈물방울엔 사랑의 시작부터 끝까지 수백 번 웃고 울었던 모든 기억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가슴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었던 그이를 떠나보내는 아픔의 표현 일지도 모른다. 사랑에 목마르는 사람들은 연인을 빗방울이나 호수로 빗대어 그리움을 표현 하기도 한다.


새해를 을사년 "뱀"의 해라고 하지만 나는 "물"의 해로 정하고 감성이 충만한 한 해를 보내고자 한다.

keyword
이전 14화어느 기관사의 마지막 고별인사